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9년, 왕소가 고려 4대 왕 광종으로 즉위한다. 2대 혜종(943~945), 3대 정종 (945~949)에 이어 태조 왕건의 또 다른 아들이 왕위를 계승한 것이다. 광종은 장남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태조 왕건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광종은 두 형과 달리 족내혼을 한 첫 번째 왕자이지만 그의 입지는 결코 탄탄하지 못했다. 선왕인 정종이 서경 군벌 왕식렴과 또 다른 호족 박수경 등에 정치적 채무를 진 연유로 제대로 된 왕권을 펼치지 못했고, 광종 즉위 초기에도 사정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종 즉위 당시 나라 밖 사정도 어지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중국 본토는 당나라의 멸망(907년)으로 5대 10국의 시대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 15개 나라의 평균 수명이 50여 년이었으니 얼마나 혼란스러운 시대였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이 혼돈의 시기는 송나라에 의해 통일이 되는 979년까지 지속된다. 그러나 광종은 불안한 외부 사정을 이용하여 내부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 나간다.
즉위 초 광종은 무난하다 못해 조용한 행보를 보이며, 성주 또는 장군으로 불리던 지방의 호족들을 안심시킨다. 즉위 이듬해 정월에 거목이 뿌리째 뽑히는 일이 발생하자, 자신의 덕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자책한다. 그리고 열 권의 책(정관정요)을 밤낮으로 끼고 살며 7년의 시간을 보낸다. 훗날 고려의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린 ‘시무 28조’의 최승로는 이 시기를 하, 은, 주 시대에 버금가는 태평성대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광종은 정치학 교과서인 정관정요를 읽고 또 읽으며, 호족을 향해 칼을 갈고 있었다.
<정관정요>는 총 10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당 태종 이세민이 알려주는 제왕학 개론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 개국 공신만 3천 명이 넘는다. 아바마마는 그 들과 통일을 이루었지만, 나는 그 자식들과 싸워 왕권을 지켜야 한다.’
당시 고려의 호족들은 오늘날 미국의 주지사를 능가하는 권력과 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태조 왕건의 고려는 지방호족들의 연합 위에 올라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건이 호색한이라 29명의 부인을 맞이했던 것이 아니다. 호족들의 권력은 고려 건국 30여 년이 지나며 대를 이어 더욱 공고해지고 있었다.
그들의 힘의 원천은 토지와 노비였다. 고려시대 호족들의 노비는 조선시대 마당을 쓸던 마당쇠나 안방마님과 바람이 났던 돌쇠가 아니었다. 호족들의 사유재산인 노비는 세금도 내지 않았으며, 국방의 의무도 면제되었다. 노비의 숫자가 많을수록 국가의 재정과 힘이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호족들의 노비는 노동력의 원천이자 환급이 가능한 인적 재산이었으며, 농기구 대신 칼을 쥐여주면 즉시 사병으로 변신이 가능했다. 무려 천 명이 넘는 노비를 보유한 호족들도 있었는데, 많은 수의 노비가 원래는 양민이 경우가 많았다. 고려 건국 과정에서 잦은 전쟁으로 인해 양산된 포로와 그 과정에서 생겨난 전쟁고아들 그리고, 경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전쟁 난민들이 돈 있는 호족들의 노비로 전락한 것이다. 세금과 부역에 동원될 바에는 차라기 성주의 노비가 되는 것이 나을 지경이었다.
인간의 욕심은 결국 화를 부르지만, 멈출 줄 모르는 법이고, 금기와 금지를 깨고 어긴다.
“오늘이 아랫마을 박가 놈이 작년에 빌려 간 쌀을 갚기로 한 날이 맞으렷다.”
“예! 맞습니다요.”
“이자를 너무 낮게 쳐 준 게 아닌지 걱정이구나. 오늘이라도 쌀을 들고 오면 낭패인데 말이다.”
“염려 마십시오. 며칠 전부터 굴뚝에 연기가 나는 꼴을 못 보았습니다.”
“네 놈이 양인의 딸과 결혼하려고 아주 열심히로구나. 껄껄껄”
당시 고려에는 양천교혼(양민과 천민의 혼인)이 금지되었으나, 호족들은 노비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 다양한 편법을 부지런히 사용했다. 남성 노비와 가난한 양인의 여성이 혼인을 올리면 그 자식은 주인의 노비가 되었다. 고려 말에는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노비에 이르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아버지 태조 대왕께서도 실행하려다 호족들의 저항으로 끝내 이루지 못한 그것을 내가 해내겠다.’
