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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도바다 Feb 26. 2017

마말라뿌람, 푸두체리,첸나이-(4)

--작지만 화려하다. 프랑스풍 섬세하다   복잡하다.

마말라뿌람*푸두체리*첸나이 여행기

     


나는 이번 남인도 여행을 마치고 세 번째 인도 배낭여행을 구체적으로 꿈꾸기 시작했다. 남인도 중 마말라뿌람*푸두체리에서 일주일, 함피 일주일, 고아 일주일, 마이소르*코친*꼴람*깐냐꾸마리등 남인도의 진짜 남쪽 지역에서 삼 주 정도, 전 일정을 한 달 반으로 계획하고 있다. 첸나이 인 아웃하는 경로가 나의 배낭여행루트로서는 가장 적합할 것 같다. 내년은 직장에서 부여하는 1년간의 공로연수, 신분은 직장인이지만 급여가 전액 나오는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아직 남아 있어 하루 종일 걸어도 되는.... 그렇지! 그래! 내년이 나의 일생일대 순수 배낭여행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드디어 온 것이다.

비행기만 예약하고 떠나면 된다. 비행기도 중간 경유지를 팍~팍 넣어 최대한 싼 금액이어야 한다. 직항은 비싸도 너무 비싸다. 그렇게 절약되는 경비는 남인도에서 일주일 이상은 살아 낼 수 있으니까. G/H나 현지 교통(야간기차, 야간 버스) 편까지도 예약하지 않고 완전하고 철저한 가난뱅이로 떠돌아다녀 봐야 한다. 내 인생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지만 돈으로 살 수 없는 배낭여행의 묘미와 진정한 참 맛을 느껴봐야 한다. 처절한 고생과 끝없이 제기되는 인도 여행의 위험이 생기는 것쯤은 안다

나는 누군가? 나를 찾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은 무조건으로 배낭만 하나 달랑 메고 떠나야 한다.  

오늘은 마말라뿌람을 쓴다.

첸나이에서 2박을 하고 마말라뿌람을 가는 교통편을 여행책에서 보니 노란색 로컬버스를 타고 가는 것이 가장 저렴했다. 첸나이에서 마말라뿌람까지는 2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60km의 거리를 30루피(540원 정도), 현지인과 똑같은 금액을 차장에게 직접 건넬 때는 뿌듯하고 행복했다. 이미 여행을 마친 스리랑카 콜롬보, 갈레, 남인도의 첸나이에서 뚝뚝이를 타거나 유적지를 입장할 때 외국인이어서 감수해야 하는 씁쓸하게 몇 배, 몇십 배(어떤 사원 입장료는 인도인은 30루피, 외국인은 500루피)의 요금을 낸 적이 있으니까 그런 심정이 들었을 것이다. 단, 남인도의 로컬버스를 탈 때는 귀마개를 꼭 지참해야 하고 버스 차장과 되도록 먼 곳의 좌석에 앉아야 한다. 승강장마다, 또는 내리는 사람이 있으면 호각을 한 번 휙~ 불고 출발할 때는 호각을 휙~휙~ 두 번 불어 신호하기 때문이다. 정말 귀가 먹먹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런 버스를 2시간 동안 타고 간다고 상상해보라. 왜 귀마개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하는지....

첸나이는 인도에서 4번째로 큰 도시답게 한 시간 이상을 달렸는데도 아직 첸나이 시내였다. 물론 첸나이 번화한 시가지는 지났지만 작은 소읍 같은 도시의 연속이었다. 중간중간 참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렸다. 인도 현지인의 선하고 기특한 발임에 틀림없다. 로컬버스는 교통소음, 버스 안의 시끄러운 대화, 먼지 구덩이를 지나고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맞바람과 이방인을 쳐다보는 인도인의 시선들이 합쳐져서 울퉁불퉁 덜컹거리며 우리나라에서는 한 시간이면 갈 거리를 2시간이나 걸려 마말라뿌람에 도착했다. 

