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무섭지 생활은 괜찮습니다

『나의 작은 인형 상자』 X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

by 꿈의 떨림



피곤한데 익숙합니다



"너도 같이 가지 않을래?" 유진은 그녀에게 물었어요.

"아니. 난 지금 못 가.
매일 매일 거울을 보며 준비하지만, 뭔가 부족해 보여.
그걸 찾고 완벽해지면, 그때 나갈 거야."

그녀의 모습이 유진에게는 고단해 보였어요.

- 나의 작은 인형 상자 -


며칠째 심장이 저리면서 배가 아팠습니다. 안 하고 싶은데 하고 싶기도 한 일이 들어왔거든요. 몇 년 동안 못 한다며 거절했는데 더는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수락하고는 후회가 깔린 긴장을 했지요.


"이런 내가 정말 싫다"라고 중얼거리다가 손바닥으로 입술을 막았습니다. 더는 나를 미워하지 말자고 했는데 또 어겼습니다. 그런데 그럴만해요.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닌데 자꾸만 뒤로 물러서는 저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어요. 운 좋게 들어온 일감을 마다하는 제게 잘한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거절한 후에 아쉬워하고, 승낙한 뒤에 후회하는 저를 어쩌면 좋아요.


할 수 있다는 응원과 뭐라도 해야 하지 않느냐는 닦달과 전에 했던 일인데 왜 그러느냐는 의문을 들었습니다. 그 덕에 심장에 가해지는 중력이 더 세졌습니다. 그 여파로 배가 울렁거리고 한숨이 연달아 나오더군요. 안 하고 싶다는 거부감과 못하겠다는 부담감과 더는 그러면 안 된다는 질책과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뒤섞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습니다. 거절할까도 생각했는데 번복하면서 신뢰감을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누구보다 저 자신에게 말이죠.


왜 이러는지 알아요. 실패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때문이죠. 잘할 수 있다는 누군가의 기대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으면서 겨우 이 정도인 제 능력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 중에 시도하고 싶은 욕심과 뭐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과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섞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변덕만 부렸습니다. 너무 피곤한 이 모습이 이젠 너무 익숙해져 버렸어요.





또 문 앞에서 망설이고 있습니다


올해는 뭐든 시도하고 실패하겠다던 다짐은 순간의 감정이었고 거짓말이었나 봅니다. 작년 12월에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뭐든 하겠다고 의욕을 보였는데 막상 새해가 밝으니 다시 또 그대로네요.

또 문 앞에서 망설이고 있습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번에는 손잡이를 잡았습니다. 열어야 한다고 손에 힘을 주었다가 아직 아니라며 놓기를 반복하고 있지만요. 어쨌든 결과는 똑같습니다. 늘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앞서 가는 사람들이 미치게 부럽습니다. 그만큼 제가 한심하고요. 이러면 안 된다는 자책까지 더해져 더 자주 머뭇댑니다.


문을 열 준비만으로도 지치네요.


유진은 케이크를 맛있게 먹으며 여인에게 말했어요.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아니, 난 못 가.
난 아직 가진 게 부족해.
좀 더 쌓고 풍족해지면 그때, 나갈 거야."

- 나의 작은 인형 상자 -



삐삐이고 싶은데 유진의 분신들입니다



『나의 작은 인형 상자』의 유진은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친구들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할 정도로요. 유진은 이불 속을 좋아해 늘 그곳에 몸을 숨깁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발로 세상을 걸어보고 싶다는 욕구를 느낍니다. 유진이 침대에서 일어나 현관까지 가는 동안 이불 속 소녀, 화장대 앞에 앉아 있는 여자, 설거지를 하는 여인,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 남자를 만납니다. 유진은 그들에게 같이 나가자고 제안합니다. 그들은 모두 못 간다고 대답합니다. 지금 있는 곳이 따뜻하고 아늑해서, 완벽하지 않아서, 가진 게 부족해서, 바깥세상은 위험해서 나갈 수 없다고 합니다. 사실 이들은 모두 유진의 분신들입니다. 현관문을 열기까지 유진은 자신의 내면을 넘고 넘어야 하죠.


