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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 떨림 Jun 18. 2022

진실을 향한 용기

- 『동물농장』& 그림책



진실은 있다 VS 진실은 없다 



  꽤 오래전, 썸을 타던 친구와 소주를 연거푸 마시면서 새벽 3시까지 같은 주제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친구는 진실은 없다며 냉소에 슬픔이 섞인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고, 저는 진실은 있다면서 목소리를 높였지요. 친구는 제게 순진하다며 혀를 끌끌 찼고, 저는 '순진'이라는 단어에 발끈해서 진실을 외면하는 친구를 비난했습니다.


  사람들은 진실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고 보려 하지 않는다,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왜곡하고 은폐한다, 많은 이들은 그렇게 변형된 진실이 진실인 줄 착각한다, 그렇기에 이미 진실은 진실이라는 기능을 상실한 채 변질된 모습으로 드러나 있는 거다, 그 외 등등등 진실이 없다는 친구의 근거는 이러했습니다.   


  왜곡하고 은폐하는 건 그것이 있기에 가능하다, 진실이 있기에 목숨을 걸고 그것을 알리고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진실이 없다는 거짓을 진실로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거짓 속에서 진실을 찾아야 한다 등등이 제가 한 말이었고요.


  우리는 똑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같은 얘기를 다른 단어와 문장으로 내뱉으면서, 수많은 비유와 예시를 날려 보내며 새벽을 보냈습니다. 결론은 나지 않았습니다. 네가 옳으면 좋겠다, 라며 씁쓸하게 웃는 친구에게 내가 옳아, 라며 어깨를 으쓱한 후부터 더는 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죠.


  친구와는 헤어진 지 오래지만,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날 새벽까지 이어지던 진실 논쟁은 가끔씩 생각납니다. 그때는 진실이 없다는 친구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지금은 그의 말이 옳은 건 아닌지 불안합니다. 진실은 진실한 사람에게만 통한다고 하는데 진정 진실한 사람이 없거나, 그들이 너무 소수라서 힘을 낼 수 없거나, 진실을 묻어버리고자 하는 강력한 힘 앞에서 모두 나약해진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무엇보다 저 역시 두려움과 이기심으로 진실을 외면할 때가 많으니 부끄럽기만 하네요.



동물에 빗댄 인간 군상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하지만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보다 더욱 평등하다.

- 동물농장 -

  

영국의 언론인이면서 작가인 조지 오웰(1903. 6. 25 ~1950. 1. 21)의 소설『동물농장』에는 거짓을 진실로 만드는 동물이 나옵니다. 진실을 알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두려움 때문에, 희망이 보이지 않기에 모르는 체하는 동물도 있지요. 그리고 거짓이 진실이라 믿는 동물도 있습니다. 스탈린 시대의 소련을 비판한 『동물농장』은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잡은 특권층의 잔혹함과 독재에 길들여지는 대중들의 모습을 우화 형식으로 풍자하고 있습니다. 소설 속 캐릭터가 실제로 누구를 지목하는지, 어떤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지요.  


  『동물농장』의 배경은 메이너 농장입니다. 이곳에는 돼지, 개, 말, 염소, 당나귀, 고양이, 닭, 오리 등이 살고 있습니다. 농장에서 가장 존경받는 수퇘지 메이저 영감은 인간들이 빼앗은 자유와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당부합니다. 인간의 잔인한 횡포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면서 간절함을 담아 이야기하죠. 그리고 사흘 후, 메이저 영감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메이너 농장의 동물들은 비밀스럽게 봉기를 준비합니다. 사실 언제 봉기가 일어날지, 살아생전에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봉기를 준비하는 게 자신들의 의무라 생각하지요. 다른 동물들을 가르치고 조직하는 일은 돼지들이 맡았습니다. 동물들 중 돼지가 가장 영리하다고 인정받고 있으니까요. 그중 가장 뛰어난 돼지는 스노볼과 나폴레옹입니다. 나폴레옹은 메이너 농장에서 유일한 버크셔 종의 수퇘지입니다. 말솜씨는 뛰어나지 않지만 한 번 마음먹은 것은 그대로 추진합니다. 스노볼은 나폴레옹보다 더 쾌활하고 말도 잘하고 창의력도 풍부합니다. 대신 나폴레옹처럼 옹골찬 성격은 없다고 해요. 그 밖의 다른 수퇘지들은 모두 식용 돼지입니다. 그중 가장 소문난 돼지가 스퀼러입니다. 스퀼러는 목소리가 날카롭고, 빈틈없이 행동하고, 무척 뛰어난 말솜씨를 갖고 있습니다. 이 세 돼지들이 메이저 영감의 가르침에 '동물 주의'라는 이름을 붙여 정리합니다.  


