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의 떨림 Jan 27. 2022

유원 + 그림책

-  두려움 속에서 한 발 나아가기


1.


  아직도 오래된 그 벽이 떠오릅니다. 군데군데 누런 얼룩이 묻어 있고, 페인트로 덧칠한 자국이 선명하던 그 하얀색 벽이요. 그때 저는 예닐곱 살이었고, 분홍색 바구니에 든 소꿉놀이 세트를 어떻게든 외면하려 벽만 쳐다봤죠. 눈에 고여 있는 눈물도 숨겨야 했어요.


  엄마의 손에 든 그 장난감은 슬프게도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옆집에 사는 친구에게 줄 생일 선물이었죠. 엄마는 그 아이에게 줄 소꿉놀이 세트를 사면서 딸이 마음에 걸렸는지 제 것도 하나 사긴 했어요. 소꿉놀이 세트에 비해 가격이 훨씬 싸고, 색깔과 모양이 전혀 예쁘지 않은, 블록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몇 개의 덩어리들이었죠. 싸구려 투명 비닐에 담겨 있는 그것은 분홍색 예쁜 바구니에 든 소꿉놀이 세트와 너무 비교가 되더라고요. 내가 갖고 싶은 건 분홍색 바구니에 든 소꿉놀이 세트니까 이걸로 사 줘, 라는 문장이 머릿속에서 휘몰아쳤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더군요. 어차피 안 될 텐데, 라는 포기와 돈이 없는 엄마한테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너무 지배적이라 시도조차 할 수 없었지요.


  언제부터 욕구를 요구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는지,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좌절을 경험하면서부터 그렇게 된 건지,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말에 세뇌당할 때부터인지 알 수 없어요. 엄마가 사 준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입었고, 갖고 싶은 것이 있어도 꾹 참았어요. 맏딸은 그러면 안 된다는 당부와 경고를 듣고 싶지 않아서, 네가 너무 예민하고 유별나다는 비난을 견디기 싫어서, 거절당하고 실패하는 게 겁이 나서 시작조차 하지 않았죠. 진심을 숨기는 게 익숙해져서일까요.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으면서 막상 상대가 제 마음을 알아주면 그게 아니라고 부정하더라고요. 솔직하게 제 마음을 바라보고, 표현하는 게 왜 그렇게 어렵던지요.



2.


  소설 『유원』은 이런 제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부모를 위한다는 이유로 자기의 속마음을 숨기는 주인공 원이에게서도, 그 정도 했으면 충분하고도 넘치는데 아저씨를 끊어내지 못하는 원이의 부모에게서도, 타인의 고통을 가십 거리로 삼으면서 더 캐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제 모습이 보였지요. 아니라고 믿고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무례하고, 피곤하고, 집요한 아저씨일 수도 요.


  고등학교 2학년인 유원은 은정동 화재 사건의 생존자입니다. '이불 아기'로 화재가 되었죠. 12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은 원이를 궁금해하고, 멋대로 판단하고, 함부로 동정합니다. 당시 12층에 살던 할아버지가 피우던 담배꽁초는 11층이던 원이네 베란다로 들어왔습니다. 불씨가 살아있던 담배꽁초는 11층과 14층을 전소시켰고, 열 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불이 나던 날, 기사식당을 운영하는 부모님은 일을 하러 갔고, 집에는 여섯 살이던 원이와 열일곱 살인 예정이가 있었습니다. 원이라는 이름을 직접 지어줄 정도로 동생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예정이는 불길이 거세지자 젖은 이불에 원이를 둘둘 말아 아래로 던졌습니다. 화재 사건 이후 두 명의 시민 영웅이 탄생했습니다. 한 명은 동생을 살린 후 죽음을 맞이한 십칠 세 소녀 예정이었고, 한 명은 온몸으로 여섯 살 아이를 받아낸 사십 대 가장이었죠. 11층에서 떨어진 아이를 받고 뇌진탕으로 의식을 잃은 아저씨는 골절상, 타박상, 찰과상을 입었습니다. 산산조각 난 오른쪽 다리뼈는 끝내 원래대로 회복하지 못했지요. 아저씨는 언니의 생일이 되면 원이네 방문합니다. 생명의 은인이라는 이유로 원이 부모에게 돈을 요구하기 위해서죠. 원이는 자기를 구해준 아저씨를 미워하는 감정에 죄책감을 느끼고, 아저씨에게 쩔쩔매는 부모가 안쓰러우면서 답답합니다. 원이는 뭐든지 다 잘했고, 성격까지 좋았던 언니를 대신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책임감으로 힘들어합니다. 그런 원이가 수현이라는 친구를 만나면서 자신의 진심을 표현해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원이는 높은 곳에 서기 위해 용기를 냅니다.


