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월클, 국립중앙박물관과 K유물>
광복 50주년을 맞은 1995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철거를 지시한다.
"70년 넘게 경복궁을 가리고 있소. 아직도 저 건물이 남아있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우리 문화재는 다른 곳으로 즉시 이송하고 건물은 완전히 날려버리시오."
정부는 3월 1일,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의 철거를 선포한다. 그러자 일본 정부에서 자신들이 비용 전액을 지원할 테니 해당건물을 옮기게 해달라고 요청하는가 하면 국내의 일부 학자들과 시민들도 건물의 철거에 반대한다.
"그 건물을 폭파시킨다고 우리의 아픈 역사와 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일부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8월 15일 건물의 완전 해체를 강행한다.
해방 이후 중앙청이라는 이름으로 정부청사로 활용되다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던 이 건물은 바로 일제가 만든 조선총독부 건물이다. 일제는 10여 년의 공사기간을 들여 지하 1층 지상 4층에 이르는 당시 일본 본토에서도 보기 힘든 대규모 현대식 건물을 지었다. 수동으로 작동되던 엘리베이터까지 설치한 이 건물은 당시 우리 백성들에게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보거라! 이것이 대 일본제국의 위용이다."
총독부 건물을 하늘에서 보면 일본을 상징하는 날일 자 모양이며, 건물의 곳곳에 일본 국화를 상징하는 연꽃무늬 장식이 박혀있다. 우리나라의 정기를 끓기 위해 경복궁을 가로막은 것은 물론이고, 당시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을 정면으로 배알 한다.
<조선신궁>
조선신궁은 메이지천왕과 일본의 건국신화인 아마테라스를 모신 것으로, 신사참배를 강요는 우리 민족문화 말살을 목표로 세운 곳이다. 신궁은 일본 전체에도 15개 밖에 없는데 우리나라 남산에 무려 13만 평 규모로 지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지키겠다고 세운 국사당을 허물고 거기에 우리 신궁을 세우는 것이다. 그곳에서 경복궁의 근정전을 내려다볼 수 있다. 어떠냐? 조선의 왕이 매일 아침 우리의 신을 우러러보는 형국이!"
해방이 된 후, 일제는 자신들의 신궁이 우리 손에 의해서 해체되는 것이 두려워 서둘러 제를 올리고 스스로 거두어 사라졌다.
오늘날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에는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백범김구광장과 일본제국주의의 설계자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보다 더 적절한 조치가 있을 수 있을까? 일본의 신궁에 서려있던 악한 기운이 흔적도 없이 소멸해 버렸을 것이다.
"후손들이여! 남산은 우리 두 사람이 잘 지키고 있으니 자네들은 문화발전에 힘써주게"
조선총독부 건물의 완전 해체가 결정되자 국립중앙박물관에 일본인 관광객이 급증하기도 했다.
"이곳이 우리 일본이 36년간 한국을 지배하던 시절의 본부였단 말이지? 기념사진을 안 찍을 수 없지. 그 시절이 그립구먼."
김영삼 대통령은 일본에서 수학여행온 학생들은 물론이고 일본인 관광객들이 총독부 건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꼴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보존해야 할 역사와 기억해야 할 역사는 엄연히 다르다. 경복궁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제국주의의 상징인 건물을 응당 사라져야 할 잔재이다.
1995년 광복절 당일, 수많은 인파가 제2의 광복절을 맞는 심정으로 광화문 앞에 모였다. 식전 행사를 마치고 총독부 꼭대기에 설치되었던 중앙 상단부 첨탑이 기중기에 의해 해체되었다. 그리고 총독부를 상징하는 첨탑이 우리 손에 의해 바닥에 내려놓아지자 광장에 모은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불렀다. 해체 작업의 생중계는 무려 28%에 이르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조선총독부건물에서 옹색한 셋방살이를 하던 국립중앙박물관은 이후 몇 차례 더 이전을 거듭했고, 마침내 오늘날의 용산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 사이 일본인 관광객이 자신들의 지난날을 회상하기 위해 찾던 국립중앙박물관은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명소가 되었고, 국립중앙박물관의 굿즈까지 품절대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굿즈 대란에는 전 세계적인 광풍을 일으키고 있는 한국문화와 유물을 배경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의 영향도 크다.
