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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 떨림 Jul 17. 2022

야누시 코르차크의 아이들 + 그림책

- 아이들을 대하는 두 가지 감정 - 사랑, 존경


나는 당당히 요구합니다.
아이들과 그들의 노력을,
그들의 분투를 축복해주십시오.
삶의 길목에서 그들을 이끌어주십시오.
가장 편한 길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길로 이끌어주십시오.


- 야누시 코르차크의 아이들 -





1.


  비혼을 다짐했던 이십 대부터 부모 교육과 육아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부모가 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으면서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같은 프로그램을 즐겨 보았지요. 여러 가지 이유였어요. 제 부모에 대한 원망을 프로그램에 나오는 부모들에게 돌려 비난하고 싶었고, 변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희열을 느끼고 싶었죠. 무엇보다 부모들이 반성하고 깨달으면서 자식을 제대로 키우길 바랐어요. 그래야 범죄율이 낮아질 테니까요.


   평화와 평온에 대한 열망이 강하고, 불안과 두려움이 많은 저는 자주 범죄에 대한 공포에 시달립니다. 비혼을 고집했으니 늙으면 저를 부양할 가족이 없을 테고, 힘은 더 사그라들 고, 사고력과 판단력이 흐려질 텐데 미래를 책임질 아이들이 제대로 자라지 않는다저도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은 후부터 이 생각이 더 강해졌습니다. 가난한 청년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와 그녀의 여동생을 도끼로 살해하기까지의 과정이 스물이 살짝 넘은 저에게는 충격이었죠. 라스콜리니코프의 현실이 어떻든, 고리대금업을 하는 노파가 어떤 사람이든, 이 소설의 핵심 주제가 뭐였든 상관없이 범죄를 저지르는 청년의 심리와 무참하게 죽어가는 노파가 오랫동안 머리에서 떠나지 않더라고요. 빨리 늙고 싶었는데 이 소설을 떠올리면 늙는 게 두려웠죠. 부모와 아이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는다면, 자격을 가진 성인만이 부모가 될 수 있다면 살인을 정당화하려는 라스콜리니코프나 탐욕스러운 전당포 노파 같은 사람은 사라질 거라 믿었어요.



'어린이는 미래의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아이들은 아직은 사람이 아니라는 듯이,
아직 되지 않은 존재라는 듯이요.
하지만 아이들은 인구의 큰 부분을
차지할 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고
지금 여기에 이미 있는 걸요.
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테고요.
수없이 많은 아이들-이들은
'언젠가는' 될 수도 있지만 '지금은 아닌',
'내일'의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바로 여기에, 오늘 이미 존재하는 이들입니다.


***


인류의 절반을 차지하고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아이들을 우리와 철저히 구분 짓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미래의 인류라며 아이들에게 책임감은 잔뜩 지워주면서,
오늘의 시민으로서 당연히 누릴 권리는
전혀 내주지 않습니다.


  ***


  우리는 아이들에게 미래의 주역이라며
  의무를 지워주면서도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누릴 권리는
  모른 척할 때가 많습니다.


- 야누시 코르차크의 아이들 -



  최근에 부모와 아이들의 교육에 관심이 많은 분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분은 결혼을 하지 않아 자녀가 없고, 한 분은 성인이 된 두 자녀를 두고 있죠. 두 분은 아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해야 하는지, 아이를 키우는 부모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이라 했습니다. 그중 한 분께 『야누시 코르차크의 아이들』을 추천받았습니다.


  야누시 코르차크가 누구인지, 이 책이 어떤 내용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대충 책장을 넘기니 제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형식책이더라고요.  그렇고 그런 얘기를 단편적으로 편집해서 내놓은 책이라 짐작했지요. 더군다나 1870년대에 태어난 사람이잖아요. 분명 고리타분할 거예요. 그나마 짧아서 빨리는 읽겠더라고.


  그렇게 실망을 예상하며 책을 펼쳤습니다.



2.

  

아이들을 알려고 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알려고 애쓰세요.
나 자신은 얼마나 잘할 수 있는지 알아야
아이들의 권리와 책임도
정할 수 있을 겁니다.