 

3.



진실이란 두려운 거라서 사람들은 차라리 진실을 보고 싶어 하지 않거든요.

  『유원』의 원이와 『유리 소녀』의 지젤은 불특정 다수에게 지나친 관심을 받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원이는 '11층 이불 아기'로 불리며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람들의 시선과 궁금증을 견뎌야 했습니다. 온몸이 투명해서 머릿속 생각마저 잘 보이는 지젤은 사람들의 비난을 감당해야 했지요.



  그날 이후, 이전에 나를 몰랐던 사람들조차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나를 위로하고 축복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웃을 때면 생전 처음 보는 풍경처럼 낯설어하고 약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행복을 바랐다면서도 막상 멀쩡한 나를 볼 때면 워낙 뜻밖이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듯 당황했다.

- 유원 -


그런데 정말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가 궁금해서 글을 올린 걸까? 내가 어떤 결함을 안고 사는지, 그 성장 과정이 얼마나 다사다난한지 궁금해서는 아닐까?
  십이 년 전 기사에는 ‘희망’이나 ‘기적’이나 빛‘ 같은 단어들이 자주 등장한다. 세계 전체에 희박한 것들을 굳이 내게서 찾으려는 시도가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 유원 -

  


  유리 소녀 지젤을 본 사람들은 투명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과 질문을 쏟아냅니다. 유리 소녀는 이 모든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지젤이 걱정하고 마음 쓰는 일은 따로 있지요. 유리 소녀는 너무나 투명해서 생각하는 모든 게 훤히 드러납니다. 유리 소녀의 머릿속을 보기만 해도 그녀가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다 알 수 있지요. 유리 소녀는 나쁜 생각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에 빠질 때면 유리 소녀의 손톱이나 다리에는 금세 금이 갑니다. 사람들은 그런 생각은 드러내지 말라고 비난하고 꾸짖습니다. 더는 견딜 수 없었던 지젤은 집을 떠나 이 도시 저 도시,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닙니다.  


  절판된 후 『유리 아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간한 책은 『유리 소녀』와 결말이 다릅니다. 집으로 돌아간 유리 아이는 유리 소녀보다 더 확고하게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려 하죠. 아이가 자신을 수용하고자 하는 장면은 무척 인상적입니다. 두려움을 이기고 진실에 다가서려 용기를 내는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투명하고, 빛납니다.


  유리 아이의 변화만큼 사람들의 이중성도 오래 남습니다. 소녀에게 감탄을 하다가도 자기들의 기대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매정하게 돌변하는 그들이 무섭더라고요. 더 무서운 건 그들과 제가 다르지 않다는 거죠. 있는 그대로의 저를 드러내면 안 되듯이 타인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도 인정하지 않는 제 모습이 겹쳤습니다. 아닌 척하면서 궁금증을 해결하려 하고, 위하는 척하면서 제 욕심대로 상대를 휘두르려 했던 그날이 참 부끄럽네요.


