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에 뒤이은 경제 팽창에서 서방, 특히 미국의 소비자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특권을 누렸지만, 동시에 가장 괴로운 사람들이 되었다. 미국 전역에서 쇼핑몰의 발전으로 새로운 갈망들이 생겨났다.
----- 실제적 궁핍은 급격하게 줄어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궁핍감과 궁핍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고 외려 늘어나기까지 했다. 중세 유럽에서 변덕스러운 땅을 경작하던 조상은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할 부와 가능성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놀랍게도 자신이 모자란 존재이고 자신의 소유도 충분치 못하다는 느낌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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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 - 예를 들어 부나 존중 - 의 적절한 수준은 결코 독립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준거집단, 즉 우리와 같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조건과 우리의 조건을 비교하여 결정된다. 우리가 가진 것은 그 자체만으로 평가할 수도 없고, 중세 조상의 생활과 비교하여 판단할 수도 없다. 역사적 맥락에서 우리가 놀라운 번영을 이룩했다고 강조하는 소리를 들어봤자 전혀 감동을 느낄 수 없다. 오직 우리가 함께 자라고, 함께 일하고, 친구로 사귀고, 공적인 영역에서 동일시하는 사람들만큼 가졌을 때, 또는 그보다 약간 더 가졌을 때만 우리는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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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기대를 가로막는 모든 장벽을 철거해버렸다.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은 물질적 평등을 성취할 수단이 없는데도 이론적으로는 평등하다고 느꼈다. (중략) 토크빌은 귀족사회와 민주사회는 구성원들의 빈곤 개념이 다르다며, 이 점은 하인이 주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특히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중략) 민주사회에서는 언론과 여론이 하인들도 사회의 정상에 올라설 수 있다고, 그들 역시 산업가나 판사나 과학자나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무자비하게 부추겼다. 이렇게 무제한의 기회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면 처음에는 특히 젊은 하인들 사이에 명랑한 분위기가 조성될 수도 있다. 실제로 그들 가운데 가장 재능이 뛰어나거나 운이 좋은 사람은 목표를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수는 상승에 실패한다. 토크빌은 그들의 분위기가 어두워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울화 때문에 생기를 잃고, 자신과 주인에 대한 증오심을 키웠다. -----
제임스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성공을 거두어야만 우리 자신에게 만족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또 어떤 일에서 실패한다고 해서 반드시 수모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자존심과 가치관을 걸고 어떤 일을 했는데 그 일을 이루지 못했을 경우에만 수모를 느낀다. 무엇을 승리로 해석하느냐, 무엇을 실패로 간주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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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근대 사회는 첫 번째 방법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욕망에 줄기차게 부채질을 하여 자신의 가장 뛰어난 성취의 한 부분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부유하다고 느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와 같다고 여겼지만 우리보다 더 큰 부자가 된 사람과 실제로나 감정적으로나 거리를 두면 된다. 더 큰 물고기가 되려고 노력하는 대신, 옆에 있어도 우리 자신의 크기를 의식하며 괴로울 일이 없는 작은 벗들을 주위에 모으는 데 에너지를 집중하면 된다. 발전한 사회는 역사적으로 볼 때 전보다 높아진 소득을 제공하기 때문에 우리를 더 부유하게 해 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볼 때 우리를 더 궁핍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무제한의 기대를 갖게 하여 우리가 원하는 것과 얻을 수 있는 것, 우리의 현재의 모습과 달라졌을 수도 있는 모습 사이에 늘 간격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원시의 야만인보다 더 심한 궁핍을 느낄 수도 있다. (중략) 루소의 벌거벗은 야만인은 가진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타지마할에 사는 후손들과는 달리 그들은 아주 적은 것을 갈망하는 데서 오는 큰 부는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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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조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 대가는 우리가 현재의 모습과 달라질 수 있는데도 실제로는 달라지지 못하는 데서 오는 끊임없는 불안이다.
- 불안 -
"이메일과 아이디를 만들면서부터 지금까지 비밀번호에 'tjdrhd'이 들어가요. 한글 자판으로 치면 '성공'이죠. 닉네임을 만들 때에도 꼭 이 단어를 넣었어요. 성공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너무 강했거든요. 그런데 이젠 아니에요. 언젠가부터 그 말이 유치해졌어요. 성공하지 못한 제가 선명하게 보여서 비참하기도 하고요. 지금의 비밀번호는 그냥 습관인 거예요. 오랫동안 사용해서 편하고, 익숙하니까 그대로 굳어버린 거죠. 무엇보다 비밀번호는 저 혼자만 사용하는 거잖아요. 누군가와 공유해야 한다면 절대로 이 낱말을 사용하지 않겠죠.
