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역에 도착한 건 새벽 4시쯤이었습니다. 친한 언니와 서울역에서 헤어져 각자 땅끝마을과 부산으로 향할 때만 해도 혼자 여행을 떠나는 제가 자랑스러웠습니다. 부산역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을 들었을 때는 긴장을 동반한 설렘을 느꼈죠. 그런데 기차에서 내렸을 때, 생각했던 것과 다른 풍경에 놀랐습니다. 2002년 겨울의 부산역은 무척 추웠고, 많이 낡았고, 너무 깜깜했죠. 원래 계획은 역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날이 밝으면 해운대로 가서 숙박 시설을 찾으려 했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어요. 택시를 타는 것도 겁이 났지만 역에 있는 것도 곤혹스러웠죠.
분명 택시를 탔을 텐데 해운대까지 온 과정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해운대에 도착하자마자 모텔에 들어가 방이 있냐고 물은 기억은 생생합니다. 몇 군데에서 방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 들어간 곳에는 40대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카운터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저를 의심과 걱정의 눈빛으로 보면서 지금이 몇 시인 줄 아느냐고 묻더군요. 안다고 했더니 약간 망설이는 듯 멈칫하고는 얼마나 묵을 건지, 어디에서 왔는지, 일행이 있는지, 학생인지 등의 질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잠깐 망설이더니 방을 안내해주었죠. 칫솔과 치약을 사겠다고 했는데 돈은 괜찮다면서 그냥 쓰라고 하더군요. 제가 체크아웃 시간을 묻자 성수기가 아니니 그런 것에 구애받지 말고 자유롭게 이용하라고도 했습니다. 무뚝뚝한 표정에 투박한 말투였지만 나름 친절한 분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추측해보니 그분은 제가 삶을 마감하기 위해 온 건 아닌지 살펴봤던 것 같아요.
일주일 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무사히 다녀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다시는 혼자 떠날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진짜 두려움은 여행 중이 아니라 끝나고 난 뒤에 찾아오더라고요.
19년 전 부산에서의 일이 어떤 건 또렷하게, 어떤 건 삭제된 채, 어떤 건 가물가물거리지만 『밤버스』를 통해 그때의 감정이 생생해졌습니다.
떠나기 전의 두려움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혼자서도 괜찮을까?
짐이 너무 많은 걸까? 아니야, 그래도 뭔가 빠뜨린 것 같아.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어떡하지?
길을 잃어버리면?
- 밤버스 -
졸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20대 초반에게 4년이란 세월은 길고도 길어서 그 안에 제가 원하는 것을 이뤄낼 거라 믿었죠. 매번 좌절하며 절망했지만 꿈은 이뤄진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어찌 보면 엄살이었습니다.
졸업이 다가오자 불안과 패배감이 깊어졌습니다. 그동안 저는 제가 원하는 일에도, 제가 살아가는 현실에도 충실하지 않았더라고요. 꿈은 허상이었고, 현실은 단단하지 못했습니다. 사랑이라 믿었던 감정은 거짓이었고,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관계는 가족이었죠. 동기들은 복수전공을 하고, 학점을 관리하고, 자격증을 따고, 외국어를 공부하고, 자기소개서를 쓰고, 회사생활을 하면서 졸업 이후를 준비했지만 저는 그 무엇도 하지 않은 채 현실에서 도망치려고만 했습니다. 영화 속 뜬금없는 장면에서 눈물을 쏟았고, 책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어느 장면을 계속 헤매다니기만 했어요.
새벽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떠난 건 그 막막함에서 탈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부산에 뭐가 있는지, 어디에서 자면 되는지, 어디로 갈지 등의 정보와 계획은 무시한 채 그냥 바다가 보고 싶다며 선택했습니다. 그나마 많이 들어본 곳, 가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은 곳, 있는 돈을 다 털어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이었기에 별 고민이 없었어요. 혼자 헤매다 돌아오면 조금이라도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혼자서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교차했지만 지금의 저를 바꾸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언어가 다른 먼 곳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오랫동안 집을 떠나는 것도 아니었지만 겁이 많은 제게는 큰 모험이었죠.
뭘 먹지? 어디서 머물러야 할까? 누군가 정해 주면 좋겠어.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귀찮은 건 딱 질색이야. 하지만 외로운 것도 싫은데.
아무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한 발짝도 나아가고 싶지 않을 때는?
다시 떠나기 힘들 정도로 이 여행이 싫어지면 어떡하지?
