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날 그림책>의 '날'은 중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어떠한 날(day)이나 경우를 의미하기도 하고 '나(나를, me)'라는 주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그림책에 마음을 기대 울고 웃었던 기억을 당신과 나누고 싶습니다.
<그럴 수도 있는 날> 버스를 타고
버스를 타고, 아라이 료지 지음, 김난주 옮김, 보림출판사 펴냄
비합리적 신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자기 패배적 행동이나 건강하지 못한 감정에 이르게 하는 역기능적, 비논리적, 비현실적인 신념'이라고 나온다. '나는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받아야만 해',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성공해야 해', '부모는 자식을 위해 희생해야 해'. '사랑한다면 모든 것을 다 받아줘야 해' 등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정리하자면 말도 안 되는 것들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게 비합리적 신념이다.
내가 갖고 있는 비합리적 신념 중 하나는 '나는 실수하면 안 돼'다. 다행히 모든 일에 이러지는 않는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서, 내가 원하는 분야에서, 내가 자신 있는 부분에서는 완벽해야 한다. 그냥 완벽하다가 아니다.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의 카리스마와 능력을 지녀야 한다. 독보적이어야 하고, 유일해야 한다. 그래야 하는데 현실은 자꾸만 쪼그라들고 있다. 나도 안다. 형편없는 자존감과 비뚤어진 우월감이 만든 결과라는 것을 말이다.
내 기대와는 전혀 다른 진짜 나 때문에 조바심과 분노와 무력감과 우울이 자주 온다. 실수해도 괜찮다는 말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정말 내 실수를 받아줄까, 하는 의심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내가 나를 다그치고 있는데 상대까지 나를 다그치면 삶의 의미가 무너진다. 별 것 아닌 일에도 그랬다.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내 존재가 구겨지는 고통 때문에 문제 해결 능력이 약했다. 그때는 어렸으니까, 그때는 경험이 없었으니까, 그때는 어리석었으니까 생각했는데 여전히 나는 이러고 있다. 그때보다는 나아진 줄 알았는데 그때보다 나아진 상황 때문에 강하게 드러나지 않을 뿐이었다. 여전히 비합리적 신념은 툭툭 튀어나오고, 이제는 그것과 싸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수해도 괜찮아, 잘 될 거야, 그걸로 충분해, 괜찮아질 거야 등등의 말 중에 내가 고른 건 '그럴 수도 있지, 뭐'다. 잘 못 할 수도 있지 뭐, 실수할 수도 있지 뭐, 운이 없을 수도 있지 뭐, 버스가 안 올 수도 있지 뭐, 버스가 왔는데 사람이 많아 못 탈 수도 있지 뭐, 룸룸파룸 룸파룸. 대수롭지 않게, 누구나 그렇게 살고 있고 나만 못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사실 나도 당신도 그렇게 못나지 않았으며 어떤 부분은 꽤 괜찮다는 진실을 받아들이면서,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약간은 대책 없는 긍정이 내게는 필요하다. 아라이 료지의 『버스를 타고』의 주인공처럼 기다리는 버스 대신 트럭이나 낙타가 지나가도 여유를 가지면 된다. 그러다 밤이 오면 정류장에서 잠을 자면 되고, 아침이 오면 다시 라디오를 켜면 된다. 그렇게 기다리던 버스에 사람이 많아 탈 수 없으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된다. 굳이 버스를 탈 필요는 없다. 룸룸파룸 룸파룸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다시 길을 걸으면 된다.
주인공이 버스를 타지 못했는데 제목이 『버스를 타고』다. 버스를 타고 멀리멀리 갈 거라는 바람을 이루지 못했는데 제목은 『버스를 타고』다. 그럴 수도 있다. 주인공이 책 너머 어디에선가 버스를 탔을 테고, 과거에 언젠가는 버스를 탔을 테니 제목이 이상한 게 아니다. 그리고 이상한 게 뭐 어떻다고. 한 번도 버스를 탄 적이 없다 해도 그게 뭐 대수라고. 그럴 수도 있지 뭐. 내가 원하는 게 오지 않더라도 그럴 수 있다. 원하는 것 중 많은 것을 얻었으니 룸룸파룸 룸파룸. 좀 더 기다리다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되니 룸룸파룸 룸파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