  야누시 코르차크의 본명은 헨리크 골트슈미트입니다. 유대계 폴란드인으로 1878년인지 1879년인지 태어난 연도는 확실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는 교육자이면서 소아과 의사이고, 작가이면서 심리학자이면서 아동인권의 선구자입니다. 1979년 유엔 아동권리선언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 바로 야누시 코르차크죠. 야누시 코르차크는 아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의회와 법원을 갖춘 진보적 고아원을 도입해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습니다. 그러던 중1939년,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합니다 그리고 일 년 뒤 나치는 유대인들의 거주 지역인 게토 안으로 유대인들을 이주시킵니다. 코르차크의 고아원도 그 안으로 들어갑니다. 기회가 있었지만 코르차크는 모든 제안을 거부하고 1942년, 동료 교사들과 고아원 아이들과 함께 가스실로 향하는 트레블링카행 열차에 오릅니다. '천사들의 행진'으로 불리는 이들의 행렬은 너무 아름답고 숭고해서 그 시대의 잔인함과 비극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지요.

 


  나치의 학살이 절정에 달했던 1942년 8월 6일 안전을 보장해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하고 돌보던 고아들을 이끌고 의연히 죽음의 수용소로 향하는 트레블링카행 열차를 탔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전설이 되었다.

- 야누시 코르차크의 아이들 -



  책날개에 짧게 소개된 야누시 코르차크에 대한 글을 읽는데 심장이 뛰면서 그에 대해 알고 싶어 졌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죽음을 택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왜 그래야 했는지, 아이들에게 이 사람은 어떤 존재였는지, 그 시대에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먹먹함과 함께 궁금증이 더해 갔죠. 책에 그림을 그린 이츠하크 벨페르가 코르차크의 고아원에서 자랐다는 것도 한몫했습니다.  


  이 책을 엮은 샌드러 조지프가 만난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야누시 코르차크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해졌습니다. 당시 일흔 살, 여든 살의 노인들은 코르차크가 운영하던 고아원에 있던 아이들이었죠. 노인들은 코르차크의 이야기를 꺼내자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며 그에게 받은 사랑과 배움을 이야기합니다. 전쟁으로 굶어 쓰러질 지경이 되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코르차크의 가르침이 남아 있어 결국 하지 않았다는 대목에서는 감탄이 나왔어요. 대체 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타인의 삶에 이런 큰 영향을 준 걸까요.   

 

  그렇고 그런 뻔한 말을 짧게 편집해서 내놓은 책일 거라는 예상책장 몇 장을 넘기면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코르차크가 쓴 『아이를 사랑하는 법』과 『아이의 존중받을 권리』에서 따왔다는 다음 장이 이제는 무척 기대가 되었지요.



 3.


  아이들을 대할 때, 야누시 코르차크는 두 가지 감정을 느낀다고 합니다. 지금의 모습에 대한 사랑과 앞으로의 모습에 대한 존경이죠. 비행을 저지르는 아이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가 그러는 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이지, 될라고 되라는 마음으로 그러는 게 아니니까요. 코르차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나쁜 길을 가는 아이에게, 실수를 하고 관계에 서툰 아이에게 아직 믿을 만한 세상이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믿을 수 있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면서 아이들에게 기회를 주고 올바르게 이끌어 달라 당부하지요.  


  『달려!』와 『까마귀 소년』에는 아이들에게 믿음을 주고, 아이들이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어른이 나옵니다. 남들이 보기에 형편없고 문제 많은 아이에게서도 이들은 가능성을 발견하고, 관심과 애정을 쏟습니다.



선생님은 거칠고 사고뭉치였던 내게 다정한 손길을 내밀었어.

  『달려!』의 주인공은 백인들이 다니는 학교의 유일한 흑인입니다. 아이는 낡고 지저분한 동네에 사는 게 싫습니다. 가난한 부모도, 선생도, 다른 학생들도 모두 다 싫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중학교에 입학하니 흑인 친구들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진 건 없습니다. 주인공은 피부색 때문에 싸우고, 걸핏하면 교장실에 불려 가 벌을 받습니다. 새 교장이 온 날 아침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날도 싸움이 일어났고 역시나 교장실로 불려 갔죠.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다릅니다. 새로 온 챕맨 교장은 주인공에게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묻습니다. 다른 교장들은 싸움의 원인이 무엇이었고, 누가 제공자였는지 묻지 않았는데 말이죠. 그 외 챕맨은 주인공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더니 권투를 할 생각이었냐며 어디 한번 보여달라고 하네요.



나쁜 행동을 하는 아이는
그것을 무거운 짐처럼 느끼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그러는 겁니다.
이끌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나름대로 달라져 보겠다고 애쓰다가
실패하기 십상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포기하고 말겠지요.