유진과 달리 삐삐는 거침이 없습니다. 넘어지고 다치는 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신나게 넘어지고 다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판단하는지 크게 신경 쓰지도 않습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지요.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아요. 필요할 때 알면 되니까요. 좋으면 진심을 다해 좋다고 표현하고, 미안하면 바로 사과할 줄도 알지요. 불의를 참지 못해 나쁜 사람들을 응징하고, 사랑과 정의가 넘쳐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지나치지 못합니다. 말 한 마리를 번쩍 들어 올릴 정도로 힘이 세고,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즐겁게 움직입니다. 상상마저 검열하는 저와는 달리 삐삐의 머릿속 세상은 폭죽이 팡팡 터집니다. 그 신선하고 재미있는 상상이 삐삐의 입에서 나올 때면 거짓말마저 귀엽습니다. 저 문을 열까 말까 고민하는 저와는 달리 시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된다, 안 된다를 계산하지 않고 하고 싶으면 바로 실행하죠. 실패를 하더라도 툭툭 털고 일어나 다음을 준비합니다.


삐삐가 꿈꾸듯이 바위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늘을 나는 건 어려울까?"
바위 아래는 가파른 절벽이었고, 땅바닥과는 한참 떨어져 있었다.
삐삐가 계속 말했다.
"사람은 날아서 내려가는 것 정도는 배워야 해. 날아서 올라가기는 어려울 테니까. 쉬운 것부터 해 보는 게 좋아. 그래, 한번 해 볼래."
토미와 아니카가 한 목소리로 외쳤다.
"안 돼, 삐삐. 제발 그러지 마!"
하지만 삐삐는 이미 바위 끝에 서 있었다.
"날아, 날아, 날파리. 날아, 날았다!"
삐삐는 '날았다'고 말하는 순간 팔을 들고 바위에서 뛰어내렸다. 곧이어 "쿵!" 소리가 났다. 땅에 부딪친 것이다. 토미와 아니카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위에 엎드려 밑을 내려다보았다.
삐삐는 발딱 일어나 무릎을 툭툭 털더니 거침없이 말했다.
"날갯짓하는 걸 깜빡했지 뭐야. 그리고 뱃속에 팬케이크가 너무 많이 들어 있었나 봐."

- 내 이름은 삐삐롱스타킹 -


남에게는 쉽게 말하지만 나에게는 무척 어려운 문제


저와 똑같은 친구가 있습니다. 실수가 두려워 확인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느라 일처리가 늦고, 타인에게 무시를 당할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인정을 갈구합니다. 불안이 높아 괜한 걱정까지 보태고, '이상적인 나'를 만들어놓고 그렇지 못한 자신 때문에 한껏 위축되어 있지요. 실패가 두려워 시작마저 겁을 내는 모습이 저와 꼭 닮았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와 얘기를 할 때면 잔소리가 길어집니다. 그 마음이 뭔지 알기에 공감도 가고,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화가 나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 굳이 그러고 있는 친구의 모습이 꼭 저 같아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라고요. 처음에는 부드럽게, 공감을 섞어가면서 친구의 고민에 반응하다가 결국에는 조언인지 비난인지 모를 소리를 퍼붓습니다. 그리고 뒤늦게 후회하지요.


며칠 전에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시키는 대로 일하는 자신이 답답하다며 한숨을 쉬더라고요.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럴 용기가 없고, 그렇게 한 뒤에 뒷감당이 버겁다며 속상해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일을 하니 인정을 받는 건가 싶다면서 복잡한 심정을 털어놓더군요. 이번에는 친구에게 화가 나지 않았어요. 너도 참 힘들겠구나, 그런 마음이었죠. 이 친구를 만난 지 28년 만에 처음으로 네가 꼭 나 같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래서 네 마음을 너무 잘 안다고, 그동안 네가 많이 안타까웠지만 그보다 답답해서 화가 났다고 했지요. 웃음을 섞어가며 담담하게 말하고 나니 이렇게 생겨먹은 너와 나는 어쩔 수 없구나,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내가 가진 스펙에 비해 아는 게 너무 없어. 사람들이 내 이력을 보고 기대를 하는데 정작 나는 껍데기뿐이라 너무 무서워. 아는 게 많아지면 자존감이 높아지겠지?"


