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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도바다 Dec 27. 2016

늦어도 11월에는

--지루함은 신비하면서도 심오한 것이다.

늦어도 11월에는


이맘때는 늘 지루하였다

지루하게 낙엽 지는 나무의 헐벗음

남루하게 추워지는 거리의 바람

지루한 오후의 비스듬한 겨울 햇살

빌딩의 지루하고 듣기 싫은 고성

영원한 해방은 지루하다

*지루함은 신비하면서도 심오한 것이다


이맘때는 늘 쓸쓸하였다

쓸쓸하게 밤하늘의 별자리가 바뀌는 새벽

달을 벗 삼아 자작나무 위로 날아가는 철새

새벽 거리를 걷는 쓸쓸한 낙엽의 발소리

아침을 깨우는 쓸쓸한 새소리


이맘때는 늘 추웠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는 진리 같은 추위

많이 추워야 한다 11월부터

봄철이 되면 따끔한 추위도 한 톨의 양식이 되리니


이맘때는 괜히 아름다웠다 

때 늦은 가을비를 기다리며

사랑한다 

아프지 않았다 전혀

고통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우린 어딘가로 날아갔다

지루하게 영원을 믿으며

**늦어도 11월에는


* 지루함은 신비하면서도 심오한 것이다 - - 에릭 사티(1866~1925) 프랑스 작곡가

**늦어도 11월에는 - - 한스 에리히 노삭의 장편 소설

장편소설 <늦어도 11월에는>

     

건실한 재벌 2세의 아내인 마리안네가 집시와도 같은 떠돌이 작가 베르톨트 묀켄을 만나면서 진정한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이야기. 줄거리는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처럼 통속적이지만 알고 보면 여성의 정체성, 인간의 삶에 관한 반성이 깔려 있다. 미친 듯한 사랑 속에서 행복을 붙잡아 보려고 했던 여인 마리안네는 죽음을 통해서 그 행복을 이루게 된다.

이 소설은 자아상실의 시대, 고도로 발달한 현대 산업사회의 냉엄한 메커니즘에 도전한 인간의 비극을 처절하게 대면함으로써 독자에게 지울 수 없는 감동을 안겨주고 있다. “전후 독일문학의 대표적인 작가이며, 가장 탁월한 작가”라는 사르트르의 극찬을 받은 바 있는 한스 에리히 노삭의 문장과 문체는 풋풋하고 생기 있으며 감동 그자체이다.

     

‘연애소설도 이쯤 되면 예술이구나’하는 감탄이 절로 터지는 작품이다. 사르트르로부터 ‘전후 독일문학의 대표 작가’라는 극찬을 받은 한스 에리히 노삭(1901∼1977)의 출세작. 빗줄기가 오락가락하는 5월의 어느 날 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의 한 공업도시에서는 상공인협회가 주는 문학상 시상식이 열린다. 스물여덟의 유부녀 마리안네는 천진하게 혼자 발장난을 하며 서른네 살의 작가 베르톨트 묀켄의 수상 연설을 무심코 듣고 있다. 두 사람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된다.“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23쪽) 베르톨트의 이 말 한 마디에 귀부인 마리안네는 멋진 저택과 건실하고 부유한 남편을 포기한다. “그가 말했다. 아니, 내가 한 말 같았다.

     

내 목소리가 그대로 메아리쳐 되돌아온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말은 진실이었다. 다른 말을 했다면 그것은 전부 거짓이었다. 나는 그저 ‘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것이 내가 본 그의 최초의 얼굴이었다”(23쪽) 그 길로 마리안네는 막대한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가진 남편을 버리고 집을 떠난다. 베르톨트와 정열적인 키스 한 번 없이 서먹서먹한 채, 외진 국경마을의 낡은 집에 앉아 지도를 펴놓고 도망가 살 곳의 지명을 중얼거리는 마리안네. 11월이면 베르톨트가 쓴 작품이 무대에 올려지고, 돈을 받으면 낡은 폭스바겐을 하나 사서 마음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자고 약속했건만. 마리안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중 자신을 찾아온 시아버지를 따라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이 모든 과거의 사건을 기억해내는 마리안네의 복잡한 심리는 뛰어난 연상과 함께 속도감을 더해간다. 마리안네는 아무런 질책 없이 자신을 받아준 남편과 전과 다름없이 하루하루를 지낸다. 그러나 11월이 오고, 마리안네는 다시 방황한다. 베르톨트의 연극 ‘늦어도 11월에는'은 마리안네가 사는 도시에서 초연된다. 그녀는 베르톨트이 반드시 자신을 다시 찾아오리라 확신하며 초조하게 베르톨트를 기다린다. 마침내 막이 오르던 날, 마리안네는 베르톨트와 함께 떠났던 5월의 그 밤처럼 다시한번 불가능한 사랑을 향해 몸을 던진다.