  메이너 농장의 주인은 존스입니다. 동물들에게 가혹하지만 능력이 뛰어나죠. 그런데 소송 사건으로 돈을 잃은 후부터는 예전 같지 않습니다. 그는 매일 술에 취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이러니 일꾼들도 게을러졌죠. 그날도 존스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셨습니다. 그 때문에 동물들은 하루 종일 굶주리고 있습니다. 더는 참지 못한 암소 한 마리가 뿔로 곳간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동물들이 곡물 상자에 머리를 들이대고 정신없이 먹습니다. 그런 동물들에게 존스와 일꾼들이 채찍을 휘두릅니다. 이제 동물들도 참을 수 없습니다. 동물들이 덤벼들자 인간들이 놀라 도망갑니다. 인간을 쫓아낸 동물들은 자기들을 억압했던 존스의 흔적을 지우고, '메이저 농장''동물농장'으로 바꿉니다. 존스의 자식들이 쓰다가 버린 낡은 철자법 교본으로 읽기와 쓰기를 배운 돼지들은 일곱 가지 계명을 만들어 동물들에게 널리 알립니다.



칠계명

1. 두 다리로 걷는 자는 누구든지 적이다.

2. 네 다리로 걷거나 날개를 가진 자는 모두 우리의 친구다.

3. 어떤 동물도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4.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

5. 어떤 동물도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

6.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

7.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 동물농장 -



  이제 동물들은 돼지들의 지휘와 감독 아래에서 일을 합니다. 돼지들은 지식이 뛰어나고, 매우 영리하니 이들이 지도권을 갖게 되죠. 동물들은 존스와 일꾼들이 있을 때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능률적으로 일합니다. 주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일을 하기에 자발적이고 행복합니다. 돼지를 중심으로 동물들은 매주 게양식을 하고, 총회를 열고, 다음 주에 할 작업을 계획하고, 각종 결의안을 제출해서 토론하고 통과시킵니다. 메이저 영감이 투쟁을 당부하면서 불렀던 <영국의 동물들>을 제창하는 것으로 총회는 끝납니다.  



  영국의 동물들이여 아일랜드의 동물들이여
  온 세상 방방곡곡의 동물들이여
  좋은 소식에 귀를 기울여라
  황금빛 미래의 즐거운 소식을

  멀지 않아 그날이 올지니
  독재자 인간을 뒤집어엎고
  풍요한 영국의 들판에는
  오직 동물들만 활보하리라

  코에서는 굴레가 사라지고
  등에서는 멍에가 벗겨지리라
  재갈과 박차는 영원히 녹슬고
  무자비한 채찍은 이제 더 이상 소리 내지 못하리라


- 동물농장 -



  거짓을 진실로 만드는 이들



  인간을 몰아낸 후 동물들은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 여겼습니다. 공평한 세상에서 자유와 권리를 누릴 수 있다고 믿었고, 더는 누구도 자신들을 위협하지 않을 거라 신했죠. 하지만 상황은 점점 이상하게 흘러갑니다. 혁명의 중심이 된 돼지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누리기 위해 교묘하게 거짓말을 합니다. 라이벌인 스노볼을 쫓아낸 나폴레옹은 독재자가 되어 자기 마음대로 동물들을 이용하고, 나폴레옹을 대변하는 스퀼러는 거짓말로 동물들을 선동합니다. 돼지들은 자기들에게 맞서거나 도움이 되지 않는 동물들을 위협하고, 제거하지요.

