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그저 도시인이 되고 싶었다.
나와 혜철이 그리고 상영이는 초중고 12년간 같은 학교를 다녔다. 다섯 개의 초등학교와 두 개의 중학교, 하나의 인문계 고등학교가 있는 소도시였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확률적으로 흔한 일은 아니다. 그 기간 동안 우리는 못 볼꼴도 아는 체하고, 얄미운 감정도 은근이 쌓아두며, 흔해빠진 삼총사가 되었다. 우리는 어지간하면 함께였고, 같이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냈다.
마지막 학력고사를 준비하던 해만은 여느 해와 달리 각자의 책상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돌아보면 셋이 있을 때보다 딱히 의미 있는 시간도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시험성적에 따라 인생이 판가름 난다는 망상에 완전히 제압된 상태였기에, 합격자 발표 날은 몇 년 후 맞게 되는 99년 12월 31일만큼이나 무거웠다. 우리 셋은 학력고사를 마치지 마자 그간 못 만난 한풀이라도 하려는 듯 최선을 다해 붙어 있었다. 발표 전날 소도시의 최고 핫 플레이스인 커피숍 ‘쟈뎅’에서 혜철이 내일의 일정에 대해 두서없이 길게 이야기하자 상영이 짧게 요약했다.
“그러니까 내일 전화로 합격자 발표를 확인하고, 학교 농구골대에서 모이자는 거잖아?”
“그렇지. 내 말이 그 말이야!”
혜철과 상영은 서울소재의 대학에, 나는 대전 직할시의 대학에 지원한 상태였다. 모의고사 성적으로 보면 나와 상영은 안정권이었지만, 시험 당일 아침 우유를 마시고 복통으로 시험을 망친 혜철이 문제였다. 반면 나와 상영은 합격하더라도 마냥 기뻐하기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나의 경우는 혼자 서울로 가지 못한다는 소외감을, 고등학교 내내 혜철보다 성적이 우수했으나, 마지막 반년 동안의 급격한 성적하락으로 혜철보다 낮은 대학에 지원한 상영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리 셋은 처음으로 서로의 걱정을 모른 체하며, 내일도 같은 얼굴로 함께 만나기를 염원하며,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개인의 성공도 중요하지만 공동체 전체의 행복에 대해 어렴풋이 떠올린 첫 번째 날이었다.
다음 날 가장 먼저 합격 소식을 들은 이는 셋 중 가장 예민한 나였다. 나는 합격을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갖은 불운을 다채롭게 떠올리다 일출 직전에야 잠이 들었고, 합격을 확인하자 나라를 되찾은 독립투사처럼 기뻐했다. 엄마는 애가 성적은 서울로 가고도 남는데, 장학금을 염두에 둔 장남다운 선택이었다는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덧붙이며, 일가친척에게 전화를 해 집안 첫 대학생의 배출을 알렸다. 엄마가 전화기를 잠시 내려놓은 사이 전화벨이 울렸고, 나는 본능적으로 혜철임을 알고, 수화기를 낚아챘다. 혜철이는 육감적으로 전화를 받은 사람이 나란 걸 알고 소리부터 질렀다. 아니 전화를 받은 사람이 누구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합격이다! 어디다 이렇게 통화 중이냐? 빨리 튀어나와라.”
나는 자전거에 올라 어느 때보다 빨리 페달을 밟으며 학교로 향했다. 혜철이와 나는 만나자마자 격렬한 포옹을 했지만, 이내 서로를 밀쳐냈고, 다행스럽게도 축하한다던지 수고했다던 지 따위의 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혜철이는 재수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기다린 자기 자신이 놀랍지 않냐고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평소의 너보다 더 방정맞았으며, 누구 봐도 불안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고 굳이 사실을 적시했다. 우리 둘은 난리법석을 떨다 일순간 상영이 생각에 웃음을 지워버렸고, 오랜만에 그네에 앉아 상영이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날의 해는 더디게 졌다.
“쟈뎅 가서 기다릴까?”
한기를 느낀 나의 물음에 혜철은 고개를 저었고, 우리는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고 나서야 학교를 빠져나왔다. 나와 혜철이는 대학 입학 전까지 인생에서 가장 게으른 일과를 알차게 보냈지만, 상영이의 부재로 마음 한편이 늘 헛헛했다.
