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폐비사(선물은 무겁게 하고, 자기 몸은 낮춘다) 왕건이 힘으로 호족을 누르려하지 않고, 그들의 마음을 얻게 위해 혼인과 더불어 실시한 정책이다. 얼핏 유약해 보일 수 있어 보이지만, 붓은 칼보다 강하며,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대업은 이룰 수 없으며, 사람의 마음은 강압적으로 결코 얻을 수 없다.
930년, 왕건은 고창(안동)에서 견훤과 다시 맞붙게 되었다. 절대 수세에 몰린 왕건의 만회냐? 견훤이 연이은 승리로 삼국통일로 가는 8부 능선을 넘느냐의 기로에 선 전투였다. 그리고 이 전투의 결과는 삼국통일의 행방을 가르게 된다. (우리 민족의 전통 놀이인 차전놀이는 이 전투에서 유래되었다.)
“고창만 차지하게 되면 경상도 땅 전체가 우리 백제의 것이 된다.”
“고창에 주둔 중인 고려 군이 삼 천명이 채 안 된다고 하옵니다. 만 명의 군사로 우리가 친다면 능히 그 들을 제압할 것입니다.”
견훤의 출정 첩보를 접한 왕건은 고려 최고의 명장 유금필과 함께 고창에 당도했다.
“유 장군, 수적으로 불리하여, 강공책은 위험해 보이는데 경의 생각은 어떻소?”
“폐하! 이곳의 지형과 우리 군의 기세를 고려하면 정면승부가 상책인 줄 아뢰옵니다.”
왕건은 한 나라의 왕이지만 부하 장수의 조언을 받아들일 줄 아는 덕장이었다.
고창전투의 초반 승기는 수적 우위의 백제가 가져갔다. 그러나 승부의 추를 고려로 되돌린 것은 고창의 세 호족이었다. 김행, 김선평, 장정필 삼 인의 호족은 훗날 왕건에 의해 개국공신으로 책봉되고, 삼태사라로 불리며 오늘날까지 안동지방에 무덤이 남아있다.
포석정사건 이후, 신라지역에서 견훤의 평판은 최악이었고, 왕건의 중폐비사 정책은 느리지만 확실한 효과를 보게 있었다. 삼태사에 이어 유금필의 기병이 총공세를 펼치자, 백제군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기록된 사망자 수만 8천에 달하고, 견훤은 공산전투의 왕건처럼 목숨만 건진 채 달아나고 만다. 왕건은 공산전투의 치욕을 견훤에게 되돌려 주었고, 지역명까지 바꾸며 이곳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
“고창은 고려에 너무나 중요한 지역이다. 이곳을 안동으로 칭한다.”
견훤이 신라 왕실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주었다면, 후백제 군사들은 경상도 일대에서 노략질로 민심에 상처를 주었다.
반면 고창 전투로 기세를 올린 왕건은 서라벌을 방문하여 경순왕을 위로한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 고충을 다 안다고는 말하기 어렵겠으나, 어느 정도는 이해합니다. 마음을 다잡으셔야 합니다.”
신라는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상태였고, 망국으로 향하는 신라의 경순왕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견훤도 왕건도 우리 신라를 힘으로 멸하는 것은 부담스러울 것이다. 내가 살아있는 이유는 둘 중 하나를 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택의 시간이 머지않았구나’
고창전투 이후, 후백제의 반격이 있었다. 그러나, 934년 유금필이 또다시 맹활약한 운주전투의 승리와 929년부터 백제 지배하에 있던 나주까지 재탈환하며 고려는 백제를 낭떠러지로 몰고 가기 시작했다. 공주를 위시한 30여 개 성이 항복했고, 충남지역의 호족이 대거 고려에 귀부 했다. 궁지에 몰리면 내부에서 먼저 무너지기 마련이다. 백제가 스스로 무너지게 되는 사건은 후계자 결정 과정에서 비롯된다. 견훤의 심복이라고 할 수 있는 공직이 고려로 귀부 하자, 견훤은 육체적, 심리적 한계에 도달했다.
“늦은 감이 있지만, 후계자를 결정해야겠다. 내가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 진행해야 탈이 없을 것이야.”
그러나, 견훤의 결정은 자기 폐부를 스스로 찌르는 치명적인 결정이 된다.
“금강은 비록 장자가 아니지만, 내 뒤를 이을 만하다. 전시 상황이니 나머지 형제들은 나와 금강을 도와 공을 세우도록 하라.”
견훤의 결정에 기뻐하는 이들과 불만족스러운 이들이 공존했으나, 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견훤의 장자 신검이었다.
“장자인 나를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형제끼리 도우라고? 어머니가 다른데 형제는 무슨 놈의 형제. 아바마마가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 분명하다..”