 

  마말라뿌람의 첫인상은 여행책자에서 본 것처럼 작지만 화려했다. 걸어 다니며 둘러보아도 좋다는 여행책자의 안내는 잘못되었다. 건기이지만 무척 덥고 습한 남인도 날씨를 쏙 뺀 미진한 추천일정인 것이다. 버스에 내리자마자 어김없이 달려드는 오토 릭샤왈라, 그들과의 협상은 필수, 마말라뿌람의 유적을 전부 둘러보는데 500루피를 요구했지만 300루피(5,400원 정도)로 하기로 하고 유유자적 사진도 찍으며 둘러보았다. 마말라뿌람을 보고 나서 푸두체리로 이동하여 숙박을 해야 하는 일정이었지만 시간은 넉넉했다. 이곳 마말라뿌람은 반나절이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었다. 인도 특유의 돌로 지어진 사원들과 의미심장한 조각 부조들, 거리의 사람들과 카메라를 통해 소통하면서 남인도의 마말라뿌람의 화려하고 멋진 풍경과 따뜻한 현지인과 정서적 유대를 나누며 최대한 느긋하게 다녔다.  

 mamallapuram은 첸나이 남쪽의 벵갈만의 작은 휴양지이자 유적지로 인기 있는 곳이다.

유적지 통합입장권을 사면 판치라 타스와 해변 사원에 입장할 수 있다.

아르주나 고행상과 크리쉬나 버터 볼은 길가에 있어 입장료가 없다.

  

판치라타스 Panchi Rathas(다섯 개의 사원)

-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건축 양식이 남다른 5대의 전차 모양의 사원이다.

  거대한 바위를 조각하여 만든 사원으로 마치 진흙으로 만들어낸 것처럼 너무나 정교하다.     

해변 사원 Seashore Temple

- 7세기  촐라 왕조 시대에 건립된 바닷가에 있는 남인도 최초의 석굴 사원으로 세계문화유산이다.

   큰 사원은 쉬바 사원, 작은 사원은 비슈누 사원이다.  울타리에  조각된 소 형상과 무희들 형상이 특이하다.

아르주나 고행상 Arjuna's Penance ; 인도 신화 속의 코끼리상, 쉬바 신 등이 큰 바위에 새겨져 있다. 뒤편 바위산 동굴 사원의 조각상도 볼 만하다. 옆 언덕에는 흔들바위 Krishna's Butter Ball이 있다.     

아르주나 고행상--높이 15m, 가로 29m로 큰 바위 하나를 모조리 깎고 다듬어 20여 명의 석공이 10년여에 걸쳐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이 조각 전체를 "아르주나의 고행"이라고 부르는 설이 있는데 아르주나가 "마하바라타와" 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시바 신이 강력한 무기를 줄 것을 기원하면서 고행(고뇌)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왼쪽 윗 편에 보면 머리 위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한쪽 다리를 들고 고행 중인 조각이 아르주나 고행상 좌측에 있던 바라하만다빰 바라하는 비슈뉴 신의 다른 모습을 뜻하는데 그는 파괴된 세상을 보존하는 역할을 한다. 동굴 안의 조각들은 재현된 우주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한다.

 

  크리슈나 버터 볼--영국 식민지 시절 당시 영국인들은 이 바위가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코끼리들까지 몰고 와서 저 바위를 끌어내리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아 내버려 뒀다고 한다

크리슈나는 힌두교의 신 중 하나이다.     

마말라뿌람은 벵골만 연안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도시의 종교 중심지는 7세기경 메말라 라고도 알려진 힌두 팔라바 왕국의 왕 나라 싱하 바르만이 세웠으며 도시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고대 중국과 페르시아, 로마의 동전이 이곳에서 발견된 것을 보면 이곳이 일찍부터 항구였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는 7~8세기의 팔라바 사원들과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중 중요한 것은 흔히 '아르주나의 고뇌(참회)' 또는 '갠지스의 몰락'이라고 알려진 바위 조각품과 몇 개의 조각 동물 사원, 해변에 있는 시바 사원이다. 하나의 바위 덩어리로 되어 있는 사원(라타)들은 모두 7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5개가 남아 있으며, 이 때문에 이 도시는 '일곱 파고다'로 알려져 있다. 휴양·관광 중심지이며 사원 조각을 연구하는 미술대학이 있다.

[Daum백과] 마하발리푸람 – 다음 백과     

"인도를 이해하려면 인도 인구의 80% 이상이 믿는 힌두교를 아는 게 중요하다. 힌두교의 신은 4억 8천만에 이르기 때문에 모두 다 알기는 불가능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자주 언급되는 창조의 신 브라만, 법의 신 비슈누, 파괴의 신 쉬바에 대해 언급하기로 한다. 창조주지만 힌두교인에게 큰 숭배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브라마는 4개의 얼굴을 간직하고 있다.

이미 끝나버린 창조는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비슈누는 법의 화신이다. 세상이 어지럽거나 악과 싸울 필요가 있을 때 적절한 아바타로 변신해 도움을 준다. 파괴의 신 쉬바는 파괴와 재창조를 동시에 보여줄 뿐만 아니라 고행자의 모습부터 정력의 상징까지를 아우른다.

