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세 시간이란다. 미팅에 나가서 말 한마디 없이 계속 술만 마시다가 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입을 열어서 별명이 '세 시간'이었다. 술에 취해 뱉은 말은 늘 똑같았다.
"OOO 닮았어요."
미팅에 나온 사람에게 유명인을 닮았다고 하면 반응은 두 가지였다. 주변에서는 박수를 쳤고, 당사자는 썩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술에 취했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소주는 어색하고, 불편하고, 초라한 감정을 무디게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 십 대와 이십 대는 열등감과 질투심에 짓눌려 살았다.감정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구부정한 자세로 고개를푹 숙인 채 걸었다. 자신감이 사라질수록 자괴감이 커졌다. 나에게 잔인하고 야박했기에 타인도 나를 그렇게 볼 거라 단정했다. 낯가림은 갈수록 심해졌다. '뭣도 아닌 애가 나댄다'라고 욕할까 봐 침묵했고, 알면 알수록 나를 싫어할까 봐 선을 그었다. 하지만 귀엽다거나, 마음에 든다거나, 괜찮다거나 하는 소리를 들으면 순식간에 경계가 무너졌다. 푼수처럼 웃고 온 날은 후회했다. 다음에는 진짜 철벽을 치겠다고 다짐했다.
외모에 대한 열등감도 컸지만 지적 열등감은 더 심했다. 잘난 체일까 봐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 못했으면서 멍청하게 보일까 봐 모르면서 안다고 우겼다.그래서였나 보다. 그 시기에 천재에 민감했다. 제목에 '천재'가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책을 펼쳤고, 드라마와 영화에 천재가 나오면 관심이 갔다. 일상적인 일은 서툴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서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는 사람, 날카로운 눈빛과 꽉 다문 입술에서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사람,자기를 싫어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사람, 광기마저 멋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들은 매력이 넘치고 넘쳤다.
얕보이고 싶지 않은 절박함이 천재가 되고 싶은 간절함으로 변했다. 미성년자일 때에는 꾸중을 듣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그런데 성인이 되자 참을 수 없었다. 나이가 더 많아서, 사회생활을 더 오래 해서, 지위가 높아서 사람이 사람을 깔보고 혼내는 건 옳지 않았다. 조언이라면서 비난과 악담을 넘나드는 언어를더는 견딜 수 없었다. 함부로 나를 대하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부드럽고 강한 어조로 그들의 태도를 지적하고 싶었다. 해박한 지식과 철저한 논리로 상대를 설득하려 했는데 감정이 앞설 때면 머릿속에서 단어와 문장이 뒤죽박죽 엉켰다. 정작 해야 할 말은 하지 못한 채 연신 죄송하다고 했다. 소리로 나오지 못한 언어가 가슴만 쾅쾅 쳤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다면 그들을 만족시키기로 했다. 상대가 눈살을 찌푸리지 않는지, 숨소리가 거칠어지지 않는지, 입술 근처에 있는 근육이 굳어버린 건 아닌지 살피기로 했다. 최대한 갈등을 만들지 않고, 좋게 좋게 지내고싶었다. 안타깝게도 눈치를 보는데도 눈치가 없어서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지 못했다.
죄절하고 절망할수록 천재에 대한 갈망은 커졌다. 노력하는 천재가 아니라 타고난 천재였으면 했다. 하나를 알려주면 그것과 연결되는 모든 것을 알았으면 했고, 어마어마한 지식을 바탕으로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고 싶었다. 천재는커녕 중간도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혹시나, 하는 기대를 버릴 수 없었다.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번뜩이는 재능을 발휘할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한 번씩 이상하다거나, 특이하다거나, 독특하다는 얘기를 들으면 천재가 갖고 있는 특별한 본능을 나도 갖고 있다고 믿었다. 그때는 천재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일탈인 줄 알았는데 돌아보면 자잘하고 찌질한 행동이었다. 카리스마와 멋은 조금도 없는, 너무 유치해서 모두의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였다.
어이없게도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허상에 빠져 겁만 잔뜩 먹었다. 천재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는데 내가 만든 틀에 나를 가두고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천재가 아니어도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내가 나를 형편없게 만들었다. 어차피 안 된다는 체념에 시도조차 하지 않았고, 안 되면 안 된다는 두려움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했다. 불가능을 꿈꾸다가 가능했던 많은 것을 놓쳤다. 생각할수록 그 시절 내가 너무 아깝고 안타깝다.
타임슬립 드라마를 보다가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미팅이든 모임이든 적극적으로 사람을 만나겠다고 결심했다. 낯선 이의 이야기에 맞장구치고, 내 관심사를 얘기하고, 가볍지도 진지하지도 않은 대화를 나누면서 점점 깊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고, 알아야 할 것을 알아가면서 관계와 관계를 연결하고 싶어졌다. 내 약점을 정직하고 보여주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는 나의 스물여섯을 상상한다. 속으로 끙끙 앓기만 했던 짝사랑 그 사람에게도 꼭 고백할 것이다. 그가 나를 거절하면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위로주나 사라고 해야지.
앗! 그런데 나 지금 천재가 되고 싶다는 불가능을 버리고,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불가능을 꿈꾸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