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시절이었고 최악의 시절이었다. 지혜의 시대였고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모두가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듯했고, 동시에 모두가 정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 같았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중>
1937년, 동두천 야산의 사건 현장을 취재한 신문사는 아래와 같은 기사를 보도한다.
‘이 사건은 세계 범죄 사상 전무후무한 범죄 기록이 될 것이다.’
2011년, 국과수에서는 칠십 년 넘게 보관 중이던 당시 범인의 얼굴을 화장한다고 발표한다. 범인은 도대체 어떤 범죄를 저질렀던 것일까?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에게 일본순사보다 더한 공포를 안겨 주었던 범인과 단체를 추격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삼 년 넘게 이어진 그의 추적기를 통해 사건의 전모를 알아보자.
1933년, 유곤용은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왕십리 집 대문을 밀치듯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할아버지! 저 곤용이 왔습니다.”
“어! 그래! 우리 장손 왔구나. 내가 죽기 전에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었는데 참으로 다행이다.”
“할아버지. 무슨 말씀이세요. 기운 차리셔야지요.”
“아니다. 내가 너한테 너무 많은 짐을 남기고 가는구나. 곤용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거라. 그리고 네 아비한테는 절대로 비밀로 해야 한다. 나와 네 아비가 그 많던 재산을 다 까먹은 이유는........”
“할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아버지와 경숙이는 도대체 지금 어디 있습니까?”
유곤용의 할아버지는 경성의 유명한 약재상으로 한때 유명한 자산가였다. 손자인 유곤용 또한 황해도 해주에서 제일 큰 구명당이라는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경성 본가에서 기이한 서찰이 오기 시작했다.
“아들 곤용아! 급전이 필요하니, 지금 간 인편으로 융통이 가능한 최대치의 돈을 즉시 보내다오.”
“참으로 이상하구나. 지난달에는 할아버지께서 급전이 필요하다고 하시더니. 일단 이번에만 보내 드리고 다음 달에는 내가 경성을 다녀와서 자초지종을 알아봐야겠다.”
몇 달 후, 유곤용이 경성 집에 들렀으나 아버지는 오간데 없고, 수심이 가득한 할아버지가 맥없이 마루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할아버지? 어디 편찮으세요? 아버지는 어디 가셨습니까? 경숙이도 안 보이는군요. 집안에 무슨 우환이라고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왜 그리 급전이 필요한 겁니까?”
“아니다. 아니야. 바쁜데 뭐 하러 내려왔어. 어서 다시 가거라. 아무 일도 없다.”
유곤용은 여동생에게 편지 한 장을 남기고 해주로 돌아갔다.
“경숙아! 할아버지 안색이 안 좋구나. 오빠라는 작자가 집안을 잘 돌보지 못해 미안하구나.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다면 네가 반드시 나에게 알려야 한다. 네 혼인자리도 알아보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라.”
그러나 유곤용은 여동생으로부터 어떠한 답장도 받지 못했고,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연락만 당도했을 뿐이다. 유곤용은 할아버지의 의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지난 몇 달간의 일을 되짚어보았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데, 경숙이와 아버지는 도대체 어디를 간 것인지?’
그 순간 할아버지의 눈동자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곤용아...... 백백교.... 백백교에 네 여동생 경숙이가 있다. 네가 어서 가서 경숙이를 찾아오고 우리 집안의 복수를 해 다오.”
“할아버지 무슨 말씀이세요? 백백교라니요? 경숙이가 납치라도 된 겁니까?”
곤용의 할아버지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남긴 말들은 충격적이었으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과 아귀가 맞지 않은 퍼즐이 너무 많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백백교라는 종교에 빠져 전 재산을 갖다 바치고, 돈이 떨어지자 여동생까지 교주의 시녀로 바쳤다는 것이다.
유곤용은 백백교의 본거지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했다. 복수 이전에 도무지 풀리지 않는 의문을 풀고 싶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백백교에 빠진 이유는 돈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돈이라면 누구보다 풍족했다. 또한 오랜 기간 약방을 운영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왔다. 헛된 말에 쉽게 현혹될 정신을 가지신 분들이 아니었다. 그런 분들의 눈을 가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버지가 여동생까지 바치는 것을 보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신통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백백교는 사이비가 아니라 일제로부터 나라를 독립시키고, 세상을 구원할 종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세상의 일에 관여하는 것이 종교이고 신일까?
