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쫓으려는 사람들과 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허상이었음을 깨닫고 상처받은 이들이 공존하듯이,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코너는 부자가 되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기적의 책들과 힐링 에세이가 주를 이룬다. 서점이 때론 독약과 해독제를 함께 파는 기괴한 상점처럼 느껴진다. 이 땅에는 전쟁 없는 평화의 시대가 오십년 이상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전쟁 트라우마도 없는 우리는 어째서 이리도 힐링을 갈구하는가?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큰 원인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얼마나 상처 받는지는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과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등의 베스트 셀러 제목에서도 유추해 볼 수 있다. 문명이 발전하며 타인으로부터 물리적 피해를 받는 일은 크게 줄었다. 그러나 사회가 사람보다 이윤을 우선시 하게 되며, 심리적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었고, 신체적 외상이 없는 일은 참아야 한다는 풍조가 있어왔다. 우리가 받는 겪고 있는 정신적 트라우마의 중심에는 인간관계와 그 관계에서 오가는 그것 때문이다.
26개월의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한 예비역 병장으로써, 최근 병사들의 스마트 폰의 사용은 신의 한 수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문제가 생기기도 하겠지만, 더 많은 병폐가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군 생활의 가장 어려운 점은 혹한기 훈련이나 유격이 아니라 제한된 자유와 병사들간 수직 관계에서 발생한다.
회사생활도 마찬가지이다. 과도한 업무와 상대적으로 낮은 급여, 만족스럽지 못한 복지로 이직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이다.
나를 비롯한 현대인은 인간관계에서 고통을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고민을 하다 문득 영화 올드보이의 대사가 떠올랐다.
“오대수씨는요, 말이 너무 많아요.”
오대수(최민식 분)가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러냐고 묻자 우진(유지태분)이 한 대답이다.
이는 비단 영화에서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신이 별 의미도 없이 내뱉는 말에 상대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는지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전화통화를 두려워하는 것은 세대의 특징이 아니라 고통 받는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이다. 불필요한 말은 공기 중에서뿐만 아니라 인터넷상에서도 부유하며 서로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다.
회사 점심 시간 두 사람이 국물과 침을 튀기며 무언가를 끓임 없이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둘은 놀랍게도 대화가 아니라 자신의 말만 이어가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대화처럼 보이지만, 상대의 질문에 대답도 공감도 없이 오직 각자의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자는 말을 뿌리치고 은행에 공원을 찾았다. 벤치에 앉아 명상을 시작하자 산들바람이 불었고, 이내 선잠에 들었다. 그리고 이상한 꿈을 꾸었다.
신은 인류의 종말을 막기 위해 말의 총량제를 시행했다. 모든 인간에게 태어나며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말의 총량이 동일하게 배급되었다. 돈을 아끼기보다 말을 아끼며 살아야 하는 세상이 도래하자 사회 곳곳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회사에서는 무능한 상사의 간섭과 구태가 사라지자 직원들의 스트레스 지수가 낮아졌다. 자연스럽게 업무의 능률이 올라, 기업의 이윤은 상승곡선을 그렸다.
가정에서의 변화도 긍정적이다. 내 생각을 상대에게 주입하려는 일방적인 말이 사라지니 상대의 다름을 인지하게 되었고, 부부간의 사랑이 깊어졌다. 부모가 잔소리 대신 자녀와 함께 책을 읽기 시작하자, 자녀의 성적은 향상되었고, 부모는 취향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남의 험담을 멈추고, 관계 유지를 위한 관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함께 하면 즐거운 사람들과 서로를 알아가는 대화라는 것을 비로소 시작하게 되었다.
보이스피싱을 비롯한 범죄가 사라졌고, 무거짓말과 위선을 일삼던 정치인들의 말이 줄어들자, GDP와 반대로 퇴보하기만 하던 국민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기 시작했다.
세상에 말이 줄어들자 타인에게 향하던 과도한 관심도 줄었으며, 자기 내면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세상은 이전보다 고요해졌지만, 더 따뜻해졌디.
어떤가?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면 당신도 너무 많은 말 속에서 지쳤다는 것이다.
우리가 상대에게 전해야 할 건 마음이고 줄여야 할 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