음…… 지금은…… 성공에 대한 기대가 거의 없어요. 그런데 열망은 여전하지요. 그래서 무슨 일을 시작할 때면 불안하고 초조해요.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은 없는데 잘하고 싶은 욕심은 강하니 제 심장과 뇌는 늘 파도에 휩쓸리고 있지요.
아, 잠깐만요. 속이 좀 울렁거려서요. 아뇨,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에요. 워낙 자주 있는 일이라 이 정도는 대수롭지 않답니다. 그냥 조금 후에는 사라질 심리적인 현상이에요. 잠깐 누군가를 생각했거든요. 아니…… 질투했거든요. 한때는 그가 안쓰러웠는데, 여전히 그가 행복하길 바라는데 제 마음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그의 능력을 훔치고 싶고, 그의 운명을 갖고 싶어요. 그러면 안 되는데, 그러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그와 저를 비교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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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도 그 능력이 있으니까요. 내 말이 이상한지 당신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당신도 갖고 있는 능력이니까 기대하고, 욕망하고, 질투하고, 괴로워하는 거예요. 과학자를 질투하지는 않잖아요. 당신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 고개를 떨구더니 이내 피식 웃는다. 어설프게 있는 능력이죠. 당신의 말투에는 자조가 섞여 있다. 자신의 가능성을 믿어 보라는 내 말에 '너는 특별하단다'와 같은 류의 위로는 싫다며 당신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다. 모두가 다 특별하고,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부추김 때문에 패배감과 증오심이 커지는 거예요. 당신은 웃고 있지만 어딘지 부자연스럽다. 화제를 돌리기 위해 그림책을 내민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당신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진다. 몇 번이나 앞장으로 되돌아가면서 고개를 갸웃하기도 하고, 같은 장면을 오랫동안 바라보기도 한다. 글이 없네요. 당신이 당혹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린다. 제목이 이렇게 와닿을 수 없다며 당신이 뭐죠,라고 묻는다. 뭔 거 같냐고 되묻자 당신이 다시 책을 살핀다. 정답은 없으니 느낀 대로 말하면 된다고 해도 당신은 망설인다. 정답은 없지만 오답은 있잖아요. 그렇지 않다고 해도 소용없다. 책장을 앞뒤로 넘기는 당신에게 창의력을 발휘해 근사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욕심을 버리면 된다고 하자 어떻게 알았느냐며 눈을 크게 뜬다. 잘하고 싶을수록 쉽게 시도할 수 없다고 하자 당신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 책의 주인공을 뭐라고 부를까요? 당신이 '흐물이'로 하자고 한다. 단단함은 조금도 없고, 살이 흘러내릴 것처럼 보인다며 탁한 민트색의 주인공을 흐물이로 부르겠다고 한다. 성별, 나이, 성격, 생활 태도, 삶의 이력 등 모두 당신이 정하면 된다고 하자 당신이 흐물이의 어떤 모습은 남자처럼 보이고, 어떤 표정은 여자처럼 보인다며 흐물이는 여자와 남자의 성별이 합쳐진 생명체라고 한다. 나이는 오천 살 가까이 되지만 이들의 세계에서는 청소년에 해당하고, 보통의 인간에 비해 총명하지만 같은 종족과 비교했을 때 똑똑하지는 않단다. 흐물이는 순박하지만 소박하지는 않다며 탁한 민트색의 생명체에게서 욕심이 보인다고 한다. 이렇게 말하고 당신이 소리 내 웃는다. 이름을 정한 뒤부터 당신에게 생기가 돈다. 당신의 이야기를 토대로 구성한 『뭐지? 뭐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흐물이의 세계에서는 유년기까지는 양육자가 돌보지만 그 이후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는 강, 우주, 바다 등을 돌아다니며 혼자 살아야 한다. 오천 살이 되는 날까지 알아서 살아남으면 성인 대접을 받으면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 그동안 흐물이는 강, 우주, 도시, 바다를 거쳐 이곳 정글까지 왔다. 이제 성인이 되려면 이백칠십오 년 삼십삼 일이 남았다. 그날, 누군가가 흐물이가 사는 정글에 들어와 책을 떨어뜨리고 간다. 그는 성인이 되길 기다리는 미성년자들을 몰래 도우는 생명체다. 실수로 책을 떨어뜨린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치밀한 계산 하에 이뤄진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을 흐물이가 발견한다. 책에는 유용한 정보가 많다. 몸에 상처가 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햇살이 눈을 따갑게 하면 무엇이 필요한지, 더러워진 몸을 씻기 위해서는, 어두운 곳을 밝히기 위해서는 어떤 도구가 필요한지 나온다. 문명의 세계가 닿지 않는 곳에 있는 흐물이는 자연환경을 이용해 도구들을 만든다. 예를 들면 선글라스는 날카로운 돌로 얼음을 자른 후에 주꾸미처럼 보이는 생물의 먹물을 칠한다. 얼음이 녹으면서 먹물이 얼굴을 지저분하게 만들어도 걱정이 없다. 책에 나온 대로 연밥을 이용해 샤워기를 만들면 된다. 이렇게 흐물이는 책을 통해 밀림에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한다.