  

  노동의 강도는 점점 혹독해지고, 식량이 부족해서 언제나 배가 고프지만 동물들은 존스가 있던 시절보다 낫다며 위안합니다. 돼지들은 인간들이 다시 돌아올까 봐 불안에 떠는 동물들의 심리를 이용해 거짓말과 독재를 계속하고요. 칠계명은 계속 돼지들에게 유리하게 수정되는데도 대다수의 동물들은 나폴레옹과 스퀼러를 의심하지 않고 그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뭔가 이상하긴 한데 그게 뭔지 모르겠고, 오랫동안 깊이 생각할 수도 없고, 잘못을 알아도 함부로 나설 수가 없습니다. 많은 동물들은 용감하거나 영리하지 못하고, 나폴레옹은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고, 스퀼러는 검은 것도 흰 것으로 바꿀 수 있는 뛰어난 말솜씨를 갖고 있으니 안타깝게도 당연한 일이죠.

  


  "에, 여러분들은 우리 돼지들이 이기주의나 특권 의식에서 그렇게 하였다고는 생각하지는 않겠지요? 우리들의 대부분은 사실 우유와 사과를 좋아하지는 않아요. 나 자신도 그것들을 싫어해요. 그런 것들을 우리가 먹고 있는 이유는 우리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섭니다. 우유와 사과는 돼지의 건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영양분을 함유하고 있어요. 우리 돼지들은 한결같이 두뇌 근로자들입니다. 이 농장의 경영과 조직이 모두 우리에게 달려 있어요. 밤낮으로 우리는 여러분의 안녕을 지키기 위해 고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결국 우리가 그 우유를 마시고 그 사과를 먹는 것은 바로 당신들을 위한 것이지요."
  " ……"
  "에, 또다시 말하지만 여러분의 안녕을 위해서 우리 돼지들이 임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존스가 돌아옵니다. 그렇죠, 지난날 우리를 핍박했던 인간 존스가 돌아와요. 틀림없어요. 동무들."

- 동물농장 -




팩트는 팩트야. 누가 뭐래도
사실은 사실이니까!

- 아주 작고 슬픈 FACT -


  『아주 작고 슬픈 FACT』라는 제목이 말해주듯이 '사실 혹은 진실'이라 불리는 팩트는 아주아주 작아서 슬플 때가 많습니다. 팩트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걸핏하면 팩트를 비웃으며 너도 가짜가 아니냐며 손가락질을 합니다. 팩트 옆을 슥슥 지나가는 사람들도 참 많고요. 어느 날, 낯선 사람들이 팩트를 찾아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라며 무섭게 윽박지릅니다. 그럴 수 없다고 하자 사람들이 팩트를 커다란 상자에 가둡니다. 그 상자 안에는 팩트들이 아주 많이 갇혀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 상자 밖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가짜를 만들어 퍼트립니다. 가짜들은  자기가 팩트라고 우기면서 쑥쑥 자라고 있지요.


  『동물농장』에서 팩트를 상자에 가두고, 가짜를 팩트로 만드는 핵심 동물이 스퀼러입니다. 그는 교활하고 교묘한 언어로 조작을 일삼습니다. 존스가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며 동물들의 공포심을 자극하고, 처음 만들었던 칠계명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수정합니다. 나폴레옹과 라이벌이었던 스노볼이 존스의 비밀 정보원이었다고 조작을 하고, 스노볼이 주장한 풍차 건립이 원래는 나폴레옹의 계획이었다고 하는가 하면, 문제가 생길 때마다 스노볼의 짓이라며 자기들의 무능과 부패를 덮습니다. 여기에 양들은 권력층이 만든 구호를 반복해서 외치면서 독재의 횡포를 정당화하고, 미니머스는 나폴레옹을 찬양하는 시를 짓습니다. 이들은 모두 나폴레옹을 신격화하면서 독재를 더 견고하게 만듭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동물농장』은 진짜 동물들의 이야기도, 스탈린 시대의 소련의 이야기만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가짜 뉴스는 너무나 많고, 많은 이들이 무엇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단하지 않은 채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으려 합니다. 이익을 위해서, 두려워서, 무관심과 냉소로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을 선택하지요.