유곤용은 혼자 힘으로 풀 수도 없는 문제를 안은 채 팔도를 다니며 백백교의 조각을 모으기 시작했다.
‘단 한명이 단 하나의 흰색으로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든다.’
우람한 체구, 매력적인 저음을 가진 백백교 교주의 설교는 한 곡의 교향곡처럼 들린다고 한다. 늘 하얀 옷에 하얀 가면을 쓰고 다니는 교주의 얼굴을 본 신자는 없으며, 그에 관한 믿기 어려운 소문은 신자들의 믿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대원님(세상의 근원이 되는 어른)은 스무날 넘게 아무것도 안 드셔도, 목소리나 움직임에 아무런 변화가 없으시다네.”
“헉! 내가 헛것을 본 것이 아니구먼. 하루 종일 술을 드셨는데도 걸음걸이가 그대로 시더라니까. 그나저나 그 가면은 왜 쓰시는 건가?”
“이 사람! 아직 그것도 몰랐나? 그게 다 우리를 위해서 일부러 불편함을 감수하시는 거야.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은 대원님과 눈이 마주치면 그 자리에서 눈이 멀어버린다네.”
“아무튼 서둘러 백백교 신도가 돼서 돈도 많이 벌고, 일본 놈들 등쌀 없는 곳에서 편하게 살고 싶구먼. 자네도 땅문서 잘 챙겼지?”
“그럼! 땅문서뿐인가! 돈을 많이 낼수록 더 많은 돈을 벌게 해 주시고, 해방이 되면 벼슬자리도 준다고 하시잖나. 난 동생네 집문서까지 몰래 다 가져왔네. 이제 다들 고생 끝이야. 인생이 이렇게 쉽게 풀릴 줄 누가 알았나!”
백백교 교주 전용해는 자신이 만든 주문만 외우면 세상의 종말이 오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으며,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설파했다.
"백백백! 의의의! 적적적! 감응 감응응! "
이 얼마나 쉬운 일인가? 이 간단한 주문만 외우면 성실히 노력할 필요도 없고, 불확실한 미래로 두려움에 떨 필요도 없다니.
그러나 삶의 가치는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가는 것에 있고, 행복은 그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 속에 있다. 그럼에도 속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전용해의 말에 속는 것은 욕심이 개인의 눈을 가리고, 조급함이 이성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이렇게 빨리 변하는데 언제 차근차근 돈 모아서, 집 사고 애들 키우나? 생각 같은 거 안 하고 쉬운 방법으로 한 방에 큰돈을 벌게 해 준다면 전 재산을 한 번 걸어볼 만하지 않겠어? 인생 어차피 한 방이라잖아."
1930년대 2천만 명의 사람들 중 약 8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백백교의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백백백! 의의의! 적적적! 감응 감응응!"
백백교의 시작은 전용해의 아버지 전정운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전정운은 동학농민운동의 현장에서 남들과 전혀 다른 생각에 도달한다.
"이...... 도대체 이 많은 사람들이... 모인 이유가... 아니지. 이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지. 사람들을 어떻게든 끌어 모으면 큰돈이 되겠구나. 내가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다."
1912년, 다시 세상에 나타난 전정운은 백도교의 교주가 되어 있었다.
"거듭되는 홍수와 가뭄은 나라가 망할 징조였다. 나라를 지켜야 할 대신들이 나라를 팔아먹으니 이번에는 나라가 아니라 세상이 망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금강산에서 머물며 얻은 진리인 백도교의 신도가 된다면 불지옥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무엇을 망설이느냐! 어서 나의 품으로 들어오라."
조선 총독부의 조사에 따르면 일제 강점이 수십 개의 유사종교가 성행했다고 한다. 나라 잃은 상실감과 기아에 허덕이며 황폐해진 민중의 정신은 사이비 종교가 자라기에 더할 나위 없는 환경이었다.
전정운의 백도교가 승승장구하던 1919년,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교..... 교주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어떡할까요?"
"에이! 시발! 진짜야? 아! 노인데 진짜! 하필 이럴 때. 어떡하지. 잠깐만 좀 있어봐. 아직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전정운의 아들 전용해는 위기에 빠진 백도교를 구하고 자신의 안위에도 도움이 될 일석이조의 묘책을 생각해 낸다.