친구의 질문에 단호하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존감은 못난 나도 괜찮다고 해야 높아지는 거라고 했지요. 지금 네가 갖고 있는 게 많은데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면 뭘 해도 똑같다고 덧붙였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고, 그것을 콤플렉스로 갖고 있기에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자존감은 늘 바닥이라고 했어요. 아는 게 많아지면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잘난 척을 하는 재수 없는 인간이 되거나, 알면 알수록 부족하다고 느끼는 못난이가 된다고도 했지요.


친구에게 이 말을 하고는 저 자신에게 놀랐습니다. 사실 저 역시 지식이 풍부하고 잘하는 게 많아지면 자존감이 높아진다고 생각했거든요. 시작 앞에서 겁이 나는 건 갖고 있는 게 너무 없어서라고 믿었어요. 삐삐처럼 힘이 센 부자라면 거침없이 살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했지요. 아무리 돈이 많고 강한 힘을 가졌다 해도 글을 읽지 못하면 열등감에 시달릴 게 뻔한데 말이에요. 그런 제가 친구에게 네가 가진 것부터 제대로 보라고 강조했습니다. 너는 나보다 심각하다며 놀리기까지 했어요. 저보다 훨씬 잘하고 있는 친구를 말이죠.


친구에게 쉽게 떠들고는 머릿속이 복잡했습니다. 제가 뱉은 말이 제 가슴을 콕콕 찌르더군요. 글자를 잘 쓰지 못해도, 수학 문제를 풀지 못해도, 청소를 싫어해도 삐삐처럼 유쾌하고 당당해야 자존감이 높아진다는 말이 자꾸만 제 마음을 긁었습니다.



"자, 이제 삐삐가 얼마나 아는지 좀 알아볼까? 넌 제법 컸으니까 아는 것도 많겠지? 수학 문제부터 물어 불게. 7 더하기 5는 몇이지?"
삐빠는 놀라고 당황하여 선생님을 쳐다보며 말했다.
"글쎄요, 선생님도 모르는 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아이들은 모두 놀란 눈으로 삐삐를 지켜보았다.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그런 식으로 대답하면 못쓴다고 타일렀다.
삐삐는 이내 잘못을 뉘우쳤다.
"죄송해요. 몰랐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선생님이 말했다.
"그래,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라. 7 더하기 5는 12란다."
"그것 봐요! 잘 알고 계시면서 왜 물어보셨어요?"
선생님은 삐삐의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기로 마음먹고 계속 질문을 했다.
"그럼 삐삐, 8 더하기 4는 몇이니?"
삐삐는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한 67쯤?"
"아니야. 8 더하기 4는 12란다."
삐삐가 말했다.
"선생님, 이건 정말 너무해요. 아까는 7 더하기 5가 12라고 하셨잖아요. 아무리 학교라지만 그건 정말 말도 안 돼요. 그렇게 바보 같은 장난이 재미있으시면 혼자서 구석에 앉아 수학 공부나 실컷 하시지 그러세요? 우린 술래잡기나 하고 놀게 내버려 두시고요."

- 내 이름은 삐삐롱스타킹 -



드디어 문을 열었습니다



친구와 통화를 마치고 내내 양심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더는 망설일 수가 없더라고요.


"이미 준비는 다 됐는데 뭘 더 한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이젠 직접 할 때예요. 그래야 뭐가 부족한지 알 수 있고, 채울 수 있어요. 자신이 갖고 있는 걸 믿어봐요."


언젠가 L이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꾸만 못 한다는 제게 직접 해보고 그 뒤에 결정을 내리라고 했지요. 그래야 뭐가 미흡한지 알 수 있고, 이 일이 나와 맞는지 아닌지도 확인할 수 있다면서요. 해보지도 않고 미리 단정 짓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 말에 저는 더 움츠렸습니다.





