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또래에 비해 덩치가 컸습니다. 키가 커서 늘 뒷자리에 앉았고, 짝꿍이 없을 때도 있었죠. 뚱뚱해서 놀림도 많이 받았어요. 조회 시간이 되면 다른 아이들 틈에서 돋보이는 게 싫어 어깨를 한껏 움츠리고 구부정하게 섰습니다. 날이 갈수록 쑥쑥 자라는 저를 보면서 엄마는 여자 키가 크면 좋지 않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165cm까지는 허용하겠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고도덧붙였죠.
엄마의 걱정과 제 나이를 들을 때마다 놀라던 어른들 덕에 저는 저를 무척 '큰' 아이로 인식했습니다. 옷을 살 때에도, 신발을 살 때에도 무조건 큰 것만 찾았어요. 원하는 옷을 사지 못할 때가 많아 속상한 날이 많았죠. 어느 집단에 가든 저보다 거대한 아이를 찾으면서 위로를 받으려 했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해서 키순서대로 줄을 서는데 제 뒤에 많은 아이들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랐어요. 저는 더 이상 크지 않았는데 친구들은 쑥쑥 자랐더라고요. 큰 키가 싫었는데 점점 앞번호가 되니 발꿈치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키가 작은 아이로 분류되었을 때는 믿을 수 없었지요. 165cm 이상이 될까 봐 걱정했던 엄마의 조바심이 무색할 정도로 저는 155cm 겨우 넘는 키로 살고 있습니다.
옷을 살 때에도 늘 큰 것만 골랐고, 나이에 비해 발이 크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저는 늘 제 사이즈보다 크게 입고, 크게 신었습니다. 230mm와 235mm 그 중간인 제 발에는 245mm의 신발이 있었지요. 저는 제 발 사이즈가 정말 245mm인 줄 알았어요. 친구들이 다 그랬고, 엄마를 비롯한 제 동생들이 250mm였기에 저도 그 언저리라고 믿었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큰 신발을 신고 다니면서 벗겨질 때마다 끈을 조여 맸습니다. 작은 사이즈를 신을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분명 발이 들어가지 않을 거라고 믿었으니까요. 큰 신발에 헐렁한 옷을 입고 어벙하게 다녔던 그 시절을 돌아보면 웃음만 나오네요.
제 발에 맞는 신발 크기조차 알지 못했으니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건 더더욱 불가능했습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기쁘고 힘든지, 내게 맞는 공부법이나 스타일이 무엇인지,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등등을 생각한 적도 없고, 찾으려 한 적도 없었지요.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긴 했지만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누르고 억압했습니다. 제 뜻대로가 아닌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그들이 조언하고 지적하는 대로 따르려 했죠. 나름 한다고 했는데 어긋날 때가 많았지만요.
따라 하다 망했죠
초등학교 5학년 때 한석봉이냐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글씨에 힘이 느껴진다는 선생님의 말에 부끄러우면서 우쭐했지요. 제가 쓴 글씨를 보고 또 보면서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6학년 때 만난 친구는 정말 글씨를 예쁘게 썼습니다. 그동안 보지 못한 글씨체였죠. 자음과 모음의 간격이 넓었는데도 균형이 잘 맞았고, 귀여우면서 힘이 느껴지는 어른의 글씨체였습니다. 그 친구의 글씨체가 너무 탐나서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음과 자음의 간격을 최대한 넓혔죠. 늘 글씨를 잘 쓴다고 칭찬을 받았는데 그 시기에는 누구도 그런 얘기를 해주지 않았어요. 오히려 누구의 글씨체를 따라 한다는 소리만 들었지요.
그 시절에 만난 또 다른 친구는 '오'와 '우'를 발음할 때마다 입술을 쭉 내밀고 동그라미를 만들었습니다. 그 모습이 신기하면서 귀여웠습니다. 종달새가 노래를 하면 저런 모습일까, 상상하고 생각했어요. 그 친구처럼 하고 싶어 '오'와 '우'를 발음할 때면 입술에 힘을 줬습니다. 그럴 때마다 입술이 닭똥집 같다며 놀림을 받았습니다.
나는 더 반짝이는 걸 찾아 물들고, 또 물들었어요. 더 많은 걸 찾아다녔지요. 나는 점점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 갔어요. "넌 참 별나게 생겼구나." 다른 물고기들이 나를 비웃었어요.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어요,
- 나를 찾아서 -
『나를 찾아서』를 읽는 내내 그때의 제가 보였습니다. 자기에게 없는 빛을 찾아다니며 빛나고 싶어 하는 물고기 '나'가 꼭 저 같았습니다. 더 반짝이는 것을 찾아다니며 그 색깔에 물들고, 또 물들면서도 더 많은 걸 찾아다니는 '나'가 곧 저였습니다. 『나를 찾아서』의 물고기처럼 저 역시 자신의 고유한 색을 잃은 채 남들에게 비웃음을 샀지요. 결국 제 고유함은 사라지고 이상하고 별로인 저만 남았습니다.