'가만있어보자. 아버지도 언젠가는 죽을 양반이었고, 나도 언제까지 노친네 뒤치다꺼리만 할 수 없다. 나라고 신이 되지 말란 법이 있나? 우리 아버지가 신이었으니 나는 신의 아들이 아닌가?'
전용해는 아버지의 노하우에 자신만의 이론을 덧붙였다.
"조선 최악의 금서라지만 사라지지 않는 불멸의 존재! 정감록! 정감록을 백백교의 것으로 만들 것이다."
"대단하십니다.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십니다."
산천의 기운이 뭉쳐져 계룡산으로 들어가니, 정 씨의 팔백 년 도읍할 땅이로다 _정감록
철저한 계급사회였던 조선시대, 신분제가 무너지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세상이 뒤바뀌기를 염원했던 이들 모두가 신봉하던 정감록의 주요 내용은 정 씨 성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것이었다.
"하오나! 대원님은 정 씨가 아니라 전 씨 아니십니까?"
"뭐야? 너부터 날 의심하는 것이냐? 이런 식으론 곤란하다. 어이! 이 자는 진즉부터 믿음이 부족한 자였다. 처리해라."
"네!"
전용해는 정감록과 함께 백백교를 확장시킬 사업모델을 구상해 냈다.
"여기 신문을 보거라. 나라 전체가 온통 꼴드 랏슈!(골드 러시) 이야기뿐이다."
"헤헤. 제가 글이 짧아서 한글도 겨우 떼었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요?"
"사람들이 다 금에 미쳐있다. 세상이 무지해지고 삶이 팍팍해질수록 가장 먼저 버리는 것이 양심과 학문이고, 오직 쫓는 것은 돈이다. 나라를 빼앗긴 지금보다 더 살기 어려운 때가 있었느냐? 망조가 된 지금이 우리에게는 기회다. 우선 폐광 하나를 당장 사들여라."
전용해는 동두천의 폐광을 사들이고, ‘천 원 금광 사무소’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자 이제 너희들은 경성과 경기도 일대를 다니면서 신통력으로 금광을 찾아내는 사람이 있다고 소문을 퍼트려라."
"대원님! 그런데 사람들이 몰려도 문제인 것이 여기는 폐광이라 금이 더 이상 안 나오는 곳입니다."
"어허! 또 나를 믿지 못하는 자가 우리와 함께 하고 있구나. 벽력사들은 뭘 하느냐 어서 이자를 처리하지 않고!"
전용해는 자신의 말이라면 부모형제의 목숨도 거두어 갈 만큼 몽매함에 빠진 자들로 부엉이부대를 조직했고, 그 들을 벽력사라고 불렀다.
얼마 후, 금맥을 정확히 집어낸다는 사나이에 대한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폐광 앞에 모여들었다.
"지금부터 내가 주문을 외우면 금이 솟아 날것이니, 너희들은 그냥 줍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다. 만약 나의 신통력으로 너희들이 금을 얻게 된다면 그날부터 너희 모두는 백백교에 들어와야 한다."
"그 참, 말 많네. 이보쇼. 금만 쏟아진다면 당신이 들어오지 말라고 해도 우리가 알아서 백백교든 천천교도 알아서 들어갈 테니 염려 붙들어 매쇼. “
벽력사들이 비아냥거리는 이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전용해가 눈빛으로 제지한 후,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백백백! 의의의! 적적적! 감응 감응응!"
모든 의식이 끝나자 전용해는 우선 열 사람의 입장만 허락했다.
“오늘은 백백교의 믿음에 진심으로 성의를 표한 열 사람만 탄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경성에서 온 부자 열 명이 차례로 탄광입구로 들어갔고, 십 분 후 갱도 안에서는 괴성이 들려왔다.
“노다지다! 노다지야!”
횡재에 관한 소문은 부풀려지고 보태지며 가속도가 붙기 마련이다. 경성과 경기도는 물론이고 팔도에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부자들이 몰려들었다. 백백교에 낼 돈이 없는 사람들은 빚을 내서라도 악착같이 탄광으로 찾아왔다.