     

두 사람은 그토록 원했던 중고 폭스바겐을 타고 빗길을 달려 ‘죽음은 영원하다’는 글씨가 씌어진 오래된 철도 건널목에 다다른다. 마리안네가 가르쳐준 자장가를 휘파람으로 나직하게 부는 베르톨트…. 두 사람이 탄 차는 굉장한 속도로 달리다 철로 교각에 부딪힌다.

     

“멀리서 자동차 한 대가 질주해왔다. 가로등이 어둠 속으로 꺾어지는 지점이었다. 우리는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몸은 너무나 가벼웠다. 무게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그대로 철로 교각 쪽으로 날아갔다. 나는 베르톨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는 내 무릎을 꼭 잡고 있었다. 다시는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우린 어딘가로 날아갔다. 아프지는 않았다. 전혀 아프지 않았다. 고통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376쪽)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을 이렇게 담담하게 슬픈듯, 남의 이야기 하듯, 아름답게 진술할 수 있을까? 섬뜩한 감정으로 읽는건 기본이고 애잔한 마음으로 두 사람의 사랑종착점을 눈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화자 마리안네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노삭은 마리안네가 죽은 후에 사건의 전모를 말하게 하는 특이한 서술방식으로 과거의 사건을 현재진행형인 사건으로 둔갑시킨다. 노삭은 지위와 명예, 그리고 돈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잠재의식 속에 숨은 영원한 해방의 의지를 파헤치고 있다.   

     

사랑은 위험하거나 무료하다. 누가 그 중간을 말한다면, 그(그녀)는 필경 애인을 속이고 있는 중이다. 오늘날 일종의 패션(fashion)을 닮아버린 열정은 급속히 속화(俗化)됐다. 사르트르의 극찬을 들었던 노삭(1901~1977)은 아마도 사랑의 열정을 그 원형질로 복원하겠다는 듯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 소설을 썼을 것이다. 이 소설은 28세 독일 여인 마리안네의 ‘불륜’ 이야기다. 그녀는 남편의 재력으로 만든 문학상 수상식장에서 그날의 주인공인 34세 극작가 베르톨트와 사랑에 빠진다. 그것은 봄 날씨 탓이었다(15쪽). 아니 그것은 그가 느닷없이 다가와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23쪽). 아니, 처음 만난 자리에서 도대체 그런 말이 가능하단 말인가?

물론이다. 평생 그리움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은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녀는 ‘정의를 위해 베르톨트와 함께 집을 나간 게’ 아니었다(126쪽). 남편과 6년을 살아온 생활은 하루하루를 견디면서 무엇인가를 기다리던 시간(129쪽)이었다. 그러나 사랑의 모반은 멀리 있지 않았다. 남편을 떠나 베르톨트와 새로운 살림을 꾸려가지만 또다시 그 ‘무료함’은 스멀스멀 머리를 들고 ‘무슨 일이든 그 뒤에는 반드시 빈자리가 있게 마련’(150쪽)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새 남자는 역시 새로운 속박이라는 것을 알게되고, 서로가 불행해지리라 예감하면서(177쪽), 그와 6주 동안 지속됐던 만남이 남편과의 결혼보다 더 괴로운 것이 되고 만다.   
사랑이 모욕이 되고 마는 것을 지켜보는 고통을 아는가? 마리안네를 데리러 그녀의 시아버지가 찾아오기 전에 두 사람은 새 극작품의 개막 공연에 기대를 건다. 베르톨트는 ‘늦어도 11월에는…’(제목·199쪽) 그 작품을 끝낼 생각이었지만, 마침내 목숨과 뒤바꾸는 사랑의 재회가 기다리고 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1인칭 주인공인 마리안네의 심연을 끝없이 파고드는 작가의 붓끝이 신기(神技)에 가깝다. 짧은 지문 문장, 함축적이면 복합적인 단속(斷續)이 반복되는 대화문장 속에 느리면서도 빠른 전개가 펼쳐진다. 우울과 무료함에서 벗어나고픈 사람들은 늦어도 11월에는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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