- 야누시 코르차크의 아이들 -



선생님은 땅꼬마밖에는 알아볼 수 없는 빼뚤빼뚤한 붓글씨도 좋아했어. 그래서 그것도 벽에 붙였지.
 

  '까마귀 소년'이라는 제목 아래에 있는 아이의 모습이 기괴해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그림책입니다. 아이의 뒤쪽으로 보이는 까마귀 한 마리와 뒤표지에서 날고 있는 여러 마리의 까마귀가 음산함을 더했죠. 밝고 따뜻한 이야기보다는 우울하고 어둡고 냉소적인 내용의 책을 선호하는데도 『까마귀 소년』은 오랫동안 펼쳐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쩌다가 책장에서 이 책을 마주하면 표지 속 아이를 보지 않으려 노력했어요. 매서운 눈매를 더 강조하는 긴 속눈썹, 어디를 쳐다보는지 알 수 없는 각각의 눈동자, 웃는 건지 우는 건지 까마귀를 부르는 건지 모를 입술을 보고 있으면 묘한 슬픔과 함께 불쾌감이 들었거든요. 알고 싶지 않은, 그런데도 알 것도 같은 무언가를 불시에 마주친 느낌이었죠. 기괴하고, 음산하고, 불편한 첫인상과는 달리 이 그림책은 감동적입니다. 


  학교에 간 첫날, 아이 하나가 없어집니다. 아이는 학교 마룻바닥 밑에 숨어 있었죠. 너무 작아 '땅꼬마'라 불리는 이 아이는 선생님을 아주 무서워합니다. 아이들도 무서워하고요. 그러니 제대로 배울 수 없고, 누구와도 어울릴 수가 없습니다. 따돌림을 받는 이 아이는 늘 외톨이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땅꼬마는 사팔뜨기 흉내를 냅니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으려 말이죠. 아이는 몇 시간 동안 천장만 뚫어지게 쳐다보거나, 책상의 나뭇결을 골똘히 살펴보거나. 눈을 감고 온갖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지네와 굼벵이들을 열심히 들여다보거나 하면서 자기만의 방법으로 시간을 견딥니다. 이제 아이들은 땅꼬마를 바보 멍청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6학년 졸업반이 된 해에 교사 이소베가 새로 옵니다.  


  『까마귀 소년』과 『달려!』의 주인공 아이들은 학교에 적응을 하지 못합니다. 대인관계는 아주 엉망이죠. 『달려!』의 '나'는 모두를 적으로 규정한 채 분노를 표출했다면 『까마귀 소년』의 땅꼬마는 사람들을 무서워하며 움츠립니다. 누구도 이 둘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새로 온 교사 이소베와 챕맨은 다릅니다. 이들은 아이들과 소통하고, 아이들의 능력을 발견하고, 아이들에게 믿음을 주면서 그들이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이끌지요. 야누시 코르차크가 그토록 강조했던 어른의 역할을 이소베와 챕맨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분이 제 삶에 미친 영향은 말로 하기 힘듭니다. 인정이 넘쳐서 누구든 도우려고 하는 분이었죠. 우리는 코르차크야말로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라고 얘기했어요. 무엇보다도 그분은 아이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아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마음속을 꿰뚫어 보았어요. 고아원에서 보낸 시간이 나를 지금 이 모습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늘 다른 사람에 대해 믿음을 가져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본질이 선하다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또한 혁신적인 교육자이기도 했어요. 아이들에게 어른과 똑같은 권리가 있다고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입니다. 아이들은 도와주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온전한 인격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냥 그렇게 생각만 한 게 아니라 우리 고아원에 그런 생각을 실제로 적용했어요. 고아원에는 미리 정해 놓은 규칙이나 틀 같은 것은 없고 아이들에게나 교사들에게나 같은 권리가 있었어요. 이를 테면 어린이 법정(고아원의 어린이 법정은 아이들 서로가 잘잘못을 가리는 곳이었다)은 약한 아이를 힘센 아이로부터 보호하려고 만든 것이었는데, 아이들만 재판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교사들은 서류 작업이나 했고요. 전쟁이 터졌을 때 저는 굶어 쓰러질 지경이 되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결국 하지 않았습니다. 코르차크 선생님의 가르침이 내 안에 남아 있었으니까요.


***


  여덟 해 동안 내 아버지였던 그분, 내 몸과 마음의 병을 치료해주고 내 평생의 지침이 된 가르침을 심어주신 그분을 가슴 깊이 소중히 기억합니다.