"아니. 난 지금 못 가.
매일매일 거울을 보며 준비하지만, 뭔가 부족해 보여.
그걸 찾고 완벽해지면, 그때 나갈 거야."

그녀의 모습이 유진에게는 고단해 보였어요.

유진은 살포시 그녀의 눈을 가렸어요.
"넌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도 충분히 예뻐."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유진의 따스한 손의 온기를 느꼈어요.
마음이 점점 편안해졌어요.

- 나의 작은 인형 상자 -


아무것도 하지 않아 겁이 나는 거야. 막상 하면 괜찮아. 네 생각보다 넌 더 근사하고 멋져. 부족한 건 채우면 되고, 안 되면 그만둬도 돼. 그러니 겁먹지 말고 해 봐. L이 했던 말을 그대로 친구에게 옮기면서 제가 뭘 해야 하는지 깨달았습니다.


안 된다며 미리 포기한 일 하나를 처리했습니다. 오랜만에 새벽까지 작업을 하면서 뿌듯하고 행복했습니다.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크게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생깁니다. 원하는 결과가 나와도 겁을 먹지 않으려 해요. 때로는 행복 앞에서도 두려워지는데 그 마음을 조금씩 떨쳐내려 합니다.


심장을 쫄깃하게 만든 일과 관련된 서류도 담당자에게 보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만 할 때는 도망치고 싶었는데 서류를 작성하고, 계획을 세우니 그나마 괜찮아지네요. 이젠 다시 이불 속으로 숨을 수 없게 됐어요. 손잡이를 잡았다 놓았다 하는 저를 미워하지 않아도 되고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지만 며칠 전만큼 심각하지는 않겠죠. 여전히 심장이 저리면서 배가 아프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습니다.



생활은 생각만큼 심각하지 않습니다




모두 머릿속 두려움일 뿐이야. 괜찮을 거야.


유진이 자신의 분신에게 한 말을 되풀이해서 읽습니다. 제 불안과 두려움은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것일 뿐 실제 생활은 아닙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막상 무슨 일이 벌어지면 해결할 수 있을 테니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지구의 생태계를 위협하는 일도 아니고,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일도 아니고, 저와 타인의 삶을 무너뜨리는 일도 아닌데 그만큼의 엄살을 부렸네요, 민망하게도요


삐삐가 되고 싶다는 욕구도 이젠 접으려 합니다. 저는 삐삐가 될 수 없어요.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고요. 제게는 삐삐에게 없는 강점이 있습니다. 되도록 넘어지지 않으려 하고 다치지 않으려 하기에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생각하면서 행동하기에 무례하거나 제멋대로 굴지도 않지요. 허황된 거짓말로 사람들을 황당하게 만들지도 않고요. 글을 읽는데 큰 문제가 없고, 덧셈과 뺄셈 정도는 할 줄 압니다. 저의 어설프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고마운 친구들도 있고요.


삐삐에게 배울 점을 받아들이되 삐삐만큼 하지 못한다고 자책하거나 실망하지도 않으려 해요. 불가능한 '이상적인 나'에게서 나오라고 친구에게 강요했으니 저도 그래야지요.


문 앞에서는 걱정과 두려움이 가득했는데 문 밖에 서니 괜찮습니다. 열어야 할 문이 많이 있지만 하나를 통과했으니 다른 문은 지금만큼 힘들지 않을 겁니다. 대부분의 불안과 두려움은 문을 열지 않아 강해진다는 사실을 알면서 또 잊었습니다. 저도 사람인데 몇 번 더 반복하면 몸에 새겨지겠죠.


어쨌든 지금은 걱정보다 기대를 하는 중입니다. 심장이 한 번 더 쫄깃해지네요.



* 나의 작은 인형 상자, 정유미 지음, CULTURE PLATFORM 펴냄

*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글, 롤프 레티시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시공주니어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