신검은 분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천륜을 거스르고 왕명을 거역하기로 했다. 마음이 서자 행동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신검은 빠르고 날카롭게 움직였다. 935년 3월 후백제의 왕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견훤의 처소에 칼을 들고 들이닥쳤다.
“아버님! 왜 할아버님이 아버님을 등졌는지 이제야 납득이 됩니다.”
“뭣이라! 이런 무엄한 놈을 보았나!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네 놈이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나 없이 네 놈이 왕건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아버님 그간 고생하셨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셨습니다. 좋아하시는 절에서 이제 편히 쉬세요.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뭣들 하느냐! 아버님을 모시지 않고.!”
신검은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킨 뒤, 금강을 제거하고 스스로 후백제 2대 왕으로 즉위한다.
금산사에 유폐된 견훤은 하루 종일 묵상을 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종일 술을 마시며 상념에 젖기도 했다. 100일이 다 되어가던 어느 날, 낮부터 술을 마시든 견훤은 자신을 감시하는 병사들에게 물었다.
“내가 내 손으로 만든 나라이다. 그런데 내 나라에서 아들에게 이런 꼴을 당하다니. 너희들은 어찌 생각하느냐? 내 아들이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느냐? 그놈이 왕건과 맞서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말해보거라.”
견훤은 자신을 감시하는 병사들에게 술까지 권했다.
“혼자 마시기 적적해서 그러니 이리 와서 한 잔 들 하거라. 전장에서 공을 세워야 할 이들이 여기서 늙은이나 지키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할꼬.”
병사들은 견훤이 따라주는 술을 마시다, 이내 곯아떨어지고 만다. 그리고 견훤은 자신의 심복과 미리 준비해 둔 말을 타고 절을 빠져나갔다.
“어디로 가시렵니까? 황공하오나 백제 땅에는 신검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사옵고, 신라로 가시기는 어려울 듯하옵니다.”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다. 왕건에게 간다”
“네?”
후삼국 시대가 끝이 보이며, 모든 길이 왕건에게로 이어지고 있었다. 삼국통일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치열하게 싸우던 견훤마저 왕건에게로 향한 것이다.
왕건은 왕건답게 견훤을 상왕의 예우로 극진하게 맞이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그간 고생이 얼마나 심하셨으면. 상부님의 얼굴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편하게 며칠 쉬신 후에 차근차근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견훤의 고려 행은 신라 경순왕의 결심을 굳히는 데도 큰 영향을 주었다.
“때가 되었구나. 행차를 준비하거라.”
935년 11월,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귀부 하며 천년 왕국 신라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듬해인 936년, 견훤이 왕건을 찾아왔다.
“폐하, 더 이상 망설이지 마십시오. 때가 무르익었습니다. 백제를 치셔야 할 때입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자신이 세운 나라를 치자는 견훤의 요청에 왕건이 망설이자, 견훤이 놀라운 제안을 한다.
“청이 하나 있소이다. 백제 총격 시 선봉에 저를 세워주십시오. 전투에도 유리할 것이고, 무엇보다 제 손으로 직접 거두고 싶소이다. 이 늙은이의 마지막 청입니다.”
그해 9월, 왕건은 8만에 이르는 대군의 출정을 명령한다.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남은 단 하나의 상대 백제를 치기 위함이다. 왕군은 4만의 고려군과, 호족 및 발해 유민으로 이루어진 4만의 연합군으로 군을 편제하였다. 그야말로 통합과 화합을 상징하는 연합군이 삼국통일의 마지막 조각을 채우기 위해 출정한 것이다. 고려와 후백제 군은 오늘날의 구미 인근에서 맞붙게 되었다. 그러나, 후백제 군은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기세가 꺾이고 만다.
“저…. 저기…. 고려 군의 선봉에 선 분이 우리 견훤 대왕님이 아니신가?”
“아….. 비록 적군에 서 있지만, 생사고락을 함께한 왕에게 칼을 겨눌 수는 없다.”
후백제 군에서는 전투를 포기하는 자, 심지어 고려로 넘어가는 장수까지 생기며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후 전투가 이어졌지만, 승패는 이때 이미 정해져 있었다.
왕건은 신검이 있는 완산주까지 직접 진군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신라에 이어 후백제도 역사에만 남게 되었다. 왕건의 환희도 짐작하기 어렵지만, 견훤이 느낀 회한의 깊이는 더욱 가늠하기 어렵다..
“덧없구나! 인생이여. 무엇을 얻기 위해 이리 치열하게 살았단 말이냐. 내가 뿌린 씨앗에서 자란 열매를 내 손으로 거둔 것에 의미가 있을까?”
견훤은 후백제가 멸망한 그해 자기 생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