놀랍게도 30년 만에 또 하나의 월클이 된 국립중앙박물관과 K유물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알아보자.
<또 하나의 월클, 국립중앙박물관>
영국 아트뉴스페이퍼에 따르면 2023년 기준 가장 많은 관람객이 찾은 박물관은 루브르이며, 2위는 바티칸, 3위 영국박물관 등에 이어 우리의 국립중앙박물관이 6위를 차지했다. 관람객 숫자는 무려 4백만 명으로 아시아 1위이다. 2025년에는 상반기 관람객만 270만 명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하고 있으며, 뮷즈 판매액 또한 115억 원으로 역대 최고치이다.
뮺즈란?
뮤지엄에서 파는 굿즈를 의미하는 말인데, 일부 상품은 온라인 판매 등록과 동시에 품절이 되어 몇 개월을 기다려야 하기도 하고, 오프라인에서 구매를 하기 위해 박물관 오픈런이라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2024년 6만여 개가 팔리며 무려 15억 원의 매출을 올린 1위 상품은 일명 '취객 선비 삼인방'이라 불리는 술잔이다. 특수 안료처리를 한 잔에 물이나 술을 따르면 잔에 그려진 선비의 얼굴이 빨갛게 변한다. 아이디어가 한국인의 해학을 잘 표현한 것뿐만 아니라 캐릭터 자체를 단원 김홍도의 '평안감사 향연도'에서 따온 것이다.
<평안감사 향연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이 그림은 평안감사가 대동강변에서 베푼 잔치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잔치에 참가한 관기와 사대부, 아전들의 모습은 물론이고 구경 나온 백성들과 물지게를 지는 아이, 시장 상인, 담배 피우는 포졸 등 당시 시대상을 잘 표현한 작품이다.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를 모시고 잔치구경을 가는 젊은이와 갓난아기를 안고 발걸음을 서두르는 젊은 부부의 모습을 통해서 이것이 양반들만의 잔치가 아니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잔치가 열리는 곳에는 취객이 나오기 마련이다. 멋진 갓은 이미 삐뚤어져 있고 얼마나 취했는지 털썩 자리에 주저앉은 양반의 모습을 김홍도는 절묘하게 표현했고, 국립중앙박물관은 이 선비를 모티브로 술잔을 제작한 것이다.
<반가사유의 상 /사유의 방>
지하 1층 지상 6층으로 구성된 국립중앙박물관을 하루에 모두 둘러보기에는 상당한 체력이 요구된다. 그러나 관람객의 70%가 반드시 찾는 곳이 있다. 바로 국보 반가사유의 상이 전시되어 있는 사유의 방이다.
6~7세기 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반가사유의 상은 석가모니가 인생의 생로병사에 대해 깊이 고민하던 순간을 담은 작품이다.
그런데 미소가 환상적이다. 유럽에 모나리자의 미소가 있다면 한국에는 반가사유상의 미소가 있다. 이 미소는 단순히 기쁨을 표현하지도 않았고, 깨달음에 이른 환희의 순간을 포착한 것도 아니다.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만사에 지친 현대인에게 안온함을 안겨준다. 반가사유상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21세기 현대인 사이에 존재하는 1400년의 시간이란 사라진다.
반가사유의 상이 전시되어 있는 사유의 방은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기에 마련되었다. 편백나무와 계피나무 향이 공기 중에 은은하게 퍼져있는 넓은 전시실에는 단 두 점의 반가사유상만이 관람객을 반긴다.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인 사유의 방에 들어서면 부처님의 이런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서들 오시게. 억지로 쉬려고도 하지 말고, 굳이 아픔을 잊으려고도 할 필요가 없네. 그저 잠시라도 머물라 가시게."
그저 반가사유상의 미소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수많은 관람객이 가득한 박물관에서 분리된 소행성처럼 느껴진다.