쉬바는 파란색 피부와 타래 머리, 그 위에 얹어진 초승달 장식과 코브라가 둘러진 목, 삼지창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쉬바는 인간의 모습 대신 발기된 남성기인 링가(Linga)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링가 아래쪽에는 여성 기를 상징하는 요니(Yoni)가 있다. 합일된 남녀 성기의 모양을 보여주는 링가와 요니는 ‘진리는 영원히 나뉠 수 없으며 합일된 상태에서 모든 존재의 완전함이 나타난다 ‘는 뜻이다."(<프렌즈 인도 네팔> 중)     

인도 남부, 타미 르나도 주(州) 마드라스(첸나이)의 남쪽 약 56km에 있는 팔라바 조(朝)의 대표적인 힌두교 유적. 한때는 무역항으로서 번영했던 해안에, 연한 화강암이 노출한 지대에 있다. 미완 굴(未完窟)을 포함한 수십 개의 석굴, 9개의 암석 사원, 또한 적석(稍石) 사원이나 암벽 조각도 있다. 석굴로는 바라하 만다파, 마히샤 마르디니 만다파, 트리 무르티 굴, 아디 바라하 굴이 뛰어나다. 암석 사원은 여기서는 라타(차[車])라 불림. 드라우파디, 아르주나, 비마, 다르마 라자, 사하 데바라 불리는 『마하바라타』의 주인공 이름을 딴 다섯 개의 라타, 가네샤 라타 등은 바위 덩어리를 파내어 만들어진 것인데, 각각 건축형태가 다르고 당시 목조건물의 모습을 전한다. 바라하 만다파의 가자 라크슈미 상, 마히샤 마르디니 만다파의 『악마를 퇴치하는 두르가』와 『용 위에 누운 비쉬누』, 거대한 암벽 조각인 『아르주나의 고행』 (일설에는 『간가강의 강하(降下)』), 크리슈나 만다파(암벽 조각에 석조(石造)로 덮은 지붕을 붙임)의 『고바르 다나산을 들어 올리는 크리슈나』등은 당지를 대표하는 부조로 자연스러운 표현, 화사하고 살집이 부드러운 군상의 율동적인 구성이 특색. 이상은 8세기 전반에 완성된 것도 일부 있으나 주요부는 7세기 중엽부터 후반의 마말라 양식의 것. 그 외에 마헨드라 양식인 코티카르와 다르마 라자의 양(兩) 만다파(7세기 전반), 라자 신하 양식의 돌로 쌓은 해안 사원(海岸寺院, 8세기 초기)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하발리푸람 [Mahābalipuram] 미술대 사전(용어 편), 1998 한국사 전연 구사 > 


푸두체리-----

마말라뿌람에서 퐁디셰리까지는 는 60루피 파란색 직행버스를 타고 갔다. 첸나이에서 마말라뿌람 노란색 버스보다는 조금 좋았다.

  

타밀나두의 수도는 첸나이다. 타밀나두에서 가장 흥미로운 역사는 프랑스 식민지였던 퐁디셰리(또는 폰디체리) 지역이다. 이곳은 첸나이로부터 5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다. 고아나 코친에서는 포르투갈의 문화를 느낄 수 있다면, 폰디체리는 인도의 작은 프랑스라고 해도 될 정도로 프랑스풍인 도시인 것이다. 아직도 곳곳에는 프랑스풍의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있다. 

이곳은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으로 역사적 상처를 보여주는 곳이다. 18세기 초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프랑스에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1673년 폰디체리에 도착하였고 이곳에 프랑스의 동인도회사를 세웠다, 이러한 경쟁 속에서 1760년 첸나이(마두라스)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과 폰디체리를 지배했던 프랑스 사이에 식민지 쟁탈을 위한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투에서 영국이 승리함으로써 폰디체리 등 인근의 지배권이 영국으로 넘어갔다. 이후 폰디체리는 프랑스에 다시 귀속되었다가 1954년 인도로 양도되었다.   

청춘은 여행이다.

찢어진 주머니에 두 손을 내리꽂은 채 

그저 길을 떠나도 좋은 것이다.

