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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도바다 Dec 22. 2016

앙코르 왓,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눈으로 듣고...

--코로 크게 보고 입으로 맛있게 이야기해야 하는 곳, 캄보디아....

여행은 사는 법을 배우게 한다.

뜻밖에 의도하지 않은 길을 가게 될 때

계획하지 않은 길에도 즐거움이 있음을 터득하게 해준다.

낯선 곳에 가면 일상생활에서 닫히고 무뎌진 마음이 열리고

빈손의 자유로움도 느끼게 된다.

한 걸음 물러나 내 삶을 밖에서

담담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해 준다.

유동주의 <지구 반대편에서 3650일> 중에서

힌두 사원 앙코르 와트에는 높이가 67미터 되는 중앙탑이 우뚝 서 있다. 꼭대기는 아름다운 연꽃 모양이다. 힌두교에서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는 메 루산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시대부터 캄보디아에도 사람이 살았다. 대륙의 여러 나라, 즉 인도, 태국, 중국에서 내려와서 살고, 캄보디아 아래쪽 섬나라 인도, 말레이 사람들도 올라와 살았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 여러 민족이 서로 결혼을 하면서 혼합된 인종이 캄보디아에 살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크메르족이다.


크메르족이 일구어 낸 크메르 문명은 인도의 영향을 받아 힌두 문화와 불교문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앙코르를 수도로 삼고 왕국이 자리 잡은 것은 자야바르만 왕조 시대이고, 앙코르 와트라는 대규모 사원이 형성된 것은 12세기. 13세기 초에는 베트남까지 세력을 넓히기도 했지만 14세기부터 앙코르 왕국이 급속히 무너져 내렸다. 무능한 왕들이 연달아 왕위에 오르면서 나라가 불안해졌고 태국과 베트남 등 이웃 나라들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결국 15세기에는 수도 앙코르를 방어할 수 없게 되었고. 앙코르는 버려졌고 그래서 1860년 프랑스의 동식물학자 앙리 무어가 발견해 낼 때까지 밀림 속에서 400년 동안을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압살라는 춤추는 여신 또는 천상의 무희를 뜻하는 말로 캄보디아의 전통 춤이 압살라 춤이다. 느리면서도 섬세하고 움직임 하나하나에 뜻이 담겨 있는 이 춤은 힌두교의 전설에서 그 내용을 따온 것이 많다. 앙코르 사원의 벽화에서 보는 압살라 무희들의 손 모양과 닮아 있다.

크메르어로 도읍(앙코르)과 사원(와트)의 합성어인 앙코르왓은 앙코르 유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12세기 초 건립되었으며, 기존의 다른 사원과는 달리 우주를 표현하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 외부는 해자로 만들어져 있으며, 내부는 크게 3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3층은 천상계로 여겨지며 가파른 계단을 통해 올라가게 된다.



앙코르 와트(크메르어: អង្គរវត្ត, 영어: Angkor Wat, Angkor Vat)는 캄보디아의 앙코르에 위치한 사원으로, 12세기 초에 수르야바르만 2세에 의해 옛 크메르 제국의 도성으로서 창건되었다. 앙코르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있으며, 축조된 이래 모든 종교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맡은 사원이다. 처음에는 힌두교 사원으로 힌두교의 3대 신 중 하나인 비슈누 신에게 봉헌되었고, 나중에는 불교 사원으로도 쓰인 것이다. 앙코르 와트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종교 건축물로서, 옛 크메르 제국의 수준 높은 건축 기술이 가장 잘 표현된 유적이다. 또한 캄보디아의 상징처럼 되면서 국기에도 그려져 있는데, 이것이 관광객들이 캄보디아에 오는 제1 목적이기도 하다.

이 사원은 12세기 크메르 제국의 황제 수르야바르만 2세에 의해 약 30년에 걸쳐 축조되었다. 사원의 정문이 서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해가 지는 서쪽에 사후 세계가 있다는 힌두교 교리에 의한 것으로 왕의 사후세계를 위한 사원임을 짐작케 한다.[2] 길이 3.6km의 직사각형 해자에 둘러싸여 있는 이 사원의 구조는 크메르 사원 건축 양식에 따라 축조되었다. 중앙의 높은 탑은 우주 중심인 메루(Meru)산, 즉 수미산이며 주위에 있는 4개의 탑은 주변의 봉우리들을 상징한다. 외벽은 세상 끝에 둘러쳐진 산을 의미하며 해자는 바다를 의미한다. 이 해자를 건너기 위해서는 나가(Naga)난간을 따라 250m의 사암다리를 건너야 한다. 나가 란 다섯 개의 머리를 가진 뱀을 뜻한다.