“아니 좋은 세상을 열어주신다면서요! 또 돈 많은 사람들만 더 부자가 되는 겁니까? 우리처럼 돈도 없고 빽도 없는 사람들은 백백교의 신자가 될 수 없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이리 잠시 오시지요. 제가 특별히 다른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혹시 따님이 몇 살인지요?”
돈이 없지만 백백교의 신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은 자신의 어린 딸을 전용해에게 바치고 신자가 되었다.
“헤헤헤. 이제 나도 부자가 될 수 있다. 이게 다 너희들을 위한 거야! 이것들아. 니들이 가장의 고충을 알아? 아버지는 그저 너희들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기 위해서 이러는 거야.”
전용해는 폐광을 사들인 후, 은밀히 순금 열 냥을 사 오게 했다.
“순금은 생각보다 무르다. 그걸 작두로 최대한 얇게 썰어라. 그리고 곱게 빻아서 돌에다 보기 좋게 박아라. 어두운 갱도 안이다. 욕심에 눈이 먼 자들의 눈에는 그 돌뿐만 아니라 탄광 전체가 금으로 가득해 보일 것이다. 하하하하하하”
열 냥의 금은 짧은 시간에 사라졌고, 몰려드는 사람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에 전용해는 불만을 품거나 의심하는 신도들이 나올 것을 예상하고 다음 계획에 착수했다.
“아무래도 새로운 신통력이 필요할 것 같다. 그 신통력을 위해서는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번에는 좀 어려운 일인데 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다 극락왕생을 위한 일이다.”
“대원님! 어떤 일이던지 시켜만 주십시오. 저희는 대원님과 백백교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든든하구나. 이리! 이리 가까이 오너라. 내일 오전에 말이다.........”
다음 날 아침, 전용해는 신도들을 모아놓고 협박을 시작했다.
“요즘 금 채굴량이 줄어들었다고 불경스럽게 나의 능력에 의심을 품은 자가 있다. 나는 알다시피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 그러나 다행히도 이 많은 신도중 에 단 한 명이다. 내가 오늘 그 자의 정체를 밝힐 것이다. 자! 모두 엎드려라. 그리고 내가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할 때까지 주문을 외워라. 나를 의심하는 단 한 명은 그 자리에서 영원히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뭐 하느냐! 어서 엎드리지 않고!”
"백백백! 의의의! 적적적! 감응 감응응!"
벽력사들의 위세와 하얀 옷에 흰 가면을 쓰고 고함을 치는 전용해의 기세에 눌린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수백 명의 남녀가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채로 전용해외에는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하는 주문을 외우는 풍경은 기괴했다. 시간이 흐르며 눈물을 흘리거나 오열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이것은 두려움에 의한 것일까? 어쩌면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한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백백백! 대원님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의의의! 그런 놈이 있으면 우리가 잡아 죽이겠습니다. 적적적!”
분위기가 절정에 다다른 순간 벽력사들이 맨 뒤에 있던 노인의 입을 틀어막고 끈으로 목을 졸랐다. 병약하지만 누구보다 많은 돈을 바쳤던 노인은 자신의 신념에 의해 교살당했다. 전용해가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명령했지만, 그 노인만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헉! 진짜다! 사실 저 노인네가 며칠 전부터 대원님이 속임수를 쓴 게 아니냐고 수군거리고 다녔는데!”
“우리 대원님은 모든 걸 알고 계신다. 그리고 대원님을 의심하면 부자가 되기도 전에 죽는다. 대원님! 저희는 단 한순간도, 대원님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자! 뭣들 합니까! 대원님께 큰 절을 올리고 함께 주문을 외웁시다.”
"백백백! 의의의! 적적적! 감응 감응응!"
벽력사를 이용한 전용해의 살인행각에도 불구하고 백백교의 밑천은 날이 갈수록 드러났다. 자신의 헛된 욕심으로 인해 전 재산을 헌납하고 가족마저 바친 이가 백백교에 대한 전말을 담은 고발장을 품고 경찰서로 향하던 중 벽력사에게 잡혔다.
“본보기가 필요하다. 저 자의 가족이 여기 몇 명이나 있지?”
“친인척들까지 합치면 열다섯이 넘습니다.”
“다 죽여라.”
전용해는 신도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또다시 정감록을 이용한다.