  매번 진실할 수는 없고, 때로는 거짓말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악의적인 거짓말이 이 땅의 선량한 사람들을 짓밟게 둘 수는 없습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진실하며, 거짓을 알아보는 능력이 어느 정도일까요? 혹시 날조된 사실을 진짜라 착각하며 팩트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있는 건 아닌지요.  



거짓을 진실이라 믿는 이들




알겠니? 문제는 털 색깔이 아니었어.
고양이는 고양이라서 문제였던 거야.

- 생쥐 나라 고양이 국회 -


  『생쥐 나라 고양이 국회』를 보면 속이는 자가 나쁜 건지, 속는 자가 나쁜 건지 헷갈립니다.


  생쥐들은 4년마다 투표를 통해 우두머리를 결정합니다. 투표로 뽑힌 우두머리들은 죄다 투실투실하고 피둥피둥하고 시커먼 고양이들입니다. 고양이들은 하나같이 좋은 법을 만듭니다. 생쥐들을 위한 법이 아닌 고양이들에게만 좋은 법이지요. 예를 들면 쥐구멍은 반드시 고양이가 발을 쑥 집어넣을 수 있을 만큼 커야 한다거나, 생쥐가 너무 빨리 달리면 안 된다거나 하는 법이에요. 더는 참을 수 없게 된 생쥐들이 뭐라도 해야 한다며 투표장으로 몰려갑니다. 더는 검은 고양이를 뽑으면 안 된다고 자각한 그들이 뽑은 우두머리는 흰 고양이네요. 하지만 흰 고양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쥐들은 흰 고양이는 물러나야 한다며 다시 검은 고양이를 뽑고, 그러다가 다시 흰 고양이를 뽑고, 이 둘을 반반 섞어서 뽑다가, 얼룩 고양이도 뽑아 봅니다. 문제는 고양이의 색깔이 아니라 고양이 그 자체인데 말이죠.  


  『생쥐 나라의 고양이 국회』를 보고 있자면 고양이들보다 생쥐들에게 더 화가 납니다. 두 번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지만 반복해서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면 속이는 자가 나쁜 건지, 속는 자가 나쁜 건지 헷갈립니다. 『동물농장』의 동물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해서 돼지들에게 당하는 그들이 애처롭다가도 어리석고 우둔한 동물들이 미워집니다. 특히 복서에게는 존경심과 애처로움과 답답함과 분노가 뒤엉키지요.


  복서는 마차를 끄는 말입니다. 덩치가 크고, 힘이 무척 세고, 마음이 참 여립니다. 복서는 똑똑하지는 못하지만 착실하고 착해서 널리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복서는 '내가 좀 더 일하지'라는 좌우명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거기에 '나폴레옹은 항상 옳다'라는 격언을 추가하여 자신의 의심을 단숨에 없애 버리죠. 매 순간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일하고, 싸우는 복서를 동물들은 신뢰하고 좋아합니다. 매사 냉소적인 당나귀 벤자민조차 복서에게만큼은 다정합니다. 복서가 병들고 힘이 약해지자 돼지들은 그를 도축장에 팔아넘깁니다. 스퀼러는 복서가 값비싼 약품으로 놀라울 만한 치료를 받았지만 병원에서 죽었다고 발표합니다. 동물들은 너무나 생생하게 설명하는 스퀼러의 거짓말을 다시 또 그대로 믿지요.


  복서가 죽기 직전에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을지, 여전히 나폴레옹 동무는 옳다며 자기의 의심을 의심했을지 모르겠어요. 다만 맹목적인 믿음이 얼마나 무서운지 복서를 통해 배웁니다. 동물들에게 존경을 받는 복서가 항상 옳지 않은 나폴레옹에게 맞섰다면 어땠을까요.  