                                                                                                                                                                  

  학기 초. 새로운 교실, 낯선 환경, 예민한 친구들에 적응하려 덩달아 예민해져 있을 때 반 애들은 나 정도야 미리 대비해 놓고 있었다는 듯 다가왔다. 내가 그 애들을 알기 이전에 모두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 혹은 잘 알고 있다고 믿는 듯했다 -. 어쩐 일인지 모두가 내게 익숙해 보였고 다정했다. 학년을 올라갈 때마다 느꼈다. 그래서 부담스러웠냐고 묻는다면…… 부담스럽기야 했지만 어느 정도 혜택을 받았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겠다.   
(중략)
  그래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 사건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를 당혹스럽게 하는 건 거의 어른들이었다. 그들은 내게 궁금한 것들을 걱정을 가장해 물어 오곤 했는데 모범적인 내 대답을 들은 후에는,
  "그래도 잘 컸네."
  그런 말을 칭찬이랍시고 내뱉곤 했다. '그래도' 속에 숨겨진 의미는 '그래, 그런 일을 겪은 것치고 이만하면 하자가 없는 편이지' 정도일 것이다.

- 유원 -




미움은 계속 자랐어.
점점 커지고 힘도 세졌어.
드디어 내 마음이 미움으로 가득 찼어
 
  “언니, 나는 율이가 좋아. 왜냐하면 내 지인 중에 우리 언니를 모르는 사람은 율이밖에 없으니까.”
  (중략)
  “그래서 안심하고 율이를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아."
  (중략)
  “그러니까 이건, 내가 지금까지 마음 놓고 언니를 좋아한 적이 없다는 뜻도 되는 거야. 나는 맨날 불안했어. 언니가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보고 있다는 걸 아니까.”

- 유원 -



  원이는 자신이 언니가 선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품이자, 이미 끝난 언니의 삶을 연장시키며 보조하는 존재라 생각합니다. 엄마가 언니가 받은 상장과 트로피가 전부 타버렸다는 말을 할 때면 부담감을 느껴 피아노 콩쿠르, 백일장, 사생 대회 등 나갈 수 있는 대회는 최대한 나가려 합니다. 언니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언니를 칭찬할 때면 자기 빼고 모든 사람들이 큰 손해를 입었다는 생각에 어디론가 숨고 싶어 지지요. 언니의 친구인 신아 언니가 낳은 아기만이 원이의 지인 중 유일하게 언니를 모릅니다. 그렇기에 안심하고 좋아할 수 있습니다.


  언니의 생일 때마다 찾아와 돈을 요구하는 아저씨와 그런 아저씨의 비위를 맞추려 애쓰는 부모를 볼 때면 원이는 자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원이는 자기를 살린 언니가 싫고, 자신을 구해준 아저씨에게는 증오를 느낍니다. 아저씨의 딸인 수현이가 의도적으로 자기에게 접근했다고 오해하고, 자기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눈치를 보는 엄마와 아빠에게 화가 납니다. 누구보다 원이는 자기 자신이 싫습니다. 미움과 혐오에 죄책감이 뒤엉킬 때면 고마움을 모르는 자신에게 분노가 생기지요.



  ‘원이, 아저씨랑 약속했잖아.’
  아저씨가 내 주변을 맴돌며 우리를 착취하는 방식은 누군가에게 전수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특출하다. 그 근면함과 성의를 보면 아저씨의 마음을 함부로 무시할 수 없게 된다. 끈기와 집요함은 어느 옛날 영화에서 본 섬뜩한 모성과도 닮은 것 같다. 아저씨는 나를 온몸으로 받아 낸 이후에, 나라는 존재에게 그런 모성이 생긴 건지도 모른다고 한때는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아저씨의 의도를 가늠하려고 노력한다. 일부러 괴롭히는 것 같기도, 점진적으로 복수하는 과정 같기도 하다.  
  나는 왜 아저씨의 냄새에 예민해지고, 아저씨의 말투와 사소한 습관을 판단하는지, 나는 왜 당연히 고마워해야 할 대상에게 사나운 마음을 갖는지.

- 유원 -

 


  『미움』의 주인공 아이는 친구에게 "너 같은 거 꼴도 보기 싫어!"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때부터 아이는 그 말을 한 친구를 미워하기로 합니다. 밥을 먹으면서 미워하고, 숙제를 하면서 미워하고, 신나게 놀면서도 미워합니다. 뭘 해도 '꼴도 보기 싫다'는 목소리와 그 말을 하는 얼굴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목욕을 할 때에도, 잠을 잘 때에도, 꿈에서도 계속 나타나 아이를 괴롭히지요. 미움은 계속 자라고, 커지고, 강해져 아이는 그 감정에 갇히게 됩니다.