“곧 이 땅에 물과 불의 심판이 내릴 것이다. 오직 백백교에서 지정한 피신궁만 안전할 것이다. 우리 신도들은 신속히 모든 가산을 정리하고 안전한 피신궁으로 피하도록 하라. 서둘러라. 세상의 종말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백백교의 피신궁은 외부와 연락이 닿기 어려운 산간벽지에 위치해 있었다. 이는 신도가 아닌 사람들과의 단절을 위한 것이었고, 피신궁내에서는 한 가족끼리 머물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서로 모르는 신도들마저 자주 이동시키며, 내부에서 유대감이 형성될 기회를 차단시켰다. 그럼에도 전용해는 더 많은 돈과 여자를 욕망했으며 피해자는 시나브로 늘어만 갔다.
그러던 1937년의 어느 날, 전용해에게 딸까지 바친 신도 하나가 백백교 간부에게 청을 넣었다.
“제 자식 놈이 대원님을 꼭 만나 뵙고 싶어 합니다. 제 자식이지만 돈 버는 재주가 아주 비상합니다. 지금 가진 재산도 상당하고요. 분명 교주님께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들놈도 드디어 정신을 차렸는지 백백교에 들어오고 싶어 안달입니다. 꼭 제 말을 전해주십시오."
평소에는 신도들의 말을 한 쪽 귀로도 듣지 않던 전용해는 뒷조사를 통해 그 신도의 아들이 상당한 재력가라는 사실을 확인한 후 만남에 응한다.
"내 친히 그 집으로 갈 것이다. 하지만 백백교에 들기 위해서는 내 얼굴을 쳐다봐서도 안 되고, 질문을 해서도 안 되며, 내가 시키는 일에는 무조건 따라야 한다."
일주일 후, 전용해는 벽력사를 대동하고 왕십리의 한 집에 도착했다.
"대원님을 만나기 전에 소지품 검사를 하겠소."
벽력사들은 신도와 그의 아들의 주머니 속까지 확인한 후에 물러났다. 잠시 후, 자정이 되자 전용해가 막 스무 살을 넘긴 그의 첩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섰다. 신도와 그의 아들은 큰 절을 올리고 전용해를 고개를 숙인 채 그저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버지를 따라 백백교로 들어온다고 하니 내 큰 기쁨이네. 이제야 우리 네 사람이 비로소 진정한 가족이 된 것 같아. 안 그런가 처남? 하하하하"
"아이고! 대원님! 황송하옵니 다요. 제가 조만간 하나 남은 이 집도 팔아서 곧 올리겠습니다."
"그래. 그래. 내 용서하겠네. 그나저나 어째 우리 처남은 꿀 먹은 벙어리인가? "
"아! 이 아이가 원래 어릴 때부터 말이 없었습니다. 필요한 말만 딱딱하던 아이라. 물어보실 것이나 시키실 것이 있으면 분부만 내리십시오."
"알겠네. 듣자 하니 해주에서 약방을 운영해서 재산을 제법 모았다고? 재산이 십만 원이 훌쩍 넘는다고 하던데. 서둘러 처분해서 아버지와 동생이 있는 피신궁으로 들어오도록 하라."
"대원님! 제가 지금 약방이 한창 잘 되고 있는지라. 지금 당장은 그만 두기가 어렵습니다. 몇 년 만 더 기다려주시면 돈을 더 불려서...."
"뭐라!!! 무엇이라 했느냐! 너희는 생각을 가져서도 안 되고, 내 명령에 대꾸를 해서도 안 된다! 감히 어디서. 에이! 뭐 하느냐! 너는 술잔이 비었는데 술을 안 따라고? 아비랑 오라비가 저 모양이니 딸년까지"
전용해가 술잔을 동생에게 던지자 맞은편의 사내가 느닷없이 술상을 뒤엎고 전용해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네 이놈! 감히 내 여동생을 때려? 어디서 돼먹지 않은 술수로 우리 집안의 재산을 빼앗더니.! 내가 네 놈을 찾아다닌 지 어언 삼 년이다. 네 놈의 인생도 오늘로 끝이다."
"어허! 네 놈이 감히 나를 함정에 빠트리고도 살아남을 줄 알았느냐?"
