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공간을 가득 채운 사람과 북적이는 소음이 대화를 잠식시키는 식당을 선호했으나, 이제는 아늑함이 장착된 원 테이블 식당을 선호합니다.
신해철의 ‘도시인’을 귀로 들었으나, 이제는 ‘민물장어의 꿈‘ 을 이따금 기억으로 듣습니다.
빨리 조리되는 간이 센 음식을 즐겼으나, 이제는 제철을 기다려 심심한 음식을 나릿나릿 먹습니다.
취하기 위해 서둘러 술을 마시며 급하게 말을 쏟아냈으나, 요즘은 빈 잔에 친구의 말이 차기를 기다립니다. 한숨을 내쉬기 위해 피던 담배를,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하기 위해 끓었습니다.
등산을 좋아했지만, 자연에 의지하지 않았고, 도시의 모던함을 숭배했었습니다. 지금은 자연의 섭리에 경탄하며 산 아래 작은 집에서 살아갑니다.
시간을 추격하며 세상에 분노하였으나, 근래에는 하고 싶은 일을 더디지만 조금 더 공들여하고, 결과는 하늘에 맡기게 되었습니다.
남보다 나은 나, 남이 선망하는 내가 되려고 빨리 달렸지만, 어제보다 나은 나, 조금 뒤처진 남을 돌아보는 느림보가 되고 싶습니다.
친구는 다다익선이라 여겼습니다. 나의 취향은 고려하지 않고 세상이 규정한 친구를 우량주 사냥하듯 찾아다녔습니다. 말을 많이 하는 이들과 더 많은 말을 나누었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시간을 따로 내었습니다. 혼자여도 좋지만, 생각날 때 스스럼없이 통화 버튼을 누르는 친구가 몇 있습니다.
자세히 보기 위해 멀리서 보아야 하지만, 잘 익은 된장색의 아름다움을 알아채는 심미안이 생겼습니다.
찾는 이는 드문데, 찾아야 할 곳은 늘어나고, 고독을 염려하면서도 번잡함을 기피하는 조금 까다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기쁨은 드물고, 슬픔이 잦아지니 마침내 평온함이 행복임을 깨닫게 되었고, 여전히 서툴지만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것이 조금 수월해졌습니다.
말끝을 흐리며 은근슬쩍 아버지라 부르기도 하고, 끝내 어머니라 부르지 못한 엄마의 부재에 아이처럼 놀라는 것이 어른일까요? 나이가 의미하는 건 연륜이나 경험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맞게 나를 재단한 횟수가 아닐까요? 나이가 드는 것은 어렵고, 어른이 되는 것은 난망합니다.
아이는 예상보다 어리지 않고, 어른은 기대보다 어른스럽지 않다고 합니다. 나이가 들면 저절로 어른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오십이 되어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세상이 좋아지는 전제조건은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머물러 있는데 세상이 좋아지는 마법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사랑이 아니라 혐오가 넘치는 세상입니다. 나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을 멈추고, 나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어제 보다 나은 내가 되는데 집중하다 보면 나이보다 젊게 사는 좋은 어른이 될 것이고, 그런 어른들이 넘치는 세상이야말로 모두가 꿈꾸는 세상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