앙코르(Angkor)는 산스크리트어 나가라에서 파생된 도읍이라는 의미의 노코르(Nokor)의 방언이고, 와트(Wat)는 크메르어로 사원이라는 뜻이니 앙코르와트는 '사원의 도읍'이라는 뜻이 된다. '사원의 도읍'이라는 의미인 앙코르 와트라는 이름은 16세기 이후부터 사용되었다.

   
앙코르 톰은 현재의 씨엠립에서 북쪽으로 약 5.5km 떨어져 있다. 이전 수도에서 약간 동남쪽으로 위치해 있으며, 중심에는 바푸욘이 있다. 이곳에는 캄보디아 주요 고대 건축물들이 다 모여있다. 앙코르의 주요 유적지의 남쪽 끝부분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초기의 사원 설계와 건축은 12세기 초반인 수르야바르만 2세(재위 1113~1150년)에 의해 시작되었다. 비슈누에게 봉헌하였는데, 수도에서 왕의 국사로 지어졌다. 이 사원 건축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서 그 초기 이름은 알수가 없지만, 브라 비슈누록으로 알려져 있다. 사원의 기공식은 왕의 사후에 이뤄진 것 같으며, 일부 장식들이 완성되지 않은 채로 발견되고 있다. 그의 사후 새로운 왕인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크메르 제국이 재건되었다. 그는 새로운 수도를 약간 북쪽인 앙코르 톰으로 이전하고, 국사도 바이욘으로 각각 옮겼다.

     
14세기와 15세기에 사원은 소승 불교 사원으로 용도가 변경되어, 오늘 날까지 이른다. 16세기 이후로도 관리가 제대로 되지는 않았으며, 그렇다고 용도가 폐기되지도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해자가 정글의 침입을 막아줘서 파괴가 최소화 되었던 것이다.

     
이곳을 최초로 방문한 서양인은 포르투갈 수도사인 안토니오 다 막달레나로 1586년에 이곳을 방문하고서는 "이 세상의 펜으로는 묘사할 수 없는 웅장하고 뛰어난 건축물"이라는 찬사를 남기고, 탑과 장식기단 그리고 천재나 그릴 수 있는 세련됨을 찬사하였다. 이 사원군들이 서양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세기 중반에 앙리 무오의 여행기가 출판됨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다.

     


앙코르 유적에서 놀라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앙코르 왕조 최대 규모의 불교 사원이었던 타 프롬이다. 한때 이 사원에 3,140개의 마을이 속해 있었고, 사원 관리인만 8만 명 정도였다니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되나?

그런데 이 큰 사원은 오랜 세월 동안 밀림에 버려진 채로 있었다. 그 세월 동안 아름드리 보리수와 열대 무화과나무의 굵은 뿌리와 가지들이 사원을 뒤덮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나무의 뿌리는 사원의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고, 나뭇가지가 벽면을 뚫고 들어가 사원 건축물을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다. 이제 와서 나무뿌리를 자르면 유적이 파괴되기 때문에 차라리 지금처럼 나무가 감싸 안은 채 보존하는 편을 택했다고 한다. 자연과 인간의 흔적을 구분할 수 없게 한 몸이 되어 버린 나무와 사원, 그 신비함이 놀라울 따름이다.



앙코르 톰의 바욘 사원 주변에는 관음보살의 얼굴이 새겨진 돌탑이 수십 개나 세워져 있다. 사면에 새겨져 있는 관음보살의 얼굴은 <크메르의 미소>라 불릴 만큼 온화하면서도 다정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단단하기로 소문난 사암에 도구도 변변치 않았던 옛날, 앙코르 사람들은 어떻게 이토록 인자한 얼굴을 조각할 수 있었을까? 밀림에 버려진 채 인류의 기억에서 잊힐 뻔했던 앙코르 문화의 아름다움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왓트 마이는 작은 킬링필드라고도 불리며 킬링필드 대학살 당시 씨엠립과 앙코르 유적 인근에서 학살된 사람들의 해골을 모아놓은 사원이다. 앙코르 유적 입구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씨엡립의 남쪽으로 15Km 정도 가면 마치 바다라고 착각할 만큼 넓은 황톳빛의 호수가 눈앞에 펼쳐진다. 톤레삽은 우기떄가 되면 건기에 비해 수면이 여섯 배로 불어나며 호수 안에는 소수의 수상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호수에는 풍부한 민물어류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이러한 자원은 물새나 수생동물들에게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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