아, 흐물이는 사천 칠백 살이 넘은 미성년자이군요. 이 세계는 아동기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는 혼자 살아남아야 하고, 그 뒤에는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 같이 모여 살 수 있다니 색다르네요. 첫 장면에 나오는 인간은 흐물이 같은 이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실수가 아니라 일부러 책을 떨어뜨린 거라니 흥미로워요.
새롭게 설정한 이야기가 재미있다고 하자 당신이 어깨를 으쓱한다. 별것 아니라고 말하지만 당신의 표정은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인간이 아니라 독특한 생명체예요. 책을 떨어뜨린 누군가를 인간이라고 하자 당신은 아니라고 정정한다. 가슴부터 허벅지까지만 나오기 때문에 나머지 부분은 어떻게 생겼는지 속단할 수 없단다. 글이 없는 그림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던 당신은 이제 없다.
근데 왜 흐물이는 똑똑하지 않다고 했나요? 제가 봤을 때는 책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고 상황에 맞춰 응용하는 흐물이가 무척 똑똑하게 보이는데 말이에요. 그리고 흐물이가 욕심이 많다니요. 주워진 환경에 만족하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나요?
내가 의아해하자 당신이 길게 음, 이라고 말한 후 설명을 시작한다.
인간의 눈으로 봤을 때, 흐물이는 똑똑하게 보이지만 흐물이의 세계에서는 아니에요. 누군가는 책을 보지 않고도 감각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기도 하고, 책의 내용을 토대로 더 멋진 도구를 만들기도 하지요. 흐물이보다 더 어린 나이에 말이에요. 흐물이가 정말 똑똑하다면 얼음으로 선글라스를 만들지 않았을 거예요. 햇빛으로부터 눈을 보호해주기 위해 만든 건데 햇빛에 약한 재료를 사용했잖아요. 흐물이가 욕심이 있다고 한 건…… 그냥 그렇게 보였어요. 아, 정확한 근거를 요구하지는 말아요. 느낌대로 읽으면 된다고 했으니까 제 느낌을 솔직하게 얘기한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면 그 느낌이 맞는 거라고 얘기한다. 당신은 흐물이가 만족스럽게 웃는 모습, 익살스러운 눈빛, 순박한 표정 등등에서 욕심이 보인다고 한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요,라고 하자 당신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자신의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내게 불만이 있는 건지, 정확하게 근거를 대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나는 건지 알 수 없다.
흐물이는 그동안 이 물건들 없이도 잘 살았어요. 그런데 책을 갖게 되면서 그 안에 있는 물건들을 필요로 하게 돼요. 책에서 삶의 지혜와 방법을 얻기도 하지만 책 때문에 욕심이 생기기도 하죠. 아직은 괜찮지만 점점 자기가 갖지 못하는 것들 때문에 괴로울 거예요. 지금은 비교대상이 없으니까 그럭저럭 만족하는데 다른 이들 틈에 있으면 분명 달라져요. 흐물이는 기대를 많이 하고 있을 거예요. 지금까지 혼자 살아온 자신이 대견할 거고요. 어디를 가든, 누구와 있든 잘 살 거라 자신하겠죠. 성인식 때면 으레 하는 '너희는 특별하단다'라는 선배들의 말을 그대로 믿으며 뭐든 다 가질 수 있고, 뭐든 다 될 수 있다고 확신할 거고요. 성인이 되어 만나는 세상은 물건들이 넘치고, 풍요롭고, 화려해요. 하지만 그 모든 게 자기 것이 될 수는 없어요. 이젠 자존심에 상처가 날 일 뿐이죠. 어려움을 이기고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는데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라니 잔인하죠. 흐물이의 책장에는 '동료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사회생활에서 살아남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살아남기' 등의 책이 가득해지겠죠. 욕심이 있으니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할 거예요. 그게 잘 되지 않아 매번 좌절하겠지만요.
여기까지 말하고 당신이 길게 한숨을 쉰다. 왜 이렇게 책을 부정적으로만 보는지 모르겠어요. 이야기를 만들면서 즐거워하던 당신이 지금은 약간 침울하다. 그것도 능력이에요. 부정적인 시선을 통해 해답을 찾을 수 있어요. 당신이 잠시 나와 눈을 맞추더니 시간이 됐다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출입구를 향해 가던 당신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말한다.
"제가 질투하는 그 사람은 이 책을 어떻게 해석할지 궁금하네요. 그런데 보여 주지 않을 거예요. 그의 대답이 멋지면 또 속이 울렁거릴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