 

  이 이야기가 허구라면,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어느 시기를 담은 거라면, 인간이 아닌 동물의 세계를 다룬 거라면  재미있게 읽겠는데 우리의 현실을 담고 있어 분노와 안타까움과 체념이 뒤섞이네요.



  복서가 없었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복서 혼자의 힘이 나머지 동물들의 힘을 모두 합친 것과 비슷하게 보일 정도였다.
  힘들여 끌어올리던 돌덩이가 비탈에서 미끄러지기 시작하여 동물들이 언덕 밑으로 끌려가며 정망적으로 아우성칠 때, 밧줄을 버티고 잡아 돌덩이를 세우는 일 같은 것도 항상 복서가 했다.
  그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발굽 끝으로 땅을 벅벅 긁으며, 커다란 옆구리가 온통 땀으로 젖은 채 한치 한치 언덕을 올라가는 모습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클로버가 때때로 너무 무리하지 말고 조심하라는 충고를 여러 번 했지만 복서는 그녀의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내가 좀 더 일하지'와 '나폴레옹은 항상 옳다'는 두 개의 좌우명은 모든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으로는 충분한 것 같았다. 복서는 지금까지 매일 아침, 남보다 30분 일찍 깨우던 것을 45분 일찍 깨워달라고 젊은 수탉에게 부탁해 놓았다.

  - 동물농장 -




진실을 외면하는 이들




'불쌍하긴 하지만,
세상에 저런 일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지.'

- 우산을 쓰지 않는 시란 씨 -


  

  복서처럼 몰라서 당한 일도 많고, 몰라서 잘못을 덮은 일도 많습니다. 그때는 그게 옳은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니 그렇지 않은 일들도 꽤 있고요. 그리고 어떤 것은 알면서도 외면했습니다. 할 수 있었는데 굳이 나서지 않았지요. 시간이 지나니 몰라서 못 했던 일보다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던 일이 더 오래 남더라고요. 그런데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어떤 행동은 망설이게 됩니다. 그러면 안 되는 줄 뻔히 아는데 용기가 나지 않아서, 귀찮아서, 내 일이 아니라서, 어차피 안 될 테니까 움직이지 않게 되죠. 그 때문인가 봐요. 『동물농장』의 벤자민이 오래오래 마음에 남은 이유가 말이에요.

 
  당나귀 벤자민은 동물농장에서 나이가 가장 많습니다. 성질은 몹시 까다롭고, 고약하고, 냉소적이고, 거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웃을 일이 없다면서 웃지도 않아요. 그는 어떤 돼지보다 더 잘 읽을 수 있지만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지도 않지요. 읽을 만한 가치를 지닌 게 아무것도 없다면서 다른 동물들이 글을 물어도 읽어주지 않습니다. 노동력을 절약하기 위해 풍차를 건설해야 한다는 스노볼의 의견과 식량을 증산시켜 풍족하게 밥을 먹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나폴레옹의 의견으로 동물들이 나뉠 때에도 벤자민은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습니다. 풍차가 있든 없든 동물들의 생활은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요. 벤자민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누구보다 빠르게 판단하고 있지만 뒤로 물러나 비웃음만 짓고 있을 뿐이죠. 인간이나 동물이나 권력을 가진 계층의 속성은 한결같고, 힘없고 순진하고 어리석은 존재들은 변하지 않기에 벤자민은 냉소와 회의를 품은 채 관망하는 쪽을 택합니다.


  벤자민과 다른 이유이지만 『우산을 쓰지 않는 시란 씨』의 시란도 관망하는 쪽입니다. 아니, 무관심과 무시가 더 적절하겠네요. 자기와는 상관없는 먼 나라 사람들의 일이기에 굳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지요.