956년, 광종이 7년의 침묵을 깨고 들고 나온 것은 ‘노비 안검법’이었다. 이는 링컨의 노예해방 급의 큰 파장을 몰고 왔다. 32살의 광종이 서경 군벌을 중심으로 한 전국의 호족들에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그간 나라 사정을 보니, 원래 양인이었으나 짐의 부덕함으로 인하여 억울하게 노비가 된 백성들이 너무 많다. 이런 자들은 관아에 가서 본인이 양인이었음을 알리기만 하면 모두 면천해 주도록 하라. 태조 대왕의 숙원이기도 하였던 노비안검법을 시행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쁘지 않을 수 없다.”
노비 안검법은 호족들을 비롯하여 고려 기득권세력 대부분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침을 튀기며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런 맹랑한 자를 봤나! 이 나라가 누구 덕에 섰는데! 감히 우리를 건드려!”
“우리가 너무 방심했었습니다. 괜히 왕족이 아닐 것인데. 우선 왕후를 앞세워 설득해 보도록 합시다.”
광종의 정실부인 대목왕후의 집안 역시 막강한 호족집안이었기에, 노비안검법 시행에 반대했다.
“폐하! 다른 것은 다 하셔도 되옵니다. 허나 이것만은 건드리지 마셨어야지요.”
“다른 것?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요? 짐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말해보시오. 노비 안검법은 호족이 아니라 왕이 통치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오. 나는 죽음을 이미 각오하고 있소이다. 왕후는 나의 편에 설 것이오. 아니면 친정 쪽에 설 것이오?”
광종은 젊었기에 의지는 단호했고, 생각을 실행하는 데는 주저함이 없었다.
광종이 준비한 비밀병기는 노비안검법만이 아니었다. 당시 대륙의 강자로 떠오르고 있던 후주에 꾸준히 사신을 보내 후주의 황제와 정치적 교감을 이어가며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당시 후주는 고려보다 먼저 새로운 나라의 왕권 강화 작업을 마친 상황이었다.
‘노비안검법으로 호족들에 경제적 타격은 주었지만, 저들은 또 다른 방법으로 만회를 할 것이다. 그 들의 정치적 기반을 빼앗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저들과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혼자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다. 나만의 정치 친위대가 필요한데, 조정에는 모두 저들의 사람들로 가득하고, 새로운 인재를 키우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구나!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로다.’
광종이 노비안검법을 시행하고 얼마 후, 후주의 사신단이 고려에 도착했다. 모든 일행이 일정을 마치고 돌아갈 때, 후주 사신 쌍기는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몸살을 앓게 된다. 홀로 남은 쌍기가 건강을 회복했을 때쯤, 광종이 그를 친히 문병했다. 쌍기와 대화를 나누던 광종은 그의 학식과 지혜에 탄복하여 벼슬자리를 제안하여 고려에 남을 것을 제안한다.
“허나 저는 후주의 녹을 먹는 자이옵니다. 후주의 황제 폐하의 명이 있다면 귀국에 남아 부족한 제 역량을 펼쳐보도록 하겠습니다.”
후주 황제는 흔쾌히 쌍기의 귀하를 허락했고, 광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원보라는 관직에 임명시킨다는 것이 역사의 기록이고, 이제부터 필자의 소설이 더해진다.
광종은 고려에서는 자신의 개혁을 진두지휘할 인재를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후주에서 능력이 이미 입증된 인사를 영입하기로 결심하고, 후주의 황제에게 쌍기를 추천받은 것이다. 쌍기는 이미 그 능력이 입증된 전문 정치 컨설턴트였다. 호족을 비롯한 신하들은 당연히 반대했다.
“폐하! 우리 고려에도 인재가 넘쳐나는데, 어찌하여 다른 나라의 신하를 들이려 하시옵니까!”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고려 조정에 사람은 많으나, 능력으로 선발된 인재가 아니라, 가문의 덕으로 관직에 오른 그 들의 사람만 넘쳐났다.
‘입현무방” 인재를 등용하는 데 있어 친소나 귀천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맹자의 말이다. 광종이 쌍기를 고려 정계에 데뷔시키며 내건 명분이다.
광종이 호족의 거센 반발 속에서 쌍기를 귀화시킨 것은 바로 그것을 위함이었다. 광종은 기득권의 뿌리를 뽑아낼 수 있는, 강력한 한방을 쌍기와 함께 준비하기 시작했다. TO 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