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벽이 되었다, 20221001
기업에서 주최하는 교양 강연이었다. 좁지 않은 강의실을 대여하고 기획안을 확인하는 것은 전부 재희와 같은 팀 사람들의 몫이었으므로, 강연 참여는 반쯤 강제적인 것이 되었다. 저마다 팀끼리 뭉쳐 자리에 앉아서 앞에 놓인 커피를 마시거나 과자를 집어먹는 모습을 뒤에서 둘러보다가, 재희는 적당한 자리에 동기들과 함께 앉았다. 아직 어색해 보이는 후임도 손짓으로 불러다 앉히고, 빈 손으로 오긴 뭣한 마음에 가져온 수첩을 펼쳤다. 수첩은 챙겼는데 펜은 가져오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건 그즈음이었다.
여기가 학교였다면 감상문이나 보고서 따위를 작성해야 했을 것인데, 다행히도 회사 사람들이 인터넷에 접속해 응답한 설문조사 결과만 취합하면 되었으므로 재희는 신경을 누그러뜨렸다. 요 며칠 결재가 반려되고 커다란 호통까지 들어가면서 동기들과 야식을 함께 한 것에 대한 보상을 한 번에 받는 듯했다. 교양 강연에 집중하는 사람은 절반 즈음되었지만, 그런 것까지 관리한다면 여기는 회사가 아니라 정말 학교였을지도 몰랐다.
어디서 유명한 작가라더라, 작품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본인 경험담을 그대로 썼다는 말이 있더라 하는 소리가 드물게 들려왔다. 그게 모두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강사를 섭외하기 위해 메일을 쓰던 후임이 그런 소리를 했던 것도 같았다. 재희는 심드렁히 턱을 괴고 텅 비어있는 하얀 수첩의 줄을 더듬어 손톱으로 따라 그렸다. 자기 경험담 쓰는 게 뭐가 문제라고. 재희 또한 학부생 시절 그랬던 적이 몇 번 있었으므로.
"재희 님."
"네?"
"이따 퇴근하고 다 같이 삼겹살 먹으러 간대요."
"아……."
"우리들만…… 같이 가실래요?"
재희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 처방을 받았지만, 담당의가 싫어하겠지만 약 먹는 걸 하루 정도 쉬면 될 것이다. 술 냄새, 고기 냄새가 옷에 배는 것도 질색이긴 하지만 혼자 사는 텅 빈 집에 그런 냄새라도 가끔 풍겨주는 게 나쁘지 않을 것도 같았다. 번잡스러운 곳은 딱 질색이지만, 대부분 첫자리에서 고기를 먹고 다들 조용한 곳으로 자리 옮기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으니 소란스러움은 조금만 참으면 될 것이라 여겼다.
재희는 잘 만들어진 프레젠테이션 빔 화면을 무감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스스로 준비해 전날 보낼 테니 수정 사항 있으면 알려달라던 자료는 흠잡을 데 없었다. 그러고 보니 디자인도 하던 사람이라고 했다. 작가로서 몇 년, 디자이너로서 몇 년, 그렇게 이런저런 경험을 했다던 강사는 당찬 미소가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내용 자체는 지루하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귀에 박혀 들어왔다. 그저 멍하니 시간만 죽이며 머릿속을 비우고, 좀 말끔해진 상태에서 사무실로 내려갈 생각을 했던 재희가 낭패 어린 얼굴을 했다. 모든 말이 너무 잘 들렸다. 수첩 위에 공연히 손장난 하던 손이 멈춘 것도 그즈음이었다.
사랑이라는 건 모두 선의의 감정일까요?
그 말이 너무도 잘 들려온 탓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사랑의 감정이 모두 재희에게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재희는 사랑 앞에서 치사해졌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겠지만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게 되는 일이 잦았다. 남에게 준 상처는 다시 재희 본인에게 고스란히 돌아와 심장을 할퀴어댔다. 그 이후로 돌아온 이별 통보보다도, 남에게 입힌 상처에 다친 마음이 더 쓰렸다.
사랑은 선의가 아니다. 사람을 지극히 이기적으로 만드는 감정이다. 사람은 자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남을 더 사랑할 수 없는 생물인데, 굳이 굳이 애틋한 이름을 붙인 그 감정은 사람을 곧 망가뜨리게 되는 것이다.
재희는 집에 혼자 남았던 어느 날의 밤을 떠올렸다. 뒤 돌아가는 긴 생머리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붙잡지도 못했다. 어찌어찌 화해했다고는 하지만, 서로를 향해 날 세웠던 마음이 무뎌지고 나서 그 자리에 새겨진 흉터는 사라지지 못했다. 서로에게 흉터가 되어서 나아지지도 못하고, 그만큼 겁을 먹어 두어 발자국씩 서로 물러난 상태에서 한참 동안 시간을 보냈던 것을 생각하면, 사랑은 확실히 독이 아니었다.
그 어느 날의 밤을 떠올리는 날에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곤 했다.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내가 왜 그 애의 손을 잡아주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로부터 시작되어 더는 쓸모없는 온갖 해결 방안을 떠올린다. 그 수많은 해결 방안으로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파올 때 즈음은 자책이 사라지고 체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역시 사랑은 나와 맞지 않는다, 하고.
"강연 너무 일방통행이지 않아요?"
"……."
"그러게…… 누가 보면 사랑 하나 해서 죽는 줄 알겠어."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하고 재희는 생각했다. 커다란 실패로 만들어진 감정의 한계는 딱딱한 돌벽이 되어 재희의 등에 기대어오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게 무너질 때 즈음 나도 끝이 나겠지. 재희는 수첩을 덮으며 무덤덤하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