영주가 잃은 언어

그것은 소리 없이 찾아온다, 20220930

by 윤재영

사람 많은 고깃집은 번잡스럽고 성미에 안 맞는다며 넘기고, 횟집에서 갓 잡은 생선회나 밑반찬 같은 것으로 술을 넘긴 게 첫 번째 자리였다. 주말에 일을 한다는 스무 살, 스물한 살 학생들은 진작 통금 시간에 맞추어 집으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두 번째는 자리를 옮겨 작은 술집에서 함께 맥주를 마셨고, 그중 한 명이 취한 것 같다는 말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결국 끝까지 남아있는 것은 멀뚱멀뚱 앉아있던 영주와 사장뿐이었다.


그저 자리에 앉아 기본 안주로 나오는 뻥튀기를 야금야금 조금씩 주워 먹는 영주를 빤히 바라보다 사장은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오래간만에 함께 일 하는 사람들끼리 회식을 하자고 만든 자리인데 어쩌다 보니 평일 오후에 일하는 사람들끼리 남아버렸다. 이런 자리는 질색하며 바로 집으로 돌아가 버릴 것 같았던 사람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게 조금 신기하고 어색해서, 사장은 뺨을 긁적이다가 다 먹은 감자튀김 바구니를 포크로 쑤시던 것을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주, 와인 마실 수 있어?"


영주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추워하던 영주를 밉지 않게 흘기다가 팔에 들고 있던 남방을 건네주고,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채 나란히 길을 걸어 도착한 와인 바였다. 마주 보고 선 올곧은 건물의 옆으로 돌아가니 조금 낡은 골목 사이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와인 바는 입구에 아무것도 걸어놓지 않아 뭘 하는 곳인지 영주가 알 턱이 없었다. 사장이 문을 열자, 비로소 옅은 담배 냄새와 향긋한 술의 과실 내음이 훅 풍겨왔다.


영주는 어색하게 사장의 뒤를 쫓았다. 잘 아는 곳인 듯 입구의 카운터에 서 있던 직원이 인사하고, 가게 안쪽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던 이가 반쯤 뛰어나와 두 사람을 맞이했다. 영주는 사장의 뒤에 숨다시피 하며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에게 집중하는 사람들은 세 명이 채 되지 않음에도.


수연 씨 오래간만이네, 하고 운을 뗀 직원이 반갑게 웃으며 팔을 벌렸다. 수연은 자연스럽게 그 안으로 들어가 가볍고 짧게 몸을 기대듯 안았다가 떼어내고 영주를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편하게 웃는 얼굴이 낯설고 늘 듣던 사장님이 아닌 이름으로 불리는 그가 조금 어색했다. 팔목을 잡고 옆으로 당기는 몸짓은 일 할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으나, 영주는 수연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옆은 친구냐는 짧은 물음에 수연은 고개를 살살 저으며 직원이라고 마찬가지로 짧게 대답했다. 직원의 시선이 영주에게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고, 어느새 이끌려 가 앉은자리에 와인 한 병과 잔 두 개가 놓였다. 곧 치즈 플래터를 가져다준다는 말에 영주가 황급히 고개를 들었을 때, 수연은 과일이면 충분하다고 대답했다.


"……수연 씨, 직원 괴롭혀?"

"우리 가게 애들 전부 치즈 못 먹어."

"술에 과일만 먹으라고 군기 잡는 줄 알았지."


시시껄렁한 농담에 영주는 웃었다가 금방 미소를 지웠다. 어둑어둑한 내부 곳곳을 밝히는 자그마한 불빛이 낯설지 않았다. 와인이 채워지자 영주가 황급히 잔 끝에 손을 가져갔지만 수연은 그제야 조금 자연스럽고 편하게 웃어 보였다.


"내가 와인 마시러까지 와서 예의 챙기게 할 사람으로 보여?"


영주는 네, 하고 내뱉을 뻔한 입을 꾹 말아 다물고 그저 조금 웃어 보였다.


어색해질 때 즈음 간단하고 짧은 일상 이야기가 이어지며 분위기를 녹였다. 두 사람 사이 공기가 꽁꽁 얼어붙은 것은 아니었는데, 영주나 수연이나 말이 많은 편이 아니어서 더 그랬다. 별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의 분위기가 훈훈했다. 영주는 항상 냉정하고 조금 급한 성격인 줄만 알았던 수연의 말랑하게 풀린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수연이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왜, 하고 묻는 것에 영주는 또 그냥 웃어버렸다. 이렇게 대화를 거의 하지 않고 편하게 앉아있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거의 이삼 년 만일 지도 몰랐다.


"사람이 피로에 몰리면, 영주야."

"네."

"처음에는 여유를 잃고 그다음에는 절박함이나 급한 마음까지 잃어버려."


자기 자신을 몰아치다 못해서 그것까지 하지 못하게 지쳐버리는 거야. 스스로 잔에 와인을 따르며 수연이 덧붙였다. 그 눈이 조금 쓸쓸해 보여, 영주는 그러한 경험을 한 적이 있냐고 물어보려다 곧 그만두었다. 수연의 말은 틀린 점 하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좋아하던 거, 늘 하던 말 같은 것들도 잊어버리게 되는 거야."

"……."

"잊어버리는 거랑 잃어버리는 게 어떻게 다른지는 알지?"

"……."

"너 공부 잘했잖아, 영주야."


수연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에 영주는 입꼬리를 올리고 눈꼬리를 내려 웃고 말았다. 술에 취한 탓인지, 할 말이 없는 탓인지, 아니면 정말 수연의 말대로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게 많은 탓인지 자꾸만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게 되었다.


영주에게 수연은 진짜 어른처럼 보였다. 나이 들었다고 떵떵거리며 이상한 소리 하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세계가 확고하지만 그에 반하는 것을 마주하더라도 우선 멈추어 서서 한 번 한숨을 쉰 뒤 냉철하게 판단하는 어른. 가끔 일 할 때에는 급한 성격이 튀어나오곤 하지만, 결국 영주를 챙기는 유일한 어른.


영주는 평생 그런 어른이 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 진짜 어른이 되지 못할 것 같은 사람도 알았다.


영주야, 네가 잃어버린 걸 찾아, 하고 당부하듯 말하는 수연과 함께 영주는 잔을 맞부딪혔다. 와인 한 병을 전부 다 비우고 체리가 담겨 있던 조그마한 그릇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영주는 전부 잃어버려 이제 입술로도 그릴 수 없는 어떠한 언어를 속으로 내내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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