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성
9월이 기대된 유일한 이유였다.
흥행과는 무관하게 방영자체가 존재이유가 되는 드라마가 있다.
누가 나오냐로 부여되는 존재의미를 결정 짓는
이름 석자 전지현.
누군가를 오래 좋아하다보면 그 사람을 좋아하는 나에 대해 알게 된다.
그 대상을 지지해 온 나의 세월이 주는 이상한 안도감이
그렇다.
그냥 살아지기도 때때로 살아내기도 한 지금에 이르기까지 선명히 남아 있는 게 얼마나 될까?
다만 그때도 지금도 여전한 것.
내가 좋아하는 대상을 매개로 한 선명한 감정이다.
엽기적인 그녀를 보고 꿈꿨던 시절에서 엘라스틴 광고가 대표작이 아니냐며 의기소침한 시절을 지나
도둑들 별그대 암살로 반박의 셔터를 내리며 느낀 희열.
지리산을 함께 등반하는 액티비티까지.
그 시간을 사는 난 공부를 했고 일을 했고 글을 썼고 가끔 좌절했으며 대부분 살 만했다.
그냥 살아지는 때도 애써 살아낼 때도
내가 좋아하는 대상을 좋아하는 시간의 연속에서
자아의 울타리는 촘촘히 튼튼해진다.
해서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자기자신을 좋아하는 것과 다름아니다.
9월의 북극성에서,
세월의 다른 표식인 젼젼은 이렇게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이다.
잘 지냈어?
잘 지내는 데 부침이 있음에도 여전히 괜찮을 거라는 안정감.
베를린을 보면서도 별그대를 보면서도 그래왔듯이.
+지극히 주관적인 북극성 한 줄 평: 얼굴만 봐도 재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