- 야누시 코르차크의 아이들 -



곧 데리러 오겠다는 엄마도
술을 끊겠다는 아빠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위에 소개한 두 그림책과는 달리 『달 밝은 밤』에서의 어른은 믿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밥 대신 술을 마시는 아빠와 늦게 들어와 잠만 자는 엄마는 아이에게 두려움과 서운함과 실망만 주는 존재이지요. 엄마가 한숨을 쉴 때에도, 엄마와 아빠가 싸울 때에도 아이는 달을 봅니다. 엄마가 멀리 일하러 떠난 아빠는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다고 했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달 밝은 밤만 이어질 뿐이죠. 이제 아이는 부모를 믿지 않기로 합니다.  


  야누시 코르차크는 아이가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는 한 사람이 있다는 걸 알면 잔인함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도 아이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자란다고 했습니다. 『달려!』의 '나'가 자신을 믿어주고, 응원해주는 어른을 만났기에 달리기에서 뿐 아니라 삶에서의 호흡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듯이요. 그 덕에 주인공은 원망했던 사람들을 이해하고, 수업에도 더 집중하고, 챕맨 교장과 같은 어른이 되어 자신을 닮은 아이에게 손을 내밉니다. 사람들이 무서워 숨었었던 『까마귀 소년』의 땅꼬마도 이소베 덕에 학예회 무대에 서서 까마귀 울음소리를 흉내 냅니다. 친구들은 땅꼬마의 능력과 성실함을 알아보고 눈물을 흘리지요. 땅꼬마에서 까마둥이가 된 소년은 이제 어른처럼 어깨를 떡 펴고 뚜벅뚜벅 걷습니다. 잔인한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어른이 딱 한 명만 있어도 아이의 삶은 이렇게 변하는 거죠.


  어른에게 실망만 한 『달 밝은 밤』의 '나'는 더는 부모를 믿지 않기로 합니다. 대신 자신을 믿겠다고 합니다. 스스로를 믿으며 달과 함께 살아가겠다는 아이가 대견하기보다는 안쓰럽고 안타깝습니다. 아이가 받은 상처와 실망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죠. 아이가 실제로 느끼는 감정은 제 예상보다 훨씬 크고 무겁다는 것도 알아요. 더는 믿지 않겠다고 하는 그 순간에도 아이는 부모를 믿고 싶고,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갖고 있을 겁니다. 어디에선가 이 아이도 믿음직한 어른을 만나지 않았을까, 기대합니다. 그래서 달보다는 사람에게 의지하고 기대면서 자신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음을 확인하면 좋겠어요.



난 망태 할아버지가 정말 무서워
 

  할머니는 제가 울거나 떼를 쓰면 "망태 할아버지한테 잡아가라고 한다"며 협박했습니다. 망태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라도 할머니의 표정과 말투로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할아버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죠.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아이를 망태기에 넣어 잡아간다는 이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다양하게 전해집니다. 잡아가서 먹어버린다고도 하고, 다시는 나쁜 짓을 못할 정도로 혼낸 뒤에 집으로 돌려보낸다고도 요.


  『망태 할아버지가 온다』의 엄마도 이 무시무시한 할아버지를 이용해 아이를 겁주고, 윽박지릅니다. 사실 자꾸 거짓말을 하고, 밥 대신 간식을 먹고, 늦게까지 잠을 안 자는 건 엄마인데 말이죠. 엄마의 으름장에 겁을 먹은 아이는 점점 화가 납니다. 더는 참을 수 없어진 아이는 엄마에게 반항합니다. 엄마에 비해 너무 작았던 아이가 드디어 엄마보다 키가 커졌어요. 의자 위에 올라갔거든요. 그런데 의자의 다리가 온전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밟고 올라 선 곳은 등받이이고요. 화가 나서 엄마에게 대들긴 하는데 엄마에 대한 죄책감과 망태할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 위태롭고 불안한 모습으로 나타난 거죠.



"엄마는 어른이 차를 엎지르면
'괜찮아요'라고 말하면서 내가 엎지르면 화를 내요!"
아이들은 불공평한 일을 겪으면 마음 깊이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울음이 터져 나오는 건데
어른들은 운다고 놀리거나 짜증을 냅니다.
아니면 별거 아닌 일로 여기고 무시하거나요.
"또 징징거리고 떼 부리고 악을 쓰네!"
이런 말은 아이들을 공격하려고 어른이 만들어낸 말입니다.  