--체 게바라

푸두 체리는 남인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 중에 한 곳이다. 또 푸두 체리는 “인도의 혼돈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라고 어떤 여행책자에서 본 적이 있다. 첸나이나 뭄바이, 델리 등 다른 인도의 대도시는 엄청난 매연과 경적소리, 사람과 탈것들의 홍수로 가득하기 때문에 조용하고 쾌적한 인도답지 않은 푸두 체리는 매우 매력적인 도시인 셈이다. 시내에는 아직도 많은 식민지 시대의 아름다운 건물과 성당, 사원이 남아있다. 체계적으로 잘 정비된 도시라는 느낌을 받았다. 호텔은 프렌치 쿼터에 있는 작은 호텔이었다. 인디아 쿼터는 인도의 다른 도시와 비슷하게 혼돈스럽고 복잡함 그 자체였다. 프렌치 쿼터에는 프랑스풍 퓨전식당, 이태리풍의 식당이 밀집되어 있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이쁜 옷가게나 기념품 가게가 여러 곳 있어 쇼핑하기에 적당하며 간디 동상이 있는 해변까지 매우 가까워서 새벽 산책하기에 적당하고 좋았다. 


첸나이----

1640년에 지어진 세인트 조지 성은 과거에 동인도 회사의 본부였다고 하는데 성채 안에는 영국 국교회 세인트 메리 교회(St. Mary's Church)와 성채 박물관(Fort Museum)이 있으며 군부대와 많은 부대시설들이 있는 넓은 공간이었다. 박물관은 생각보다 입장료가 비싸기도 했지만 2천 루피 지폐를 내니 잔돈이 없다고 한다. 박물관 입장은  포기하고 성 메리 성당을 관람했다.

산 토메 성당은 예수의 제자인 도마의 무덤이 있는 성당으로 유명하다. 

얼마 전 JTBC 손석희 앵커 브리핑에서 예수의 제자 <합리적 의심의 도마>를 언급한 대목이 강하게 각인된 적이 있다. "범람하는 이 가짜 뉴스의 홍수 속에서 시민이 살아남는 방법은 '합리적인 의심'을 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모두가 조금은 괴롭고, 피곤하고, 때론 조금은 매정해야 하는… 도마가 되어야 하는 시대다. 이 혼돈의 시국에 필요한 덕목은 바로 합리적 의심이 아닐지…."라고 지적해 감동을 준 바 있다. 유창선 씨는 페북 게시 글을 통해 "손석희의 뉴스룸에서 안희정 지사의 얘기를 듣다가 내 책에 있던 구절(도마의 의심 관련 문구)들이 생각났다. 인류의 지성사는 의심의 역사이기도 하다. 지성들은 의심함으로써 이성을 작동시켰고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세상을 열곤 했다"라고 주장했다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의 작품 <의심하는 도마>는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는 제자 도마의 행동, 그럼에도 믿음을 주려는 예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흘 만에 부활하여 자신이 생전에 예고했던 대로 제자들 앞에 나타난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로마 병사들의 창에 찔린 상처를 보여준다. 하지만 부활의 현장에 없었던 도마는 자기 손으로 예수의 상처를 만져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이때 예수는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돼라”라고 했다고 『요한복음』 20장 27절은 전한다. 

도마는 그러고 나서야 예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다. 이 일 때문에 도마는 『요한복음』에서 부족한 믿음의 상징으로 표현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예수조차도 의심하며 손가락으로 상처를 만져보고, 그러고 나서야 믿음을 갖는 도마의 모습에서 의심할 줄 아는 이성의 작동을 발견한다. 카라바조의 그림은 이 순간을 너무도 현실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예수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보는 도마의 표정은 정말로 궁금함이 넘친다. 옆에 있는 다른 제자들도 도마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들여다보며 그 결과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이 그림 어디에서 신비주의의 흔적 같은 것은 없다. 예수는 그저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 앞에서 상처를 내보이고 있다. 예수에게조차 의심의 얘기를 던지며 자기 눈으로 확인한 뒤에야 부활을 믿는 도마, 그는 비록 성경에서는 믿음이 없는 자로 폄하되었지만, 세속의 세계에서는 합리적 의심 능력을 가진 인간으로 대접해줘도 좋을 것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의심해서는 안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평론가 유창선)  


푸두 체리에서 첸나이 가는 에어컨 버스, 140루피를 주고 탔는데 4시간 30분 정도 걸린 것 같다. 쾌적한 이동으로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

카팔레스와라사원은 머리(kapalam)와 시바의 화신인 이스와라(eeshwarar)에서 유래하였다. 시바는 거만하게 행동하던 브라흐마의 5개 머리 중 1개를 잘라버렸던 것이다. 

이 사원은 시바와 그의 부인 파르바티의 화신인 카르파감발(Karpagambal)을 모시는 사원으로 사원 주변에는 커다란 연못을 가지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사제에게 축복을 받고 있었다 .         

아! 와우! 이름도 참 이쁜 호텔이다. 레인트리라니! 비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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