박물관 측은 15센티 크기의 반가사유상 미니어처를 제작했고 이 굿즈는 매출 3위를 기록했다. 우주를 담은듯한 미소를 띤 반가사유상 굿즈는 BTS의 리더 RM도 원하는 색상을 구하지 못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BTS는 RM이 사랑하는 달 항아리 굿즈도 제작하며 협업을 진행했다. 최고 경매가가 60억 원에 이르며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우리의 유물 달 항아리에 BTS의 '소우주'의 가사가 아름다운 필체로 새겨져 있다.
‘한 사람에 하나의 역사, 한 사람에 하나의 별, 우린 우리대로 빛나 우린 그 자체로 빛나’
<왕의 서고 / 왕실의궤>
또 다른 전시실 '왕의 서고'는 사진 맛집으로도 유명하다. 아름다운 책 표지를 이미지로 재현해 전시로 구성했는데, 마치 책이 공중에 떠 있는 듯하여 마법학교의 한 장소에 들어온 듯하다. 이 책은 프랑스로 밀반출된 지 145년 만에 귀환한 외규장각 의궤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
의궤란 조선왕실이 중요행사를 치른 과정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왕실기록물이다. 정조는 이 중요한 자료를 한양에만 두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설치하여 다른 왕실 관련 서적과 함께 보관하였다.
그러나 1866년 병인양요로 강화도에 상륙한 프랑스 군인들은 외규장각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만행을 저지른다.
"뭐냐? 이 이상한 건물은? 돈이 되겠다 싶은 것만 챙기고 불을 질러버려."
프랑스 군대의 방화로 인해 전각이 불탄 것은 물론이고 5,000여 권 이상의 책이 재로 변해버렸다. 프랑스 군대는 불길 속에서도 은괴와 함께 340여 권에 이르는 서적과 의궤를 약탈해 갔다.
프랑스 군대는 외규장각 의궤를 어디에 어떻게 보관하고 있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진 한 역사학자가 있었다.
1923년 전주에서 태어난 박병선은 1950년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1955년에는 한국여성 최초로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다. 그는 프랑스 도서관에서 사서일을 하며 의궤의 행방을 추적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인 외규장각의궤는 프랑스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프랑스에 있는 거의 모든 도서관을 뒤지다시피 했다. 누구도 그녀 자신도 의궤를 찾아내는 20년이 걸릴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외규장각 의궤를 찾겠다는 그의 무서운 집념은 선진국이며 문화강국을 자처하던 프랑스인들에게 기이하게 여겨지며 멸시와 조롱을 받기까지 했다.
"도대체 그 의궤라는 게 뭔데, 이렇게 프랑스 전역을 들쑤시고 다니는 거요? 그리고 그걸 찾는다고 해도 당신 혼자 뭘 어쩌려고 이러는 거요? 우리 프랑스가 그것을 무단반출 했다는 증거도 없고, 국제법상 그것은 우리 것이요."
박병선 박사가 체류하던 50~70년대 한국의 국제적 위상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경제적으로도 후진국이었으며 문화적 인지도는 제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박병선 박사가 프랑스에서 의궤를 찾아 헤맨 지 20년이 지난 1975년 어느 날, 그는 새로운 소식을 듣게 된다.
"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베르사유 분관에 폐지창고가 있어요. 한자로 된 중국 책들이 대부분인데 혹시라도 한 번 가보세요."
박 박사는 그곳에서 먼지에 가득 쌓인 채 방치되어 있던 외규장각 의궤를 마침내 찾아냈다.
"이 유물이 이런 창고에 먼지와 함께 쌓여있다니."
박사는 이 기쁜 소식을 즉시 한국에 알렸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박사에게 본격적인 시련이 시작되었고, 외롭고도 기나긴 또 다른 싸움이 시작되었다. 고국도 아닌 이역만리 프랑스 땅에서. 문화선진국을 자처하는 프랑스 인들에 맞서.
박병선 박사는 근무하던 도서관에서 쫓겨나야 했으며, 외규장각 의궤에 접근도 금지되었다. 자신들이 가치를 알지도 못해 폐지창고에 방치시켜 둔 한국 문화재를 한국인이 찾은 것이 왜 기분이 나빴을까? 자신들의 선조가 저지른 문화재 약탈행위에 대한 반성은 없이 자신들에게 먼저 보고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앙갚음이었을까?