모르면서 짐작하고 확신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삶은 각자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이다. 그 길을 가려는 시도이며 좁은 길로의 암시다. 일찍이 그 누구도 온전히 자기 자신이었던 적은 없다. 그렇지만 누구나 그렇게 되기 위해 애쓴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또 어떤 사람은 명료하게 각자만의 방법으로 그렇게 되려고 애쓴다. 누구나 자신의 탄생의 잔재를, 태고의 점액과 껍질을 끝까지 지니고 다닌다. 어떤 이들은 끝까지 사람이 되지 않고 개구리, 도마뱀, 개미에 머문다. 또 어떤 이들은 상체는 인간이고 하체는 물고기다. 그러나 누구나 인간이 되기를 지향하며 창조된 자연의 산물이다. 우리 모두는 같은 기원, 어머니, 심연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심연의 시도이자 산물인 인간은 누구나 각자의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으나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 데미안 -
『데미안』은 화자인 싱클레어가 열 살 때 도시에 있는 라틴어 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 시절 싱클레어는 어머니와 아버지 혹은 사랑과 엄격함, 모범과 학교로 대변되는 밝고 올바른 세계에 속해있습니다. 하지만 싱클레어의 내면은 또 다른 세계로 향하고 있지요. 그곳은 끔찍하고 추잡하고 무시무시하지만 유혹적입니다. 자주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싱클레어는 밝은 세계보다는 어두운 세계에 더 끌립니다. 열 살이 지났을 때, 싱클레어는 공립 초등학교에 다니는 프란츠 크로머에게 약점을 잡힙니다. 자신의 거짓말로 크로머에게 협박을 당하면서 이젠 밝은 세계가 아닌 금지된 세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만난 데미안은 더는 크로머가 싱클레어를 괴롭히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카인과 아벨에 대한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면서 밝음과 어두움, 선과 악, 옳고 그름의 이분법적 사고에 갇힌 싱클레어가 다양한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통해 자신의 무의식과 내면을 깨우치고 온전한 자신이 되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합니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는 과정은 무척 고독하고 고통스럽습니다.
나는 그저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대로 살아가고자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 데미안 -
너무 어렸을 때 읽은 『데미안』은 지루하고 재미없고 무슨 내용인지 모르는 이상한 책이었습니다. 저와 나이 차이가 많지 않은 아이가 주인공이길래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인 줄 알았어요. 카인과 아벨이 누구인지,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융의 정신분석이 무엇인지 몰랐기에 『데미안』은 재미없는 책, 이상한 책, 지루하고 어려운 책이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다시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읽은 책 목록에 올려놓고는 안다고 착각했죠.
다시『데미안』을 읽으면서 이 소설에 대해 모르면서 알려고 하지 않았고, 모르면서 짐작하고 확신했던 게 부끄러웠습니다. 그 감정은 점점 확장되어 제 자신을 제대로 읽지 않은 채 나이를 먹은 게 아프고 또 아프더군요.
나를 찾으려 할 때마다 남을 찾았습니다
누구보다 반짝이고 싶었습니다. 친구에게 질투가 날 때면 더더욱 빛나고 싶었지요.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실제의 저는 잘하는 게 없었고,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보는데도 눈치가 없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친구의 능력을 흉내 낼 때면 제 모습은 점점 더 우스꽝스러워졌고요.
하고 싶은 말은 늘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은 채 상대의 기분에 맞추려 했습니다. 갖고 싶었는데 양보했고, 하고 싶었는데 미리 포기하고 좌절했습니다. 덕분에 미움과 분노가 쌓였고 그것을 삼키면서 죄책감을 키웠습니다. 제 안의 어두운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웃고 다녔는데 그때마다 슬픔이 덤으로 얹어졌죠. 밝고 아름답고 좋은 세계만 보여주고 싶었기에 그렇지 못할 때면 수치심에 어쩔 줄 몰랐습니다. 아주 자주 부끄러웠고 창피했고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싶었습니다. 스스로 작아졌기에 확신도 없었어요. 많은 일들을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상대의 의견에 맞췄지요. 그게 더 편했으니까요. 그래 놓고 저를 원망하고 미워했습니다. 상상 속의 제가 거대해질수록 현실의 저는 점점 쪼그라들더군요. 그래서 더 빛나고 싶었죠.