- 밤버스 -
『밤버스』의 화자는 여행 가방을 끌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합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여행을 떠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혼자서도 괜찮을지, 짐이 너무 많은 건 아닌지, 잘못된 길로 들어서거나 친구를 사귀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의 질문이 이어질수록 불안도 커집니다. 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단단하게 두르고 여행 가방 안에 필요한 물건과 필요하지 않은 물건까지 챙겼을 텐데 주인공은 마음이 놓이지 않나 봅니다. 상상 속에서 주인공이 탄 버스는 하늘을 떠다니기도 하고, 숲을 헤매기도 하고, 복잡한 도시를 지나기도 합니다. 작가의 글에 나오는 '불확실한 설렘과 분명한 불안감'이 강렬하면서 몽환적인 그림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밤이 불러오는 환상과 두려움에 빠지는 느낌입니다.
갈 데까지 가야 하는 사람들
인간이 달 위를 처음 걸었던 것은 그해 여름이었다. 그때 나는 앞길이 구만 리 같은 젊은이였지만, 어쩐지 이제부터는 미래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위태위태한 삶을 살고 싶었다.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본 다음, 거기에 이르렀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 내가 이루어 낸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결국에는 차츰차츰 무일푼으로 전락해 아파트마저 잃고 길바닥으로 나앉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만일 키티 우라는 여자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굶어 죽었을 것이다. 그 당시는 내가 그녀를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지만, 나는 마침내 그 기회를 내가 발전하는 데 필요한 조건의 한 형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통해 나 자신을 구하는 방법으로 보게 되었다. 그녀를 만난 것이 시작이었다. 그 뒤로 여러 가지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 나는 휠체어에 의지한 노인에게 일자리를 얻었고, 내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유타 주에서부터 캘리포니아 주까지 걸어서 사막을 가로지르기도 했다. 그것은 물론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지만, 나는 지금도 그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내 삶의 출발점으로서.
- 달의 궁전 -
『달의 궁전』의 서술자이면서 주인공인 마르코 스탠리 포그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어머니와 단 둘이 살았는데 열한 살 때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죽자 외삼촌인 빅터 포그에게로 가죠. 클라리넷 연주자인 빅터는 목적 없이 되는 대로 살고, 공상에 잠기고, 벼락같이 화를 내고, 무기력에 빠져드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빅터는 조카를 무척 사랑합니다. 포그 또한 삼촌을 무척 좋아하고요. 그런 빅터가 심장마비로 죽자 포그는 외삼촌이 남겨준 1492권의 책을 다 읽고 그 책들을 중고서적에 팔아 겨우겨우 생계를 유지합니다.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했지만 그는 절망감에 빠져 무기력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따금씩 아파트 두 창문 사이에 서서 '달의 궁전'이라고 쓰인 중국음식점의 네온사인을 지켜보는 게 즐거우면서 중요한 일이죠. 더는 버틸 수 없어진 포그는 친구인 짐머에게 돈을 빌리기 위해 그의 아파트에 갔다가 키티 우를 만납니다. 후에 키티와 짐머는 아파트에서 쫓겨나 노숙생활을 하는 포그를 찾아 그를 돕습니다. 키티와 짐머의 사랑으로 점점 회복한 포그는 돈을 벌기 위해 괴팍한 노인 토머스 에핑의 비서 업무를 합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에핑은 포그에게 자신의 진실을 알려주고, 포그는 에핑의 유언에 따라 그의 아들 솔로몬 바버에게 에핑의 자서전을 보냅니다.
에핑이 요구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계속 그에게서 떼어놓을 줄 알아야 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요구에 중압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요구들을 나 자신이 원하는 어떤 심상(心象)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결국 그 일에는 본래부터 잘못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엄밀한 의미로 따진다면 사물을 정확하게 서술하려는 노력은 바로 내가 가장 배우고 싶어 했던 것을 배울 수 있는 그런 원칙이었다. 겸손함, 인내, 정확성, 나는 그 일을 단순히 하나의 의무로 생각하는 대신 일종의 정신적 훈련, 마치 세상을 처음 발견한 것처럼 세상을 보는 눈을 기르는 훈련의 한 과정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을 보는가? 그리고 보이는 것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것인가? 세상은 눈을 통해 우리에게로 들어오지만, 우리는 그 이미지가 입으로 내려가기 전에는 뜻이 통하게 할 수 없다. 나는 그 거리가 얼마나 먼지를 올바르게 인식하기 시작했고, 어떤 사물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가기 위해 얼마나 멀리 여행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그 거리는 6, 7센티미터에 불과했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고와 손실이 생겨나는지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지구에서부터 달까지의 여행이 될 수도 있었다.