상영이는 끝내 졸업식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 셋이 다시 만난 건 2월 마지막 주 고향 기차역에서였다. 상영이는 경기도 외곽의 기숙학원에 등록을 했다며, 미안하다는 말은 어렵게 했지만 끝내 축하한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우리 셋은 각기 다른 목적지를 향해 같은 기차에 올라탔다. 무궁화호는 앞으로 다가올 청춘의 앞날을 예고라도 하듯이 덜컹거리는 와중에도 느리게 나아갔다. 대전역의 도착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오자 혜철이가 나와 상영이를 기차의 맨 끝 칸으로 데리고 갔다. 작가가 꿈이지만 컴퓨터 공학과에 합격한 혜철이가 담배를 꺼내 물며 나에게 물었다.
“넌 뭐 될래?”
가수가 꿈이지만 무역학과에 합격한 나는 혜철이를 어이없이 바라보며 대답을 회피했다.
“담배 피우면 작가 되는 거냐? 넌 뭐 될래?”
“난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는 도시인 될 거야! 멋있잖아! 우리 오늘은 다른 역에서 내리지만, 제대하고 대학 졸업하면 꼭 서울에서 다시 만나자. 그리고 죽을 때는 뉴욕에서 죽자.”
혜철의 뜬금없는 말에 상영이 처음으로 피식 웃었고, 내가 뒤통수를 내려치자 마침내 욕을 하며 크게 웃었다. 잠시 후, 기차가 대전역 플랫폼에 들어섰다. 우리는 내일 쟈뎅에서 만날 수 없지만 고향에서와 헤어질 때와 같은 톤으로 무심하게 인사를 나눴다.
“잘 가”
나는 대전역 광장을 걸으며, 어쩐지 혜철의 말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뉴욕까지는 무리더라도 우리 셋이 어른이 되어 정장을 입고 서울에서 만난다면 제법 도시인 같을 거란 생각도 덧붙였다.
청춘드라마와 전혀 다른 대학에서의 첫 학기가 시작되었다. 혜철과 나는 이따금 학보를 주고받았고, 드물게 서로의 학교를 찾아가며 각자의 청춘을 방치했다. 상영이는 추석에도 고향에 오지 않았고, 설 연휴에는 삼수를 위해 더 혹독하다는 스파르타 학원으로 옮겨갔다. 1학년 겨울방학이 끝나기 전, 혜철이는 대학의 낭만은 이미 실종되었으며, 애들과 대화 수준이 맞지 않는다며 서둘러 입대했다. 혼자 남겨진 나도 같은 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군대를 향해 돌격했다. 의무교육이 끝나자 의무 충성의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열아홉 살에 아홉수와 삼재를 겪는 것 같던 상영에게도 행운이 찾아왔다. 삼수를 위해 입영연기를 위한 서류 제출을 깜빡했던 것이 신의 한 수가 되었다. 그가 급작스럽게 받은 입영통지서에는 ‘지역방위’라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글자가 각인되어 있었다. 그해 고향에 방위 병력이 모자라 찾아온 축복이었다. 남자와 단체생활을 극도로 혐오하는 혜철은 군대 막사에서 이 소식을 듣고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한다.
‘역시 인생은 계획한 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지만, 의도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오기에 견딜 만하다 ‘
상영은 고향으로 내려와 부대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상영이는 국가로부터 부여받지 않은 임무도 수행하였는데, 휴가를 나와 고향집을 찾았지만, 또래가 모두 군 복무 중이라 술 마실 상대가 없는 초중고 동창들의 술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었다. 상영은 향토방위와 지역 군 장병의 사기 진작을 위해 밤낮으로 고군분투하느라 늘 피로에 찌들어 있었다. 상영은 훗날 기숙학원에서 꾸준히 마신 술과 젊은 간 때문에 18개월을 버텼다고 회고했다.
