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백화점은 푸드코너만 들리고, 김팀장 본인은 셔츠도 아울렛에서 세 번 생각한 후에 카드를 내밀며 살았는데도, 마이너스 통장에 빨간 불이 켜졌다. 어머니가 큰 병치레만 하지 않는다면 아직은 버틸 만 하다고 생각했는데 잔액이 백 만원대로 떨어진 것이다.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빨리 뛰며, 얼굴에 미열이 오르기 시작한다. 작년 연말부터 스트레스를 받으면 나타나기 시작한 증상인데 병원을 가야지 하면서도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거북목을 내밀고 주거래 은행 외 2개의 금융사를 들락거려도 답은 안 나온다. 결국 수익률 15%를 유지하고 있던 펀드를 해약하기로 한다. 취업과 동시에 먹는 거 입는 거 아끼며-다행히 연애는 아끼지 않았다- 펀드와 주식, 채권을 넘나들었다. 10년 안에 10억을 모아 경제적 자유를 이루겠노라며 경제신문을 구독하고 노는 시간을 쪼개 주식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그러나 목돈이 필요한 시기는 올림픽 주기로 도래했고, 장기 투자가 가능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 때쯤 귀신같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차라리 재테크를 하지 않은 것이 더 나은 결과로 이어졌을, 놀랍고도 어쩌면 당연한 결과 앞에 어안이 벙벙해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5대 기업이 포함된 펀드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입한 펀드를 2년 만에 해약하게 되었다.
김팀장은 이런 저런 생각에 쉬이 잠 들지 못한다. 예민한 성격이지만 불면증은 없었다. 그러나 최근 잠드는 시간이 점차 늦어지고, 눈 뜨는 시간은 당겨졌지만 일어나기는 힘겹다. 내일은 그가 출근 다음으로 싫어하는 주간회의가 있는 날이다.
“여보! 회의 걱정 때문에 잠이 안 오는 거야? 따뜻한 우유라도 타줄까?”
“안 그래도 설사 나오는 판에 불난 집에 부채질 해?”
자신을 걱정하는 아내의 마음을 알면서도 말은 마음과 반대로 나온다. 연봉이 1억이 넘는 가정의 이혼율이 현저히 낮다는 신문기사가 떠올라 아내에게 더 미안해진다. 그래도 7년 전 이전 회사의 회의시간보다는 살만하지 않냐 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제는 김팀장도 40대 중반의 나이에 한쪽 귀로 거를만한 이야기는 거를 수 있는 여유 비슷한 것이 생겼지만, 이전 회사의 고전무를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린다.
고전무는 대한민국 ROTC출신중 자부심이 가장 두터운 사람임에 틀림이 없는 인물 이었다.해병대나 특전사부심도 이해를 못하는 판에 ROTC부심이라니, 군대가 그렇게 좋으면 직업군인을 하지 왜 사회를 군대로 만들려고 하는 걸까? 집안 사정으로 서울에 있는 대학 진학 대신 지방의 국립대를 4년 내내 등록금 한 번 안내고 졸업한 그는 열심히만 하면 세상엔 못 할 일이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이었다. 사원으로 입사하여 대기업 임원까지 오른 그는 자신이 걷는 길만이 인생의 유일한 답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50이 넘은 나이에야 첫 실패를 맛보게 되었다. 대기업에서 명퇴를 당한 그는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노력이 부족했거나 그저 운이 없다고 생각했다. 중소기업의 임원으로 오게 된 그는 다시 대기업으로 복귀 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코딱지만 한 회사에서 성과를 내야했다. 그는 나약해빠진 정신 상태로 보잘 것 없는 회사에서 월급만 축내는 직원들을 개조하기로 작정했다. 갈 길은 바쁜데 직원들과 회사 규모를 보면 한숨만 나오고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제가 대기업에서만 근무하다 이 회사를 보니 기본이라는 것조차 없습니다. 직원들이 하고자 하는 의욕도 없고 무엇보다 창의력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젊은 사람들이 오십이 넘은 나 보다 프레시한 생각을 못하고 있어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내가 당신들을 다 뜯어고치고 이끌어 줄 테니까요. 지금은 우리가 비록 업계에서도 한 참 뒤쳐져 있지만, 삼년 안에 업계 1위로 올라설 겁니다. 여러분은 후레시한 컨디션을 유지하고 후레시한 사고로 나를 따라 주기 바랍니다.”
고전무는 시종일관 고압적인 자세로 주간회의를 진행하였고, 후레시한 창의력을 강조하면서도, 직원들의 의견을 고함으로 무마시켰다. 회의에 참석하는 모든 이들은 일요일 개콘이 끝나는 시간부터 신경성 위염에 시달려야 했으며, 아침 8시에 시작하여 10시가 넘어야 끝나는 월요회의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다. 김팀장은 당시 막 과장으로 진급했음에도 불구하고, 후레쉬한 아이디어를 내야한다는 명목으로 기획팀 박 대리와 함께 회의에 참석했었다. 둘은 고전무가 홀수 주에는 박 대리를, 짝수 주에는 김 과장을 타깃으로 삼는 다는 걸 일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둘이 그 주기를 눈치 챘다는 걸 알아챈 고전무는 불규칙적으로 또는 그 날의 기분에 따라 타깃 변경하여 30대의 과장과 대리에게 후레시한 사고와 기획안을 요구했다. 그러나 직원들이 제출하는 아이디어는 언제나 예산과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반려되었다.
김과장과 박대리는 회의가 끝나면 줄담배를 피며 한주가 시작됨을 실감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게 도대체 전시 중 벙커에서 하는 군사회의도 아니고, 이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해야 할 회의인가? 저런 분위기에서 무슨 창의적인 생각이 나온다고. 답답하다 진짜.”
“미친 듯이 소리 지르고 회의 막판에는 꼭 인자한 사람처럼 어르고 달래는 게 더 짜증나지 않냐? 어디서 되도 않는 자기개발서만 읽고 와 가지고는.”
고전무 방의 책장에는 삼국지를 필두로 리더가 읽어야 한다고 언론에 소개된 책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지만, 인문학 책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 삶은 쉬어서는 안 되는 레이스이고, 개선하고 발전해 나가야만 하는 대상 일뿐이다. 임원 중 가장 먼저 출근하고 때때로 사원들보다 늦게 퇴근했으며, 자신처럼 살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경멸의 눈초리로 내려다보았다. 강부장도 양차장도, 김과장도, 박대리도 서주임도 모두 그의 눈에는 패배자이고 뜯어고쳐야 할 개혁의 대상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