사이비 교주 전용해와 추격자 유곤용간 사이에 고성이 오가자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벽력사들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오라버니 뒤 쪽을 조심하세요.”
벽력사 하나가 유곤용을 향해 회심의 일격을 날렸으나, 바닥에 쓰러진 것은 유곤용이 아니라 그 자신이었다.
“이놈들! 내가 약만 파는 장사꾼인줄 알았더냐! 오늘을 위해 그동안 갈고닦은 무예로 네 놈들을 불구덩이에 쳐 넣을 것이다.”
유곤용이 벽력사들을 차례로 제압하자, 전용해는 빈틈을 노려 대문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네 이놈! 게 섰거라.”
유곤용이 용수철처럼 방을 튀어나가려는 순간, 그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이가 있었다.
“야 이 불효막심한 놈아! 이 아비를 속인 것도 모자라. 감히 교주님을 치려해? 날 죽이기 전에는 이 방에서 못 나간다.”
“아버지!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시는 겁니까? 무엇이 아버지의 눈을 가리고 정신을 좀 먹게 한 겁니까!”
“무슨 헛소리냐! 이게 다 너희들을 위한 것이다. 나 혼자 잘 살려고 이러는 게냐? 너는 아비 맘을 모른다. 아비는 그저..... 돈을 좀 더 벌고 싶고 새 세상에서 벼슬 한 자리 얻고 싶었을 뿐이다. 내가 아닌 우리 가족을 위해서!”
“가족을 위하는 것이 자식을 저런 놈에게 넘기는 겁니까?”
그 사이 벽력사들과 전용해는 도주해 버렸고, 방 안에 남은 가족은 서로 다른 허탈함에 각자 천장만 바라볼 뿐이었다.
유곤용의 신고로 백백교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가 이루어졌다. 경찰과 함께 사건 현장을 찾았던 기자는 참담함을 감추지 못했다.
“한 구덩이에서 여덟 구의 시체가 나오기도 했고, 그중에는 갓난아기를 업은 젊은 모녀도 있었다. 여러 구덩이에서 총 40여 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당시 광경은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 백백교의 사건전모가 알려지면 질수록 기자로서의 자신이 없어진다.”
백백교 신자들의 시신이 발견된 곳은 동두천의 폐광 부근이었다. 훗날 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가족단위의 사람들이 산 위로 올라갔고, 비가 오는 날이면 산 위에서 짐승의 것인지 사람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울음소리가 산 아래로 내려왔다고 한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산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내려오는 사람들은 없었다고 한다.
전용해의 지시를 받은 벽력사들은 양주, 연천, 양평,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신자들을 교살 또는 생매장하였고, 발견된 시신만 300구가 넘었다.
“백백교의 간부인 피고 두 사람은 각각 170명과 127명을 죽였다고 인정했습니다. 재판장은 묻고 싶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짓을 저지른 겁니까?”
“대원님이 지시하셔서 그리 한 것 이오. 이게 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소.”
교주 전용해의 가랑이에 눌어붙어 살인도 서슴지 않았던 이들에게는 사형이 구형되었다.
그런데 이 모든 악행의 씨앗이자 뿌리인 전용해는 어디로 갔을까?
“이 시체가 전용해가 맞소?”
“네! 틀림없는 대원입니다. 그리고 저 시계도 평소 대원님이 차고 계시던 시계입니다.”
“산 짐승에 의해 얼굴이 훼손되어서 난 식별이 불가능한데 당신은 어찌 그리 획신하오?”
“제가 명색이 아들입니다. 분명히 아버님이 맞습니다.”
“그럼 왜 자결한 거라 생각하오?”
“아버님. 아니 우리 대원님은 모든 것을 스스로 짊어주시고 잠시 이승을 떠나신 겁니다. 하지만 다른 모습으로 환생하실 것입니다.”
일제 경찰은 야산에서 발견된 시신을 전용해의 것으로 확정 지은 것은 물론이고 자살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DNA 검사가 법의학에 도입된 것은 1990년대의 일이니, 아들의 수상한 증언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날의 시신이 전용해가 아니었더라도 그는 결국에는 사망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백백교의 클리셰는 스마트 시대에도 여전히 유통되고 있다. 나라를 빼앗긴 혼돈의 시대도 아닌데 어째서 사이비 종교는 인간의 마음을 파고드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