 

  시란은 큰 도시에 있는 회사를 다니면서 월급을 제법 많이 받고 있는 꽤 멋있는 남자입니다. 능력 있고, 성실하고, 친절해서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받지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시란이 맥주를 마시며 텔레비전을 봅니다. 전쟁 때문에 삐쩍 마른 먼 나라의 어린이가 나옵니다. 불쌍하긴 하지만 세상에 저런 일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지요. 그러니 그냥 채널을 돌리면 됩니다. 어느 날 시란은 편지를 받습니다. 그 안에는 죄도 없이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풀려나도록 편지 쓰는 일을 함께해 달라는 요청이 담겨 있습니다. 불쌍하긴 하지만 만나 본 적도 없는 먼 나라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들이 정말 나쁜 짓을 했을지도 모르잖아요. 시란은 편지를 쓰레기통에 버립니다.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온 그날 밤, 군인 다섯이 시란에게 총을 겨눕니다. 그리고 시란을 어디론가 끌고 갑니다. 비가 와도 우산을 안 쓴다는 이유로 시란은 구타를 당하고, 재판도 없이 감옥에 갇힙니다. 시란을 좋아하고 그에게 칭찬을 하던 사람들이 이제 시란을 비난합니다.


  벤자민은 그 어느 동물보다 오래 살고, 돼지보다 더 글을 잘 읽고, 상황을 제대로 파악합니다. 글을 배우는 데 한계가 있고, 판단력이 흐린 다른 동물들과는 분명 다릅니다. 그런데도 벤자민은 침묵하고, 행동하지 않습니다. 바뀐 칠계명을 의심하며 그것을 읽어달라는 클로버의 부탁도 거절하지요.  


  시란은 여유롭고 편안하고 즐거운 생활을 하면서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평을 듣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보면 불쌍한 생각이 들지만 그런데도 시란은 이들을 외면하고, 쉽게 잊습니다.


  '그런데도 벤자민은', '그런데도 시란은'이라고 써 놓고는 그게 계속 마음에 걸립니다. '그런데도'에 안타까움을 담아 벤자민과 시란을 비판할 자격이 제게 있을까요. 다른 표현을 하고 싶은데 '그런데도' 만큼 적당한 단어를 찾기가 힘드네요. 벤자민과 시란이 왜 그런 태도를 보이는지 너무나 잘 알기에, 그들의 모습이 저에게도 있기에 계속 불편한 마음이 듭니다.



  동물들은 틈만 나면 반쯤 끝난 풍차 주위를 빙빙 돌면서 벽이 튼튼하고 당당하게 우뚝 서 있는 모습을 찬양하면서, 자기들이 이처럼 엄청난 것을 세울 수 있었다는 것에 감탄의 눈길을 보냈다.
  오직 벤자민만이 예외로, 당나귀란 오래 사는 동물이라는 알쏭달쏭하고 의미심장한 말 이외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면서 풍차에 열성을 보이지 않았다.

 - 동물농장 -


  며칠이 지나고 처형으로 생겨난 공포가 점차 가라앉아 갈 때 몇몇 동물들은 동물농장의 칠계명 중 제6계명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했다.
  아니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돼지나 개들이 듣는 앞에서 터놓고 그 이야기를 꺼내지는 못했지만, 앞서 행해진 살육은 이 계명을 어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클로버는 벤자민에게 제6계명을 읽어 달라고 부탁했지만, 항상 그러하듯 벤자민은 그런 일에는 끼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녀는 뮤리엘을 다시 데려왔다.

- 동물농장 -




진실을 향한 마음, 희망



  『동물농장』은 열린 결말로 끝을 맺습니다. 인간을 몰아내고 동물농장을 세웠지만 누가 돼지이고 누가 인간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닮아버린 그들을 보는 동물들의 모습이 이 소설의 마지막이지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독자들이 상상하면 됩니다. 저는 도저히 긍정적으로 그릴 수가 없더라고요. 권력자들은 더욱 교묘하고 교활해질 테고, 대중들은 독재에 길들여져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겠죠. 진실을 찾는 사람들이 있기에 미래는 긍정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진실이 없다던 친구의 말에 더 마음이 갑니다. 그때처럼 진실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데 자신이 없네요.  