  너무나 좋아했던 친구를 미워한 적이 있습니다. 쌓이고 쌓였던 자잘한 서운함이 사건 하나로 거대해졌지요. 『미움』의 주인공 아이처럼 뭘 해도 그 친구가 떠올랐습니다. 아니, 뭘 해도 그 친구가 사라지지 않았죠. 섭섭했던 날들이 갈수록 선명해졌고, 그날의 말들이 비수가 되어 심장에 꽂혔어요. 차라리 미워만 했으면 나았을 텐데 여기에 고마움과 미안함과 죄책감이 뒤엉켰습니다. 그 때문에 시작은 친구에 대한 미움이었지만 마무리는 저에 대한 증오였지요. 미움받을 용기만큼 미워할 수 있는 권리도 필요한 건데 왜 그러면 안 된다고 저를 다그치기만 했을까요. 미운 건 미워하고, 고마운 건 고마워하고, 미안한 건 미안해하면 되는데 왜 그것들을 하나로 뭉쳐 혼란에 혼돈을 더했을까요. 마음으로는 얼마든지 미워해도 됐는데 왜 그것조차 허용하지 못해 스스로에게 벌을 주었나 몰라요. 참지 말아야 할 것을 참은 결과는 틀어진 관계와 후회뿐이더라고요. 죄책감 없이 실컷 미워했다면 용서를 했든, 화해를 했든, 사과를 했든, 성찰을 했든 했을 텐데요. 관계가 끝났다 하더라도 후회보다는 후련함이 더 강했겠죠. 충분히 미워한 후에 저를 돌아보았다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지나치게 무거운 돌을 짊어지지도, 필요 없는 돌을 갖고 다니지도 않았을 거고요.

    



돌을 갖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야.
우리 각자가 내려야 할 결정이지.

  『돌을 갖고 다니는 사람들』의 페드리뉴는 사람들이 평생 돌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 마을의 아기들은 태어나면 돌이 담긴 작은 주머니를 받았고, 그 돌을 소중히 여기며 자랐죠. 그러던 어느 날, 페드리뉴는 돌 없이도 즐겁게 뛰어다니는 소녀를 봅니다. 돌의 무게와 양 때문에 힘겨워도, 날카로운 돌조각 모서리에 다쳐도 사람들은 그것을 놓지 못하는데 돌 없이도 행복해하는 소녀가 이상했죠. 심지어 누군가는 자기 것이 아닌 돌까지 갖고 다니는데 말이에요. 페드리뉴는 사람들이 왜 돌을 갖고 다니는지 궁금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답을 얻지 못한 페드리뉴는 채석장을 찾아가 지혜로운 페드로소를 만납니다. 그는 돌은 우리가 살면서 겪는 스트레스, 걱정, 두려움, 슬픔과 같은 것이라며 그것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얘. 너 그러면 안 돼. 그러면 안 돼 너는.”
(중략)
  그 눈빛 안에, 네가 다른 애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자라려고 하면 될 것 같냐는 말이 숨어 있다고 느꼈다.

- 유원 -


  나는 더 나태하게 살아도 됐을 것이다.
  사고가 없었다면.
  나태하게 살면서도 죄책감을 덜 느꼈을 것이다. 실수를 두세 번 반복해도 초조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자꾸만 무언가에 쫓긴다는 느낌이 들었다.

- 유원 -      



  화재 사건은 원이에게 가장 무거운 돌입니다. 그 사고로 원이는 가족을 잃은 슬픔, 언니를 대신해야 한다는 부담감, 부모님에 대한 안쓰러움, 아저씨에 대한 미움과 죄책감, 사람들의 과도한 관심 등을 견뎌야 합니다. 마음껏 웃을 수도, 누군가를 안심하고 좋아할 수도, 나태하게 살 수도 없습니다. 원이는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 예민해지고, 그들의 시선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십 대 청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돌이 너무 무겁고, 또 너무 많지요. 원이는 어떤 돌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날카로운 모서리를 어떻게 다듬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원이가 수현과 정현 남매를 만나면서 달라집니다. 모두가 각자의 돌을 갖고 있고,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음을 깨닫죠. 원이는 제 몫의 무게만 감당하기 위해 아저씨에게도,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신아 언니에게도 참기만 했던 진심을 꺼냅니다.  