상영은 혜철보다 늦게 입대했지만, 빨리 소집해제 되어 기숙학원으로 다시 입소했다. 나와 혜철은 이 일을 계기로 희미하게 남아있던 상영에 대한 연민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나와 혜철은 전역 후, 노년을 대비하겠노라며 청춘의 끝자락을 도서관에서 보냈다. 혜철과 내가 졸업하던 해에 상영은 마침내 대학생이 되었고, 우리는 취업 준비생이 되었다. 혜철과 나는 입대 전과 완전히 바뀐 취업시장에 당혹해하고 있었다. 혜철의 학교 선배들은 합격통지서 서너 장을 손에 들고 어느 회사를 갈지 고르던 시절이 있었다. 캠퍼스의 낭만을 사라지게 하고, 사회 전체에 흘러넘치던 축제 분위기와 호황을 한 번에 삼켜버린 IMF가 이 땅에 재림했다. 부자도 빈자도 일시적이나마 공평하게 곤궁해졌다. 그런 와중에도 작가를 꿈꾸지만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혜철은 사옥을 가진 대기업에 취업했고, 나는 무역회사라기보다 오퍼상에 가까운 직원이 4명뿐인 회사에 당당히 취업했다. 나의 첫 직장은 강남에 위치했지만, 빌딩숲이 아닌 주택가의 5층짜리 건물 반 지하에 소박하게 꽈리를 틀고 있었다. 나는 퇴사할 때까지 혜철의 회사 방문을 원천 봉쇄했다.
‘그때는 날 선 자존심이 형태를 갖추고 남아있던 시절이었어.’
이십 년 후 우연히 첫 회사 건물 앞을 지나다, 이제는 흔적도 남지 않은 청춘의 자존심을 떠올리며 흘린 나만의 독백이었다.
혜철은 나에게 함께 살 것을 제안했고, 우리는 자취생의 메카인 신림동으로 입성하게 되었다. 내가 대전에서 짐을 빼고 고향집을 들르는 동안 혜철이 보증금 천만 원에 월세 30만 원짜리 역세권 투룸을 구했다. 행정구역상이지만 강남에 위치한 것치고 괜찮은 가격이라고 생각했다.
이민 가방을 끌고, 등산 배낭을 메고, 엄마가 싸준 반찬까지 이고 서울역에 도착하니, 혜철이 일요일인데도 회사 로고가 선명한 사원 증을 목에 걸고 나와 있었다.
“야! 그건 목에 왜 걸고 나왔냐?”
혜철이 지적 허영심은 있으나, 허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아씨! 깜빡했네. 오늘도 출근했다 오는 길이야.”
혜철은 서둘러 사원 증을 주머니에 넣으며, 내 손에서 가방을 뺏어 들었다. 혜철이는 한눈에 보기에도 퀭해 보였다. 괜한 자격지심에 친구를 오해한 나는 혼자 겸연쩍어했다. 혜철은 내 이민가방을 끌고 지하철을 향해 앞장섰다. 고등학교 때부터 농구대잔치를 보러 오고, 대학생 때도 몇 번 놀러 온 적은 있으나 막상 살려고 올라온 서울은 위압적이었다. 혜철의 등을 보고 든든하다는 생각을 하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대전에서도 가끔 30분 거리를 이동한 적은 있었지만, 한창나이인데도 지하철을 타고 신림역에 도착하니 피로감이 몰려왔다. 아마도 서울의 기세에 주눅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림역은 일요일 저녁 시간인데도 인파로 가득했고, 나는 눈의 피로마저 느끼며 혜철의 뒤를 바짝 따랐다. 혜철은 역 주변 번화가를 벗어나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오르막과 내리막을 지나자 역 주변의 소음이 들리지 않는 어두운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미로 같은 골목에 접어들면서 예상보다 낮은 보증금과 월세가 이해되었다.
“다 왔다. 여기다. 우리들의 천국!”
혜철은 다세대 주택의 일층이 아닌 아래쪽을 가리키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곳은 역세권이라고 하기에는 멀고, 천국이라고 하기엔 낮은 곳에 위치 반 지하였다. 고향집을 나설 때 엄마는 걱정을 하다 하다 물갈이까지 걱정했다.
“네가 예민해서 집만 나서면 꼭 물갈이를 했는데, 서울은 물도 탁할 텐데......”
