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쯤, 후배와 업무용 차량에 올랐다. 신형 자동차라 모든 게 새롭고 깨끗했다. 감탄사가 끝나자 물음표가 찾아왔다.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해야 하는데 작동법을 알 수 없었다. 기계를 만지작거리며 후배가 멋쩍게 웃었다. 그는 차량에 탑재된 내비게이션이 처음이었고, 나는 운전을 하지 못해 자동차 시스템이 낯설었다.
"OO 씨, 이거 아니야?"
나는 손가락으로 모니터에 있는 아이콘을 가리켰다. 그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이것저것을 눌렀다.
"내가 말한 대로 하면 될 것 같은데."
이번에도 후배는 단호했다. 해봤는데 아니라면서 방금 전에 눌렀던 버튼을 또 눌렀다. 그는 미안하다고 했고, 나는 괜찮다고 했다.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외근을 핑계로 여유를 부릴 수 있어 좋았다. 일이 잔뜩 쌓여 있는 공간을 탈피한 것만으로도 편했다. 돌아가면 처리해야 할 업무가 많았기에 더 늦게 가고 싶었다. 우리는 잡담을 나누면서 이것저것 만졌다. 모니터 안에 있는 아이콘부터 모니터 밖에 있는 버튼까지 같은 곳을 여러 번 누르면서또 했다며 웃기도 했다.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시간이 지났다. 20분은 너무했다. 후배는 당황했고, 나는 초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에 내가 제시한 방법이 맞았다.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이거 아닐까,라고 했다. 이번에도 후배는 똑같았다. 그는 확신에 찼고, 나는 주저했다. 그로부터 5분이 지난 후에야 우리는 출발할 수 있었다. 내가 얘기했던 게 맞았다. 연신 미안하다는 후배에게 나도 사과했다.
"내가 확신이 없었잖아. 나도 미안해."
이 얘기를 들은 선배는 우리가 귀엽다며 웃었고, 대표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가 옳다고 우기는 후배보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내가 대표에게는 더 큰 문제였다. 대표에게 나는 후배에게 끌려다니며 시간을 허비한 한심한 선배이자, 할 수 있는 일도 자신 있게 나서지 못하는 답답한 구성원이었다.그것 때문에 열 개의 강점을 한 개의 단점으로 말아먹는 인간이라고 나를 평가했다. 그 말이 때로는 아프게, 때로는 화나게 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믿을 수 없는데 너는 믿을 수 있어."
뭔가를 판단하거나, 선택해야 할 때 자주 이 말을 했다. 네가 나보다 '낫다'와 내가 너보다 '낮다'는 전제가 의식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렇다고 온전히 상대를신뢰하지도 않았다. '나보다는 네가 낫다'일 뿐, '전적으로 너를 믿는다'는 아니었다. 나를 믿지 못하기에 아무도 신뢰할 수 없었다. 겉으로는 그들의목소리에 맞장구쳤지만 제대로 듣지 않았다.
그날, 후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운전을 하지 못하고, 새로운 문물에 약하고, 기계와 친하지 않으니 나보다는 후배가 낫다고 생각했다. 내 의견에 강하게 아니라고 말하는 후배가 처음에는 믿음직했다. 다음에는 서운했다. 그다음에는의심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가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잘못된 행동을 지켜만 봤다. 내가 제시한 방법이 맞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혹시라도 틀렸을까 봐 '이거 아닐까'라는 질문 형식으로 소심하게 내 의견을 전달했다. 시간이 지체되자 초조했지만 겉으로는 괜찮다고 했다.그렇게 나는 후배가 계속 실수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부끄럽지 않았다. 그래서 후배가 미안하다고 하자마자 바로 사과할 수 있었다.그건 승자가 가질 수 있는 여유였다. 내가 옳았고, 네가 틀렸기에 베풀 수 있는 너그러움이었다. 내 말을 무시하고 고집을 부린 후배가 얼마나 무안할지 알았기에 그 정도 아량은 보일 수 있었다. 일정이 늦어진 원인은 내가 아니었다. 네가 결정하고 행동했으니 그 책임에서 나는 자유로웠다.
많은 부분에서 나는 이런 태도를 취했다. 상대에게 판단을 맡기고 선택하게 했다. 나는 다 좋으니 네가 알아서 하라고 했다. 어차피 책임은 그들의 몫이었다. 나는 내가 짊어질 수 있는 최소한의 무게만 감당하면 됐다. 그 무게가 이렇게 불어날지 몰랐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내게 확신을 가져야 했다. 과정에 충실하고, 결과에 수긍하면서 다음을 준비해야 했다. 시도하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희망하면서 성장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실패를 미리 단정하고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하는 동안 내내 불안에 떨면서 어떻게든 빠져나올 궁리만 했다. 힘든 과정은 거치고 싶지 않으면서 원하는 것만 취하려 했다. 나를 믿을 수 없다면서 너도 믿지 않았다. 너를 따른다고 해놓고 의심했다. 의심했으면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요즈음 나는 결정을 하고 실수를 하는 중이다. 길을 찾는다든가, 음식점을 선택한다든가, 약속장소를 정한다든가, 대중교통과 숙소를 예약하는 등 아주 사소한 일이다. 이렇게 별 것 아닌 일조차 주도적으로 한 적이 거의 없다. 대부분 따라다니거나 알아서 하라고 맡겼다. 어제도 길을 잘 찾지 못해 헤매면서 사과했고, 음식이 맛이 없어 또 사과했고, 예약을 제대로 했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다행히 함께 하는 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며 나를 보완해주고 있다. 이깟 게 뭐 대수라고 그동안 너무 움츠렸다.
앞으로도나는 계속 선택해야 하고,그 무게가 나를 짓누를 것이다. 회피하고 싶고, 떠넘기고 싶어 괴로워할지도 모른다. 그럴 수 있어도 올바른 곳으로 갔으면 한다.진짜 사과하고 책임져야 할 때,부끄럽고 무섭다며 도망치지 않기를 바란다. 아닌 건 아니라고 정직하게 말하고, 잘 알지 못할 때에는 다른 이들과 함께 방법을찾아가면 좋겠다. 그러려면 단단해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