박병선 박사는 그럼에도 외규장각 의궤에 대한 연구를 멈추지 없었다. 박사는 외규장각 의궤에 전 생애를 걸었다.
출입을 제한하는 도서관으로 매일 출근하는 그녀에게 드디어 하루 한 권에 열람이 허용되었다. 박사는 자리를 비운 사이에 도서관 직원이 의궤를 치울까 봐 도서관 문이 닫는 시간까지 거의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식사는 물론이고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 사치라고 여겼다. 그렇게 의궤 297 책의 위치와 목록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정리하다 보니 십여 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박사의 집념과 그야말로 생을 오롯이 바친 헌신 덕에 대한민국 정부는 물론이고 각계각층에서 외규장각 의궤 반환운동이 일어났다. 프랑스 내부에서도 반환에 동참하는 여론이 형성되며, 2011년 외규장각 의궤는 145년 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국중박과 K유물 인기에 기름을 부은 케데헌 >
국립중앙박물관의 인기와 K문화에 기름을 부은 건 넷플릭스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다. 일명 케데헌이라고 불리는 이 작품의 OST는 빌보드 차트를 점령하고, 넷플릭스의 신기록을 연일 경신하는 중이다. 특히 이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 더피(호랑이)와 서 씨(까치)는 한국의 민화 호작도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작호도>
작호도는 소나무를 배경으로 호랑이와 까치가 함께 등장하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민화이다.
“아침부터 까치가 우는 걸 보니 오늘 반가운 손님이 오시려나 보다.”
까치는 좋은 소식을 의미하는 길조를 의미한다. 호랑이는 한국인에게 단순한 동물을 넘어서 재앙을 막아주는 영험한 존재로 인식된다.
호작도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호랑이와 까치의 비중이 바뀌었다. 17세기에는 호랑이와 소나무가 주 배경이고 까치는 등장하지 않거나, 나오더라도 한 구석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신분제 질서가 무너지며 작호도 안에서도 까치와 호랑이의 관계는 역전되었다.
민화를 그리는 주체와 소비하는 이들이 까치로 대변되는 백성들이기에 까치의 비중이 커지고, 그림 속 호랑이의 권위와 위엄도 사라지게 되며 친숙한 캐릭터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 좀 조용히 하게. 아침부터 시끄럽게 왜 그리 우느냐?"
"아니 호랑이 저 양반이 뭘 잘못 드셨나? 이보시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는 그만하시오."
호작도는 변화된 사회상을 풍자와 해학으로 표현한 것이다. 지배층을 대변하는 호랑이가 작고 연약한 까치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 민중의 마음을 건드린 것이다.
주요 배경이 되는 소나무는 새해와 장수를 의미한다. 그러니 봄이 오면 입춘대길이라는 글씨를 대문에 써 붙였듯이, 당시 사람들은 액운을 막아주고 평안을 기원하며 정월에 호작도를 붙였다.
"올 한 해도 우리 가족들 몸 건강하고, 무탈하게 도와주십시오."
케데헌에 등장하는 캐릭터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제작한 ‘까치호랑이 배지’는 국경과 시간을 초월하였다. 온라인 예약 물량까지 완판행진이 이어지며, 까치호랑이 배지를 구매하기 위해서는 몇 개월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사인검>
케데헌의 주인공 중 한 명이 악령을 물리치게 위해 사용하는 검은 조선시대 사인검에서 따온 것이다.
조선 태조 때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사인검은 조선시대 왕실에서 사용되었는데 호랑이의 기운을 담아 나라와 백성에게 닥칠 사악한 기운을 물리친다는 의미에서 제작되었다. 주로 왕들이 장식용 또는 호식용으로 지녔던 검이니 만큼 그 제작공정이 놀라우리만큼 까다로웠다.
"참으로 아름답구나! 검에서 신령스러움이 느껴지는구나. 이제 다음 검은 12년이 지나야 만들 수 있겠구나."