나는 엄마를 안심시키는 대신 짜증을 내며 집을 나섰지만,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엄마의 걱정이 기우가 아님을 깨달았다. 서울역에 내린 후, 매 순간과 모든 것이 물설었고, 심지어 서울의 공기마저 서먹하게 느껴졌다. 오직 혜철만이 위안이었고, 녀석의 살찐 등을 보는 것만으로 안심이 되었다. 나는 서울이란 대도시에서 생각지도 못한 부당함과 회상하기조차 힘겨운 억울함을 겪게 되지만, 그때마다 햬철의 ‘존나! 짜증 나네’라는 마법의 주문 덕분에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혜철은 아침 6시면 출근했고, 잠이 많은 나는 6시 30분에야 일어나, 영어 학원 7시 수업을 들었다. 잠이 채 깨지도 않은 상태에서 모국어도 아닌 영어를 하고 있자니 피곤하긴 했지만, 도시에 동화되어는 과정 같아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수업 후 아침은 늘 김밥천국이었고, 격주 금요일은 참치김밥으로 호사를 부리기도 했다. 나는 야채김밥에서 참치김밥의 격상을 통해 행복의 기준점에 대한 통찰에 이르렀다. 인간의 일상은 개인마다 편차가 있으며, 인간은 일상의 작은 변화가 있을 때 행복과 불행을 느낀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고로 일상의 수준이 높아지면 행복의 고점도 높아지기에 많은 것을 가진 이들은 행복감을 느끼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며, 나의 궁핍한 식생활을 위로했다.
혜철은 출근한 지 12시간이 지나도 집에 돌아오는 날이 드물었다. 9시 뉴스를 집에서 보며 라면을 먹는 것이 소원이라고 할 정도로 야근은 규칙적으로 잦았고, 퇴근 시간은 일정하게 늦었다. 나는 밤이 깊어도 불이 켜진 도심의 고층 빌딩에서 넥타이를 풀어헤친 채 어제 입은 셔츠의 소매를 걷어붙이고 서류를 보는 혜철의 모습을 상상하며 부러워하곤 했다. 월급날이 되면 부러움은 시샘으로 바뀌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일반 참치 대신 양념 참치 캔을 따고, 엄마가 보내준 진미채를 넣고, 계란 프라이도 평소보다 하나 더 많은 세 개를 올려 거칠게 밥을 비벼 먹었다. 그리고 혜철이가 보지 못하는 9시 뉴스가 시작될 때까지 양철 밥상을 치우지 않고 거실에서 누워 있었다. 뉴스가 시작되면 설거지를 시작했고, 설거지가 끝나면 화장실로 들어가 목욕탕 의자에 앉아 칫솔로 셔츠의 목 때를 지워냈다. 일주일치 셔츠를 세탁소에 맡기는 혜철에게 이 모습만은 어쩐지 보이기 싫어 나의 손은 빠르게 움직였다. 화장실에서 팔 굽혀 펴기를 하고 샤워를 마친 후, 영어 숙제까지 마쳐도 혜철이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날이 많았다.
나는 이따금 사무실에서 야근을 하는 대신 집에서 잔업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사장이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부르는 날이 있었다.
“친구랑 둘이 산다고 했지? 저기 사과박스 2개만 가져가. 주말 잘 보내고! 오늘은 일찍 퇴근해”
회사는 문구사무용품을 제작 판매하고 있었는데, 사장은 분기에 한 번은 마지막 손질이 필요한 제품을 가져와 사무실 직원에게 할당했다. 내가 박스 두 개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니 혜철이가 집에 와 있었다.
“너 어쩐 일이냐? 어디 아픈 거야?”
“아니 부장이랑 근처로 외근 나갔다가, 퇴근하라고 해서. 이런 날도 있어야지. 빨리 저녁 먹고 이따 9시 뉴스 하면 라면 끓여 먹자. 나 내일은 안 일어나고 하루 종일 잘 거야.”
마치 발라드를 부르듯 말하던 혜철의 톤은 내가 안고 있는 박스를 보자 거친 랩으로 바뀌었다.
“아니 미친 새끼 박스를 또 보냈어? 좆같네. 진짜.”
혜철이 마법의 주문을 외우자 내 마음도 월요일 오전에서 금요일 저녁으로 금세 전환되었다 내가 손을 씻고 나오자 양철 밥상은 햄버거로 가득 차 있었다.
“무슨 이벤트 한다고 오늘 햄버거 하나를 오백 원에 팔더라. 사람들이 줄을 얼마나 섰는지. 신림동 자취생들 다 모인 거 같더라. 열 개를 샀는데도 오천 원이야. 오늘 햄버거 배 터지게 먹어보자.”
야채라고는 상추조차 없는 페티와 치즈뿐인 햄버거를 욱여넣어도 등 따시고 배부른 금요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