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 고향 집의 앵겔지수가 가장 높았던 계절은 겨울이었다. 음식의 냉장, 냉동이 무의미해질 정도로 삼 남매는 모든 걸 집어삼켰다. 낮이 짧으니 일찍 들어와 똬리를 틀었고, 긴 밤 동안 쉬지 않고 먹을 것을 탐했다. 귤 한 박스를 앉은 자리에서 먹어 치웠고 손에 노란 물이 든 채로 고구마를 집어 들었다. 그러면 엄마는 눈이 쌓인 장독대를 열어 살얼음이 낀 동치미 국물을 꺼내 종종걸음으로 방으로 들어오셨다. 내 새끼들 고구마 먹다 체하지 말라고.
엄마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면서도 그때가 좋았다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푸념을 늘어놓으신다.
겨울이 오면 아빠도 바빠졌다. 손재주 많던 아빠가 만들어준 썰매를 꺼내 들고 아이스링크로 변한 누군가의 논을 지치고 다녔다. 겨울의 끝자락에 아빠는 작년 달력으로 새 학기 교과서에 새 옷을 입혔다. 우리 아들 판검사 되라고!
겨울이 오면 4월 초순까지 눈을 볼 수 있던 외갓집에서 각종 별미를 먹었다. 압권은 외숙모가 구워주던 쥐포였다. 100마리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첫맛을 준 3대 진미는 쥐포, 배스킨라빈스, 햄버거였다.
야간자율학습을 마친 겨울 밤. 공격적으로 김을 내뿜는 오뎅리어카를 지나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겨울 밤의 오뎅은 덜 익어도 푹 삶겨도 진리였다. 오뎅은 용돈 도둑이었고, 단 한 번이라도 오뎅을 배불리 먹고 싶다는 갈망은 10대 시절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외갓집 밤하늘의 별보다 많던 고깃집 불 판을 닦고 받은 돈으로 눈 내리는 거리에서 오뎅 4만 원치를 먹었다. 그 해 겨울은 참으로 시원했다.
청춘의 겨울은 크리스마스가 있기에 뜨거웠고, 마음을 더 달뜨게 한 건 거리에서 울려 퍼지던 노래와 TV 드라마였다.
이제는 클래식이 되어 버린 라스트 크리스마스와 머라이어 캐리가 있었고, Mr.2의 하얀 겨울과 터보의 회상은 텅 빈 옆자리를 채워주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드라마 겨울연가는 춘천행 기차로 더 많은 청춘을 실어 날랐고,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어그부츠로 청춘의 발과 마음을 데워주었다.
내 인생 첫 스키장은 캐나다의 스키장이었다.
그리고, 영어보다 보드가 능수능란해진 몹시도 춥던 어느 날.
브리티시 컬롬비아주의 퍼니라는 스키장은 내가 본 겨울 풍경 중 두 번째로 아름다웠다. 디즈니 동화책에 나올법한 오두막의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고, 인공 눈이 아닌 천연 눈이 쿠션 역할을 충실히 해주었다. 10미터가 넘는 침엽수 사이로 난 오솔길을 보드로 내달릴 때면 루돌프가 갑자기 튀어나와도 이질감을 느끼지 않을 풍경이었다.
내가 꼽는 겨울 제1 경은 아내와 함께 오른 한라산이다. 등반 전날 때마침 입산통제가 되지 않을 정도의 폭설이 내렸다. 덕분에 백록담으로 가는 길은 곳곳이 포토존이었다. 그날은 삼무였다. 살을 에는 칼 바람, 미세먼지, 시야를 가리는 안개. 눈이 녹지 않을 정도의 따뜻한 날씨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우리의 뒤로 펼쳐진 눈 바다를 두고 백록담을 오르는 발걸음은 자꾸만 느려졌다.
그러나,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눈 덮인 백록담은 기대보다 멋지지 않았다. (왜 명산의 절경은 삼대가 덕을 쌓아야만 볼 수 있다는 말로 통일되어 있는 걸까?)
겨울 오면은 부자건 가난하건 나이가 많건 적건 그 해에 운이 좋았건 나빴던 간에 모두가 공평하게 나이를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