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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 떨림 Oct 09. 2020

<이젠 정말 성실하고 싶은 날> 행복한 청소부

- 이런 날 그림책


<이런 날 그림책>의 '날'은 중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떠한 날(day)이나 경우를 의미하기도 하고 '나(나를, me)'라는 주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림책에 마음을 기대 울고 웃었던 기억을 당신과 나누고 싶습니다. 


행복한 청소부, 모니카 페트 글, 안토니 보라틴스키 그림, 김경연 옮김, 풀빛 펴냄


초등학교 4학년인 나는 엄마 손을 붙잡고 안간힘을 썼다. 엄마는 거칠게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끌려가지 않으려 버텼다. 말끝마다 '제발'이라는 단어를 붙이면서 애원했다. 동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왜 그러는지 물었다. 엄마는 웅변학원을 보내고 싶은데 애가 이런다고 하소연했다.


엄마는 숫기가 없는 나를 변화시킬 해결책으로 웅변학원을 찾았다. 그곳에 가면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소리 높여 외칠 수 있다고 기대했다. 나는 죽어도 그곳에 갈 수 없었다. 사람들 앞에 서서 소리 높여 외칠 바에는 땅을 파고 혼자 사는 게 나았다. 처음으로 엄마의 뜻을 거부하면서 맞섰다.   


서로가 지칠 때쯤 나는 손가락으로 집 앞에 있는 피아노 학원을 가리켰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곳을 지나갈 때마다 피아노 소리를 들었지만 무심하게 흘렸다. 그런데 그 순간 너무 절박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것처럼 간절했다. 엄마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사정했다. 웅변학원 대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엄마는 화가 깔린 걱정과 피곤과 체념을 늘어놓고는 학원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엄마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무척 조심스럽고 순박하고 상냥했다.


그렇게 해서 피아노를 배웠다. 잘 치지 못했다. 손이 작고 손가락이 짧은 것도 이유였지만 재능이 없었다. 이해력이 부족했고, 감각도 없었다. 시키는 대로 하긴 했는데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피아노 학원에 가는 게 좋았다. 그곳에 가면 만화잡지를 볼 수 있었다.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피아노 한 대마다 공간이 분리되어 있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도 있었다. 웅변학원에 가지 않았기에 뭐든 다 좋았다.


보통 한 시간쯤 되면 선생님이 방에 들어와 피아노 치는 것을 봤다. 칭찬과 함께 부족한 부분을 얘기해준 후 집에 가도 된다고 알려줬다. 그 뒤에 인사를 나누면 끝이었다. 그날은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선생님이 오지 않았다. 세 시간이 지날 때까지 나는 그 방에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집에 갔고 학원에는 나와 선생님만 남았다. 집에 너무 가고 싶었는데 방문을 열고 나갈 자신이 없었다. 피아노를 치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면서 가슴을 졸였다. 왜 집에 가라는 말을 하지 않는지, 내가 먼저 물어봐도 되는지 망설이기만 했다. 저녁 여덟 시가 지났을 때, 청소기를 들고 선생님이 내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깜짝 놀라면서 내 이름을 불렀다. 지금까지 연습을 하고 있었냐며 나를 기특하게 바라봤다. 그리고 꼭 안아주며 이런 말을 했다.


"그래 OO아, 세상은 능력 있는 사람이 성공하는 게 아니라 너처럼 성실한 사람이 성공하는 거야."


늦은 시각까지 버티고 있는 제자에 대한 대견함과 늦은 시각까지 아이를 보내주지 못한 미안함이 섞인 말투였다.


그때 내가 느낀 건 죄책과 비애였다. 나는 성실하지 않았다. 가도 되는지 물어보지 못해서 계속 남았을 뿐이었다. 피아노를 거의 치지 않은 채 고민하고 망설이고 눈치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무엇보다 나는 성실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노력 같은 건 하지 않아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능력자가 되고 싶었다. 건들거리면서 대충대충 하는데도 눈부신 결과를 만들어내고 싶었다. 피아노를 잘 치고 싶은 욕심은 없었지만 능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면서부터 흥미를 잃었다.

 

성실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날의 죄책과 비애가 떠올랐다. 성실하지 않은 데다가 성실하고 싶지 않은 내게 따라오는 그 단어는 꽤 부끄러웠다. 욕먹지 않으려 기를 쓴 게 성실이라면 매번 그렇게 할 자신이 없었다. 쉽게 좌절하고, 자주 무기력하고, 집에서 혼자 빈둥거리는 것을 좋아하는 내게 성실은 어울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성실한 사람이 아니라 능력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답답함''융통성 부족'이 포함되어 있을 것 같은 성실을 거부하고 싶었다.   



『행복한 청소부』를 처음 읽었을 때, 감동이나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체 사람들은 이 책 어디를 보고 좋아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십 년에 거쳐 다섯 번 정도 읽었다. 생각이 나지 않아 읽었고, 읽어야 해서 읽었고, 누군가처럼 감격하고 싶어 읽었다. 읽을 때마다 감정이 달라지고, 보지 못했던 게 보였지만 그게 전부였다. 큰 울림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물을 마시러 가는 중에 『행복한 청소부』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너무 뜬금없어 피식 웃었는데 자꾸만 그 장면이 선명해지면서 나를 자극했다. 대체 지금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회의가 들자 청소부 아저씨가 부러웠다. 시와 음악에 빠져 행복해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사다리에서 내려올 때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는 상황도 아니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이 온 것도 아니었다. 내가 그토록 멀리 하고 싶었던 성실한 모습이 자꾸만 나를 흔들었다.