- 달의 궁전 -
『달의 궁전』 첫 장에서 포그는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본 다음, 거기에 이르렀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고 싶었다'라고 합니다. 열여덟 살 때부터 죽기로 작심한 사람처럼 술을 마시고, 세상에 적응하고 싶어 하지 않은 괴짜처럼 산 포그는 외삼촌의 죽음으로 절망 상태에 빠져 궁지로 자신을 몰아갑니다. 비참하게 망가진 자신의 삶을 한탄하다가도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으니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자신을 질책하죠. 감정은 극과 극을 오가고, 몸은 망가지고, 정신은 너무 혼란한 상태입니다. 짐머와 키티가 아니었다면 그는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삶의 낭떠러지에서 그가 깨달은 건 사랑이었죠.
태양은 과거고 세상은 현재고 달은 미래다.
에핑 역시 자신의 삶을 극한으로 몰고 간 인물입니다. 에핑의 원래 이름은 줄리언 바버, 화가입니다. 작품이 성장하려면 꼭 서부에 가야 한다는 모란의 강력한 권유로 여행을 떠납니다. 함께 간 에드워드 바이런이 여행 중에 사망하자 죄책감과 두려움을 느낀 에핑은 자신을 죽은 사람으로 만들고 새로운 삶을 삽니다. 죽음을 앞두자 자서전을 통해 그동안 숨겨왔던 진실을 밝히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써 나가는 작가야. 네가 쓰고 있는 책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그건 원고인 셈이지. 그보다 더 적절한 게 뭐가 있겠니?
어렸을 때부터 거구였던 솔로몬 바버는 일자리를 잃고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자 먹는 일에 몰두합니다. 체중은 20kg 가까이 늘었지만 더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여기에 머리카락까지 빠지자 그는 중산모, 터키 모자, 야구 모자, 중절모, 헬멧의 속모자, 카우보이 모자 등 스타일이나 관례에 상관없이 온갖 종류의 모자를 씁니다.
내 등뼈가 부러졌을지는 모르지만, 내 가슴은 마침내 치료가 되고 있어.
포그와 에핑과 바버는 자신의 삶을 극한으로 몰고 간 뒤에 새로운 삶을 찾습니다. 허무주의에 빠져 노숙생활을 하던 포그는 자신을 살린 건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일자리를 찾습니다. 자신의 고용주였던 에핑이 죽자 포그는 그에게서 받은 돈으로 편안한 생활을 하지만 그토록 사랑하던 키티와 헤어지고, 마침내 알게 된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고, 여행 중에 차와 돈까지 잃습니다. 분노를 견디지 못해 땅에 벌을 주기라도 하듯 걷던 그는 차츰 행복을 느낍니다. 그는 걷고 걷고 또 걸어 서부 해안 끝에 도달합니다. 포그는 공허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이곳이 자신의 출발점이라 말하며 삶의 시작을 알리죠. 살벌하고 위험한 여행을 통해 에핑은 기존의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자신을 창조합니다. 후에 다리를 다치고 시력을 잃지만 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사물을 깊이 꿰뚫어 보죠. 바버는 일자리를 잃고 사랑하는 여인이 떠나자 죽음을 결심합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그럴 만한 용기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자유로운 남자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살을 마구 겹쳐 쌓은 것 같은 굉장한 몸집에 머리카락까지 빠졌지만 그는 더 이상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지 않습니다. 뛰어난 역사학자이자 교수인 그는 자신의 특이함으로 모두를 압도하면서 매력을 발휘하지요.
떠나야만 알 수 있는 것
2014년, 나와 달님은 남미 배낭여행을 계획했다. 초짜인 주제에 하필 어려운 여행지를 골랐다. 떠나기로 결정하고도 나는 계속 질문했다.
떠날 수 있을까? 정말?
여행지에서는 모든 것이 서툴렀다. 지도 보는 것, 목적지를 정하는 것, 숙소 고르는 것, 심지어 서로의 감정을 살피거나 유대감을 유지하는 것에도 서툴렀다. 고되고, 지치고, 힘들고 그래서 싸우고, 그러기를 매일 반복했다. 아슬아슬했다. 하지만 뇌는 간사하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여행의 기억은 '추억'이라는 필터를 통해 아름답게 편집되었다.
여행하면서 느꼈던 불확실한 설렘과 분명한 불안감을 토대로 《밤버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작품을 마치고 나서야 여행이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나는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려고 한다.