***


아이가 우리의 잘못을 따지면 우리는 기분 나빠합니다.
어른들이 실수하거나 어리석은 행동을 하더라도 아이들은 몰라야 하고요.
우리는 아이들 앞에 완벽함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납니다.
유리한 패를 쥐고 카드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어른이라는 높은 패로 아이의 낮은 패를 눌러버리죠.
속임수를 쓰며 카드를 섞어 좋은 카드는 모조리 골라 가지면서요.


***


우리는 아이들이 우릴 비판하지 못하게 하는데
그렇다고 스스로를 잘 다스리는 것도 아닙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시도들은 아예 접어버리고
대신 아이들 보고 그렇게 되라고 짐을 지웁니다.
교사도 마찬가지로 어른의 특권을 차지하고는
자기 자신은 손 놓아버리고 아이들만 관리합니다.
아이들의 잘못은 꼼꼼히 기록하면서 자기 잘못에는 눈을 감지요.
우리는 함께 더 잘 어우러져 살려고 노력하나요?
'말을 안 듣는' 사람은 바로 우리 어른들 아닌가요?


***


어른들은 별로 똑똑한 것 같지가 않아요.
자기들이 가진 자유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몰라요.
어른들은 참 좋겠어요.
사고 싶은 게 있으면 마음대로 사고
하고 싶은 일 무엇이든 해도 되니까요.
그러면서도 걸핏하면 화를 내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소리를 지르곤 하지요.


- 야누시 코르차크의 아이들 -



  돌아보면 저 역시 아이들을 겁박하고 비난했습니다. 논술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너와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 부모님과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말을 자주 했어요. 너의 잘못을 네가 가장 무서워하는 부모에게 알리겠다는 일종의 협박이었죠. '네가 내 말을 잘 듣는다면'이라는 조건을 내세워 아이들을 굴복시키려 한 적도 있고요.  법적인 나이는 성인이지만 정신적으로는 미숙했던 그 시절을 돌아보면 마냥 부끄럽기만 합니다. 제발 그 아이들이 저를 기억하지 못하면 좋겠어요.



내가 그렇게 말하면
엄마는 더 많이 화를 낼 게 뻔해.
그래서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려 버려.
고개를 돌린 채,
아무 대꾸도 않고 혼나기만 해

아이들은 정직합니다.
입을 꾹 다물고 있지만 사실은
열심히 대꾸하고 있는 겁니다.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고
사실을 말하려니 너무 겁이 나서
말을 못 할 뿐.
저도 이 사실을 알게 되고 무척 놀랐습니다.
침묵이 때로는 정직함을 열렬히
말하고 있다는 것을요.


 ****

잘못을 저질렀어도 아이는 아이입니다.
이 사실을 한순간이라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아이는 아직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기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를
모를 뿐입니다.
아이는 자기가 혼자라는 것,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라곤 합니다.


- 야누시 코르차크의 아이들 -



  그래도 이제는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려 노력합니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기분 좋게 해 주면서 제 의견을 따를 수 있도록 하지요. 즐겁고 평화롭고 유쾌하게 아이들을 대하고 있는데 어디까지나 과거에 비해 그렇다는 겁니다. 매번 너그러울 수 없고, 모든 아이들을 똑같이 대할 수도 없더라고요. 여전히 힘든 아이가 있고, 아이의 어떤 행동은 참을 수 없습니다.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는 아이만큼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아이가 그렇지요. 『혼나지 않게 해 주세요』의 표지 속 아이처럼요.


   아이는 잔뜩 화가 나 있습니다. 부릅뜬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고, 입술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아이의 얼굴에서 분노, 억울함, 서운함 등이 보입니다. 아이가 이러는 이유는 말해봤자 소용없기 때문입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아이는 이해받지 못하고 항상 혼나기만 하거든요. 왜 동생을 울렸는지, 왜 숙제를 못했는지, 왜 친구를 때렸는지 이유를 말하면 엄마와 선생님은 더 화를 내지요. 그러니 그냥 고개를 돌리고 입을 다물 수밖에요. 좋은 의도를 갖고 그런 건데, 착하다는 말을 듣고 싶은데, 더는 혼나고 싶지 않은데 어른들은 자기만 보면 화를 내는지 모르겠습니다.


  코르차크는 아이가 죄책감을 느낄 때가 어른의 따뜻함이 가장 간절한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는 자신의 잘못을 알면서도 어른이 야단을 치면 대들거나 성난 표정을 짓는다고 해요. 자기 때문에 생긴 결과에 스스로도 속상하고 화나는데 타인의 비난까지 더해지면 반성보다는 반발심이 생기는 거죠. 이건 어른인 저도 마찬가지인 걸요. 더군다나 『혼나지 않게 해 주세요』의 주인공은 어른들이 화를 내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혼이 납니다. 어른들은 잘못만 지적할 뿐 왜 너에게 이러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아이가 어떤 의도로 그랬는지 묻지 않고 결과만 보고 야단치지요.  