청소부 아저씨는 몇 년 전부터 작가와 음악가들의 거리에서 표지판을 닦고 있다. 아저씨는 금방 더러워지는 표지판을 새것처럼 보이게 할 정도로 열심히 한다. 다른 청소부들 뿐 아니라 청소부 반장과 청소국 국장도 아저씨를 최고라 인정한다. 아저씨는 자기 직업을 사랑하고, 자기가 맡은 일을 사랑한다. 어느 날, 한 아이가 엄마에게 표지판을 가리키며 아저씨가 글자의 선을 지워버렸다고 외친다. '글뤼크(독일어로 '행복'이라는 뜻) 거리'를 '글루크 거리'로 만들었다는 아이의 말에 엄마가 글루크는 작곡가 이름이라고 알려준다. 아저씨는 글루크를 포함하여 자신이 닦는 표지판 속 인물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때부터 아저씨는 음악회와 오페라 공연을 보러 다니고, 작가들이 쓴 책을 읽는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표지판을 돌보는 아저씨는 그 위에 새겨진 이름들을 어루만지면서 자기 자신에게 음악과 문학에 대해 강연을 한다. 사다리 위에서 표지를 닦는 아저씨는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그의 강연을 듣고 있다.


표지판은 말야, 닦아놓았나 싶으면 금방 다시 더러워지지. 그러나 훌륭한 표지판 청소부는 그런 일에 기죽지 않아. 더러움과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 거야.

 

'더러움과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은 채 표지판을 닦는 그의 모습이 내 뒤통수를 잡아당겼다. 표지판에 적힌 이름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 후에 만족스럽게 웃는 그를 상상하자 이상하게 가슴이 먹먹했다. 청소부 아저씨가 자신의 일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열심히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글자의 선을 지워버렸다는 아이의 외침에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청소부 아저씨가 자신의 일에 건성이었다면 글루크는 작곡가 이름이라는 목소리를 흘려버렸을 확률이 높다. 그가 자신의 일에 게을렀다면 아이와 엄마의 대화에서 뭔가를 느꼈다 해도 거기에서 그쳤을 가능성이 크다. 그가 자신의 일에 부지런했기에 여전히 청소부이지만 이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청소부가 될 수 있었다.



청소부 아저씨가 항상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금세 더러워지는 표지판을 보면서 화가 났을 테고,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들 때문에 서글펐을지 모른다. 한 번쯤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서 두려웠을 것이다. 몸이 고된 날에는 다 그만두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그는 꾸준하게 열심히 그 일을 하면서 행복을 쌓았다.


온종일 무기력했다. 사소한 일에 감정 소모를 하느라 피곤했다. 해야 할 일을 계미루면서 부담감만 높였다. 원하는 일에 성과는 없고, 꿈은 너무 멀리 있었다. 어차피 이번 생은 망했다는 패배의식까지 생기자 다 귀찮았다. 피아노 방문을 열까 말까 망설이던 그때처럼 나는 아직도 방 안에서 고민만 하고 있었다. 그런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나와 달리 청소부 아저씨는 자신의 일에 행복을 느끼고, 만족하고, 변함없이 열심히 일했다. 그래서 불쑥 그가 떠올랐나 보다.     


덕분에 좀 더 진지하게 성실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그동안 성실은 거창하고 대단한 일에 땀을 쏟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  무거움에 갇혀 성실하게 살 자신이 없었다. 성실하지 않은 나를 성실하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의 기대를 무너뜨릴까 봐 두려웠고, 내 실체를 알고 실망할까 봐 겁이 났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정성을 다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진정한 성실은 거창하고 대단한 일에 을 쏟는 게 아니었다. 너무나 당연해서 하찮게 보이는 일을 놓지 않고 묵묵하게 해 나가는 것이었다. 그 소소한 일을 해나가면서 능력이 쌓이는 건데 그 과정을 건너뛰고 싶었다. 나를 위해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했는데 타인의  눈치만 살폈다.


이젠 정말 성실하고 싶다.


래 놓고 또 일을 미룬다.


  결과를 지속시키는 비결은 발전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일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면 성과를 낼 수 있다. 운동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건강을 얻을 것이다. 배움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지식을 얻을 것이다. 저축을 멈추지 않는다면 부를 쌓을 것이다. 배려를 멈추지 않는다면 우정을 얻을 것이다. 작은 습관들은 더하기가 아니다. 그것들은 복리로 불어난다. 이것이 아주 작은 습관의 힘이다. 변화는 미미하다. 하지만 결과는 상상 그 이상이다. 

  - 아주 작은 습관의 힘, 제임스 클리어 지음, 이한이 옮김, 비지니스북스 펴냄 - 



* 행복한 청소부, 모니카 페트 지음, 김경연 옮김, 풀빛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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