  돌이 무겁고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돌을 더 끌어안을 때가 있습니다. 페드리뉴가 마을 사람들에게 돌을 기부해 달라고 했을 때, 그들은 몸의 일부라며 꺼려했습니다. 그들처럼 스트레스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그것을 불신하거나, 자신이 없다며 웅크리거나, 익숙한 방식에 젖어 무기력해질 때가 있죠. 돌을 없앨 수는 없지만 과도하게 짊어질 필요는 없습니다. 내 몫이 아닌 돌까지 줍고 다니지는 않은지, 모서리를 더 뾰족하고 날카롭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다른 사람에게 주어서는 안 되는 돌을 그의 머리에 얹어주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되네요. 페두리뉴처럼 사람들의 돌을 덜어주지는 못해도 제 돌이 넘친다고 떠넘기지는 말아야 할 텐데요.



  “너보고 언니 몫까지 행복하라고 하지? 두 배로 열심히 살라고, 그런 말 안 해?”
  “해.”
  “적당히 행복하기도 힘든데, 어떻게 두 배나 행복하게 살라는 거야.”

- 유원 -

   

  “수현이가 그렇게 사는 법을 알려 줬어요.”
  수현의 이름을 꺼내자 아저씨가 이마를 찌푸렸다.
  “그때, 제가 너무 무거웠죠. 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다리가 으스러진 거잖아요. 죄송해요. 제가 무거워서, 아저씨를 다치게 해서, 불행하게 해서.”
  “너…….”
  “그런데 아저씨가 지금 저한테 그래요. 아저씨가 너무 무거워서 감당하기 힘들어요.”
  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아저씨는 저런 눈을 하고 있구나. 목소리만큼 크고 위협적이지 않았다. 누렇고 흐리멍덩해 보였다. 아주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한 것 같았다.

- 유원 -


 

4.


  어떤 문제 앞에서는 욕구를 외면한 채 벽만 쳐다보는 예닐곱 살의 아이가 됩니다.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알아주길 바라다가도, 타인이 저를 부정적으로 볼까 봐 진심을 포장하고 숨기려 하지요. 괜한 죄책감에 분노를 얹고, 미움을 쌓으며, 기어코 무거운 돌을 잡으려고도 합니다.


  그래도 다행히 수많은 경험과 학습으로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번 소꿉놀이 세트를 외면하려 하지는 않아요. 가끔은 할 수 없다고 여긴 일을 하,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 두려움 앞에 다가서기도 합니다. 아직도 그날의 어린아이가 불쑥불쑥 튀어나오지만 그때처럼 벽만 쳐다보지는 않으려 해요. 못 한다는 생각 때문에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어떤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할 수 있더라고요. 예상외로 용감할 때도 있답니다, 놀랍게도요.



  높은 곳에 서려면 언제나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옥상에서 아래를 볼 때 느끼는 감정을 단순하게 불안함과 공포라고 여겼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식은땀이 나는 건 잠재의식 속에 사고에 대한 감각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기절이라도 할까 봐 지레 겁먹고 놀이 기구는 엄두도 못 냈다. 그러나 이곳에 서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이런 걸 무서워하지 않는구나. 나는 오히려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이곳에서 느끼는 감정은 설렘과 기대감, 혹은 전율이라고 불러야 마땅했다.  

- 유원 -





* 유원, 백온유 지음, 창비 펴냄

* 유리 소녀,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지음, 윤정임 옮김, 베틀.북 펴냄

* 유리 아이,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지음, 최혜진 옮김, 이마주 펴냄

* 미움, 조원희 지음, 만만한책방 펴냄

* 돌을 갖고 다니는 사람들, 산드라 블랑코 글, 엘마 그림, 강민경 옮김, 삼성당 펴냄





매거진의 이전글 쫌 이상한 사람이 많은 세상을 꿈꾸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