'진짜 나'를 찾겠다고 했지만 그 순간에도 저는 남들에게 매달리고 의지했습니다. 제 문제인데 다른 사람이 해결해주길 바랐습니다. 부끄러운 모습이 튀어나오면 도망치려 했고, 진심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어떻게든 억압하고 눌렀습니다. 괜찮은 사람이고 싶어서 몰라도 아는 척을 했고, 알아도 모르는 척했습니다. 어떤 게 진짜인지 저 자신조차 헷갈렸고, 어느 순간부터 변명하면서 합리화했습니다.
이제는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조금이라도 불편한 상황에 놓이면 다시 그때의 제가 됩니다. 얼마든지 솔직할 수 있었는데 또 저를 꿀꺽 삼키고는 후회하고 있습니다.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데 눈치를 보다가 눈치 없는 사람이 된 건 아닌지 전전긍긍하는 중입니다.
남들과 다른 빛을 뿜어내고 싶으면서 남들과 다르면 안 될 것 같아 망설이고, 감정에 정직하고 싶으면서 비난받을까 두려워 숨는 저를 『나를 찾아서』와 『데미안』이 자꾸만 두드립니다.
"당신은 가끔 스스로를 특이하다고 여기고 당신이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간다고 자책하곤 합니다. 그러지 말아야 해요. 불을 들여다보고, 구름을 들여다봐요. 그래서 예감이 떠오르고 당신 영혼의 목소리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 거기에 당신을 완전히 맡겨요. 그것이 선생님이나 아버지, 또는 어떤 신의 뜻과 어울리는 것인지, 그들의 마음에 드는 것인지 묻지 말아요! 그건 자기 자신을 망치는 길이에요. 그랬다가는 보행자 도로 위만 걷다가 화석이 되어 버리고 말아요."
- 데미안 -
'온전한 나'를 막는 건 자신입니다
“똑똑한 척 늘어놓는 얘기는 가치가 없어. 전혀 없다고. 자기 자신에게서 멀어질 뿐이야.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죄악이야. 사람은 거북이처럼 자기 안으로 완전히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 데미안 -
'진짜 나'를 마주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무척 고통스럽습니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서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하듯이 내적 자아를 바로 세우고,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나'를 부숴야 합니다.
온갖 색에 물들고 물든 『나를 찾아서』의 물고기는 결국 무서운 눈들 속에 갇히고 맙니다. 그 눈들은 물고기에게 "너는 자신을 잃어버렸구나"라고 얘기합니다. 아니라고 소리치며 도망간 물고기는 거울이 가득한 곳에서 본래의 모습과 마주합니다. 자기 게 아닌 것을 토해내는 과정은 무척 힘듭니다.
『데미안』의 싱클레어는 프란츠 크로머, 막스 데미안, 에바 부인, 피스토리우스, 크나우어를 통해 밝음과 어둠의 세계를 인식하고 선과 악을 통합하여 자기 내면 깊숙한 곳을 봅니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시간은 싱클레어가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과정인 거죠.
저는 지금 진정한 자아를 만나기 위해 힘든 과정을 거치는 건지, 상대의 마음에 들지 못해 괴로운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 저에게 솔직해지기가 무서워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봅니다. 당신을 탓했지만 결국 '온전한 나'를 막는 건 바로 저 자신인 거죠.
알면서 여전히 망설이고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체성은 찾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라고요. 그래서 제가 원하는 저를 만들려 했습니다. 보여주고 싶은 저를 설정하고는 거기에 끼워 맞추려 했죠. 당연히 실패했습니다. 저와는 너무 다른 사람이 되려 했으니 늘 좌절만 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제 안에 빛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운명을 탓하며 저를 몰아세우기만 했습니다. 제 것이 아닌 세계를 파괴해야 했는데 그게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더 견고하게 남의 것을 갖다 붙였습니다. 제 허물은 더욱더 비대해졌고, 세련되고 능숙하지 못한 거짓은 점점 어설프고 우스운 꼴이 되었습니다.
'온전한 나'가 되어야 하는데 민낯의 저를 볼 자신이 없어 여전히 누군가가 되고 싶습니다. 제 고유한 빛깔을 찾고 싶다가도 그런 게 과연 있을까, 의심부터 합니다. 오롯이 저를 드러내고 싶다가도 갈등과 문제가 싫어 회피하고 있습니다. '진짜 나'를 찾는다면서 저를 부정하고 억압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제가 싫은데 익숙한 이 모습이 편하기도 합니다.
과연 저는 '온전한 나'가 될 수 있을까요? 정말 그래야 행복한 걸까요? 굳이 고통스럽게 알을 깰 필요가 있을까요? 이렇게 흔들리고 따라 하고 눈치 보는 게 '진짜 나'는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