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여키로의 산티아고 순례길에도 산티아고 대성당이라는 도착지가 있듯이, 김팀장도 퇴사라는 도착지를 향해 순례길에 매일 오른다. 그의 순례길에는 월급 외에도 커피라는 안식처가 있다. 현대인들은 특히 젊은 세대는 한겨울에도 얼죽아이지만, 그는 정반대로 한여름에도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고집한다. 여기에 한국인들이 힘들어한다는 산미가 강한 원두를 좋아해 회사 앞 커피점의 사장님은 이제 그가 따로 메뉴를 말하지 않아도 쿠폰과 함께 따아를 내민다. 오늘은 마침 손님이 없어 장사는 잘 되는지 이런 가계 오픈하려면 돈이 얼마나 있어야 하는지 딱히 대답이 궁굼 하지도 않는 질문을 던진다. 최근 들어 식당이나 상점에서 이런 저런 질문을 자연스럽게 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나이를 실감하며, 나이 들수록 말수는 줄이고 지갑은 열라는 말을 떠올리며 서둘러 커피를 들고 나온다. 커피를 들고 사무실로 향하는 동안은 짧은 설렘을 느낀다. 업무 시작 전 책상에 앉아 커피를 들이키는 시간만큼은 노예가 아닌 자유의지로 살아간다는 착각이 든다. 커피가 없이 시작되는 아침은 이제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중독은 아닌 것이 주말에는 커피 생각이 딱히 나지 않는다.
사무실에 들어오니 송과장이 오늘 회의 자료를 출력하며 말을 덧붙인다.
“팀장님. 오늘은 제발 회의시간에 인력충원 좀 건의해 주세요. 제가 우리 회사 막내들 중에 압도적으로 제일 늙었어요. 팀장님이 아쉬운 소리 하시는 거 싫어하시는 건 아는데, 7층 신사업부는 우리보다 이익률이 더 높은 것도 아닌데 이번에 대리급 경력직 또 뽑은 거 알고 계시죠?”
김팀장도 막내 대리가 육개월 전 퇴사 후, 인력충원을 지속적으로 요청했으나 계속적으로 반려되었다. 그러나 사장의 골프멤버인 신사업부는 지난 주에도 인력을 보충했고 이데 송과장이 인력보충의 필요성을 역설한 품의서까지 준비를 한 것이다.
“일이 힘드니? 물품 구입이나 전표 치는 거 나랑 격월로 나눠서 하자.”
“아 팀장님! 진짜 저만 나쁜 새끼 만드실 거 에요? 팀장님은 왜 회사만 오면 의기소침해지세요? 여기가 무슨 군대에요? 군대도 전시 같은 긴급 상황아니면 상관에게 이의를 제기해야 듣는 척이라도 해줘요. 회사는 절대 알아서 안 해줘요! 짖어야 돌아보고 챙겨준다니까요. 혹시 막 착한 자식 콤플렉스 이런 거 있어요? 자식이라고 무조건 부모에게 효도해야 된다는 이상한 압박감이 회사까지 이어진 거 아니에요?”
“거참! 아침부터 잔소리 더럽게 기내. 알았다고.”
김팀장은 월요회의를 위해 금요회의를 하고, 금요회의를 위해 목요일에 준비를 해야 하는 걸 납득할 수가 없다. 개선점이나 매출을 올리기 위한 아이디어를 논의하는 대신 회의 자료의 줄 간격과 글자크기에 대해 지시를 받는 상황에서 거듭 반려되는 인력충원안건을 꺼내고 싶지 않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황 본부장 방으로 들어선다. 황 본부장은 고 전무와 달리 소리를 지르는 대신 저급한 인격의 밑천을 드러내며 사람을 옥죄인다. 황은 영업부서 사원에서 시작해 쉰이 되지 않은 나이에 본부장에 올랐다.
“문제가 머라고 생각해? 내 생각엔 말이야. 여기 앉아 있는 팀장들 포함해서 회사에 쓸 만한 애들이 없어서 그런 거 같은데. 어떻게들 생각해?”
본부장 기준의 쓸 만한 애들은 높지도 않은 연봉이 몇 년째 동결된 회사에 입사를 하지 않는다. 약초를 알아보는 사람 눈에는 천지가 약초이고, 그런 눈을 가지지 못한 자의 눈에는 밭에 잡초만 보이는 법이다. 그래서 리더는 약초를 알아보는 눈을 길러야 한다. 모든 인간은 반드시 그 쓸모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