  그래도 『아주 작고 슬픈 FACT』, 『생쥐 나라 고양이 국회』, 『우산을 쓰지 않는 시란 씨』의 마무리는 희망적입니다. 상자 안에 갇힌 팩트들은 팩트 수사대 덕에 다시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됩니다. 여전히 팩트를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팩트는 더 이상 슬프지 않습니다. 팩트는 팩트이기에 큰 목소리로 말할 수 있고, 꿋꿋하게 존재할 수 있지요. 고양이가 아닌 생쥐가 우두머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작은 생쥐는 감옥에 갑니다. 하지만 생쥐나 사람은 가둘 수 있어도 생각은 결코 가둘 수가 없습니다. 생각에 생각이 모여 더는 고양이가 생쥐 나라의 법을 정하지 않게 됩니다. 우산을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구타를 당하고 감옥에 갇힌 시란 씨를 위해 사람들이 편지를 씁니다. 그들은 시란 씨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어느 먼 나라에서 시란 씨의 무죄를 알리고, 시란 씨를 걱정합니다. 실제로 인권 단체인 국제앰네스티는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을 위해 '편지 쓰기 캠페인'을 하고 있죠.  


   자세히 살펴보면 『동물농장』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극적인 저항이긴 하지만 벤자민이 자기의 규율을 깨뜨리거든요. 칠계명이 바뀐 것 같다는 클로버에게 그 전에는 읽어주지 않았던 칠계명을 읽어주지요. 이미 그전에 벤자민은 동물들에게 마차에 있는 '폐마 도살'이라는 글씨를 읽어주면서 팔려가는 복서를 구하려 안간힘을 썼습니다. 동물들의 노력에도 복서를 구할 수 없었지만, 또 스퀼러의 거짓말을 진실이라 믿었지만, 시간이 흘러 봉기 전의 옛날을 기억하는 동물이 몇 남지 않았지만, 젊은 동물들은 독재에 순응하며 살고 있지만 벤자민의 변화가 혁명의 시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여기에 젊은 말들이 존경하는 클로버도 있습니다. 머리가 둔해 글을 읽지 못하지만 무척 선량하고 사랑이 넘치는 말이죠. 클로버는 젊은 말들에게 봉기와 동물 주의 원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젊은 말들이 그 의미를 얼마나 이해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많은 동물들 중 누군가는 나폴레옹의 독재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겠죠. 벤자민의 변화와 따뜻한 세상을 꿈꾸는 클로버의 바람과 부패한 정권을 바로 잡으려는 용기가 모여 진정 그들이 바란 동물농장이 되었다는 상상을 해봅니다.



 역시 혼자 할 수는 없는 일



  진실은 아주 작아 슬프기도 하지만, 인간은 어리석고 비겁하고 이기적이기도 하지만 항상 이렇지는 않습니다. 진실을 발견하고 밝히려는 사람들은 무척 현명하고 용감하고 이타적입니다. 어떤 진실은 아주 크고 강해서 세상을 변화시키지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놓을 수 없는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 친구가 여전히 진실은 없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했는데 이제는 진실하기 위해 제가 얼마나 용기를 낼 수 있는지가 더 궁금합니다. 노댄스의 <기도>에 나오는 가사처럼 "겁에 질린 얼굴과 떨리는 목소리라 해도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그런 입술"을 달라 저도 기도합니다. 겁쟁이 쫄보에 이기적이고 무심한 저 자신을 알기에 더 간절해지네요.




* 『동물농장』, 조지 오웰 지음, 신동운 옮김, 스타북스 펴냄

* 『아주 작고 슬픈 FACT』, 조나 윈터 글, 피트 오즈월드 그림, 양병헌 옮김, 라임 펴냄

* 『생쥐 나라 고양이 국회』, 알리스 메리쿠르 글, 마산진 그림, 이세진 옮김

* 『우산을 쓰지 않는 시란 씨』, 다니카와 슈나로 & 국제앰네스티 글, 이세 히데코 그림, 김황 옮김, 천개의바람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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