  『혼나지 않게 해 주세요』를 볼 때마다 이런 아이를 현실에서 만나면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의도가 어떻든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제 멋대로이고, 여기저기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억울하다는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씩씩거리기만 하는 아이를 얼마나 품어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어린 시절에 그랬으면서 왜 그 마음을 받아주기 힘든 걸까요.



여러분은 어른만 국민이 아니라 어린이도 국민이라는 사실을 놓쳤습니다. 어린이들이 수백만 명인데, 그들도 함께해야 합니다. 국회를 두 개 만듭시다. 하나는 어른의 국회, (중략) 다른 하나는 어린이 국회

   야누시 코르차크가 설립한 고아원에서 열리는 '어린이 법정'에 관한 내용을 읽는데 자꾸만 『어린이의 왕이 되겠습니다』가 떠올랐습니다. 다시 보니 야누시 코르차크의 작품 『마치우시 1세 왕』을 바탕으로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가 재해석한 그림책이었어요. 『야누시 코르차크의 아이들』로 그를 처음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저는 그를 만났더라고요.

 

  표지를 보면 자기의 머리보다 큰 왕관을 쓴 아이가 보입니다. 머리에서 흘러내린 왕관이 눈을 덮고, 아이는 앞이 보이지 않아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이 아이가 마치우시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열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았지요. 왕관은 마치우시에게는 너무 크고, 무겁고, 뾰족합니다. 이 무게를 견디려니 위태롭기만 합니다. 그래도 마치우시는 전쟁터에 나가 승리하고,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열심히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중요한 개혁을 실행하기로 결심합니다. 어른의 국회와 어린이 국회를 만드는 거죠.


  어른들의 모순에 대해, 어린이의 문제를 당사자 스스로 해결하는 것에 대해, 어린이 역시 어른과 동등한 권리가 있다는 것에 대해, 올바른 책임감에 대해, 실패가 새로운 도전이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에 대해 이 그림책은 많은 질문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4.


  어린이를 어른의 소유물로 보거나 얕잡아 보던 시대에 야누시 코르차크는 진정 아이들을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글을 읽을 때마다 100년 전에 이런 생각을 갖고 실천한 사람이 있었다는 게 놀랍고 감사했습니다. 동시에 부끄러웠습니다. 이런 사람을 알지 못했다는 게 부끄러웠고, 아이들을 대하는 제 모습에 부끄러웠죠. 야누시 코르차크의 말처럼 저 역시 아이들에게 미래의 주역이라는 의무를 지워주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누릴 권리는 모른 척했습니다. 아이들의 삶이 아닌, 아이들로부터 영향을 받게 될 제 삶을 더 크게 생각했지요. 그러니 아이들을 교육의 대상으로만 보고, 강점보다는 문제점을 먼저 바라봤어요.


  야누시 코르차크의 글을 읽으면서 이제는 성인이 되었을 몇 명 아이들에게 사과했습니다. 너희들이 먼저 잘못했다는 비난과 그때의 너 같은 아이를 만나고 있으면 좋겠다는 심술도 슬쩍 올라오긴 했지만요. 반성을 했다 해도 한순간에 달라질 수는 없잖아요. 그냥 그때보다, 지금보다 조금씩 나아지면 된다고 제 안에 있는 아이를 다독입니다. 




* 야누시 코르차크의 아이들, 야누시 코르착 지음, 샌드러 조지프 엮음, 이츠하크 벨페르 그림, 홍한별 옮김, 양철북 펴냄

* 까마귀 소년, 야시마 타로 지음, 윤구병 옮김, 비룡소 펴냄

* 달려! 다비드 칼리 글, 마우리치오 A.C. 콰렐로 그림, 나선희 옮김, 책빛 펴냄

* 달 밝은 밤, 전미화 지음, 창비 펴냄

* 망태 할아버지가 온다, 박연철 지음, 시공주니어 펴냄

* 혼나지 않게 해 주세요, 구스노키 시게노리 글, 이시이 기요타카 그림, 고향옥 옮김, 베틀북 펴냄

* 어린이의 왕이 되겠습니다, 야누시 코르착 원작,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그림, 이지원 옮김, 사계절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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