사인검은 인년(호랑이 해) 음력 정월, 인일(호랑이 날) 인시 (새벽 3~5시) 에만 제작되면, 검을 만드는 장인 또한 특정한 날에 태어난 특정한 성씨를 가진 사람이어야 했다.
사인검에는 한자 27자가 순금으로 새겨져 있으며, 칼집은 어피(철갑상어 껍질)로 되어 있고 손잡이는 동으로 되어 있는데, 전체길이는 1미터가 되지 않는다.
2022년 국립중앙박물관은 호랑이해를 맞아 소장 중인 사인검을 온라인으로 공개한 바 있다. 박물관은 검을 소개하며 올 한 해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국민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사인검은 조선시대에도 흉년이 들거나 나라의 재정이 어려운 시기에는 제작을 하지 않아서 더욱 귀한 검이며, 최근에는 2022년 임인년, 2월 18일, 인시에 제작하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일월오봉도 >
케데헌에서 K팝스타는 일월오봉도를 배경으로 화려한 공연을 펼친다. 일월오봉도는 조선시대 왕의 뒤에 펼쳐져 있던 병풍이었다. 다섯 개의 산봉우리, 해와 달, 소나무, 폭포 등이 그려진 궁중회화작품인데, 21세기 문화왕의 등장을 알리는 배경으로 더할 나위 없다.
필자의 소장욕구를 일으키는 아이템은 귀진사 극락전의 단청과 표훈사 반야보전 서까래 단청 문양을 담은 단청 키보드도 있다. 저 키보드를 사용한다면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으나, 역시나 품절 상태이다.
우리나라의 국보 287호인 백제금동대향로를 정교하게 구현한 미니어처는 실제로 향까지 피울 수 있는데, 집들이 선물이나 프러포즈 용으로도 손색이 없어 보이지만, 역시나 품절 상태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모든 굿즈는 국내 중소기업 생산이 원칙이다. 반가사유상의 미소를 담은 제품을 해외공장의 대량생산에 맡길 수 없다는 것이다. 금전적인 이익만을 추구했다면 질 낮은 제품이 온오프매장에 넘쳐났을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굿즈를 구매하는 것은 공산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월드 클래스가 된 우리 문화를 후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약탈문화재가 아닌 나눔의 서재>
어린 시절 서구의 유명박물관을 보며 늘 궁금한 것이 있었다. 왜 이집트와 아프리카의 유물이 유럽박물관에 있을까?
문화에는 최고가 있을 수 없다. 문화는 다양성과 독창성이 그 핵심이다. 남의 문화재를 밀반출하여 자신들의 나라에 전시를 하며 최고의 박물관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문화에 대한 무지이다.
문화는 훔칠 수도 없고 물리적인 힘으로 점령할 수도 없다.
36년의 시간 동안 일본은 우리의 주권과 영토를 일시적으로 강탈했지만, 정신과 문화만은 어쩌지 못했다.
90년대 후반 일본문화의 전면개방이 결정되자 한국의 문화는 완전히 말살되어버릴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개방 전에도 일본의 만화와 패션, J팝이 우리 사회를 점령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5년의 우리를 보라.
일본인을 포함한 전 세계인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대한민국 문화의 최 전성기일지도 모른다. 제대로 즐기고 기억하자.
대한민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무력이나 불법으로 타국에서 밀반출된 문화재가 없다. 그래서 선한 사람들의 선한 마음으로 기부된 문화재로만 채워진 나눔의 서재가 더욱 자랑스럽다. K문화의 우수성은 선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확신하며 다시 한번 김구 선생님의 문화론을 되새겨본다.
<김구 선생이 말한 문화의 힘>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합니다.
가장 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나라의 침략으로 무척 괴로웠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강한 나라가 되어 또 다른 나라를 침략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한 없이 갖고 싶은 것은 문화의 힘입니다.
문화는 우리에게 가진 것에 만족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게 해 줍니다.
이런 마음을 갖는다면 지금 가진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할 것입니다.”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살다 산화하셨으며, 우리 역사상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도 문화강국을 꿈꾸신 그분에게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김구 선생님! 보고 계십니까? 우리가 해냈습니다.
THE HONMUN IS SEA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