- 『밤버스』작가의 말 -
무모하더라도 겁이 없는 사람이고 싶었습니다. 모험을 좋아하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길 바랐죠.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과 그런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져 숙소도 알아보지 않고 무작정 부산으로 갔습니다. 불길한 꿈을 꿨으니 가지 말라는 엄마의 간절함을 애써 무시하면서요. 걱정이 몰려올 때면 괜찮다고 최면을 걸었습니다. 다음에는 배낭을 메고 유럽에 가야겠다는 다짐도 했지요.
진짜 두려움은 서울로 오는 버스 안에서였습니다. 제가 묵었던 모텔 중 한 곳은 아가씨를 불러준다는 홍보물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을 나올 때 봤는데 그때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데 반나절이 지난 뒤에야 소름이 돋더라고요. 태종대 바다에 뛰어들고 싶었던 욕구와 혼자 왔냐며 계속 쫓아오던 남자가 떠오르자 덜컥 겁이 났습니다. 무엇보다 버스가 너무 덜컹거려 집으로 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하는 건 아닌지 무섭더라고요. 승객 중 누군가가 살살 가자고 말해주길 바랐는데 다들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잠을 자는 사람들도 꽤 있었고요. 꿈자리가 좋지 않다는 엄마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몇 시간 동안 긴장하면서 왔더니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다리가 후들거렸죠. 아직 날이 어두웠지만 곧 첫차가 다닐 시간이라는 게 눈물나게 고마웠습니다.
여행을 할 때마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누구를 만났고, 무엇을 느끼고 깨달았는지 등을 기억하려 일기를 썼습니다. 수없이 풍경을 찍으면서 제가 간 곳을 남기려 했지요. 여행을 떠나야 새로운 것을 배우고 느끼고 성장할 수 있다는 말을 믿으며 뭐라도 배우고 느끼고 성장하고 싶었어요. 그러다 보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움을 쫓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요.
몇 번의 여행을 통해 저는 도전과 모험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부정적인 생각과 불안이 강해 쉽게 떠날 수 없고, 저를 믿지 못하기에 든든한 누군가가 옆에 꼭 있어야 하지요. 낯선 풍경이 주는 경이로움은 안전이 확보되어야 느낄 수 있고, 여행 중이 아니라 돌아왔을 때가 가장 행복하더라고요.
삶이라는 여행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포그처럼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면서 갈 데까지 가보겠다고 선언한 적이 있었습니다. 분노와 절망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제 삶을 망가뜨리려 했어요.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고, 바닥으로 떨어져야 다시 올라올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 당시 저는 절대로 하지 못할 거란 일을 저질렀고, 참기만 했던 욕구를 표출했습니다. 그때는 대단한 일을 저지른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그건 약간의 탈선과 잠깐의 일탈일 뿐이더군요. 그 시시한 반항을 통해 제게는 배짱이 없음을 자각했습니다. 고통 속에서도 길을 찾는 사람이고 싶은데 저는 고통스러운 사건 없이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더라고요. 이런 저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아니길 바라고,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하는데 예전처럼 강하게 부정할 수가 없네요.
여기, 다시, 출발점
언젠가부터 새로운 길을 가지 않습니다. 경험이 중요하다며 이것저것 했던 적도 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자신이 없어 미리부터 포기하거나 끝이 빤하다며 어떻게든 발을 빼려 하지요. 몇 걸음 옮기고는 이것으로 충분하다며 그만 둘 구실을 마련하기도 하고요. 당연히 멈춰있거나 퇴보하는 중입니다. 떠나기 전에 느꼈던 두려움은 가물거리고, 떠나지 않아 느끼는 두려움이 강해지고 있어요.
그때만큼 상황이 절박하지 않은 건지, 좌절감과 패배의식이 너무 깊어 더는 시도하지 못하는 건지, 다시 차오르기 위해 이지러지고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건 떠나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거죠.
움직이지 않는 저를 압박하다가 불현듯 저와 당신은 계속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버스를 놓쳐 속상하기도 하고, 속도를 내지 못해 답답하기도 하고,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몰라 난감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달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일도 생기고, 저런 일도 생기는 거겠죠. 비록 여기가 원하는 목적지가 아니더라도, 그곳에 도달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어도 지금의 여정이 소중하다고, 괴로울 때도 있지만 황홀하다고 말하면 좋겠어요.
그리하여 허무와 공허가 차오르는 이곳에서 다시 출발할 수 있다고 작게 중얼거립니다.
내가 신발을 벗고 발바닥에 와닿는 모래를 느낀 것은 오후 네 시였다. 나는 세상 끝까지 온 것이었고 그 너머로는 바람과 파도, 중국 해안까지 곧장 이어진 공허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가 내 출발점이야. 나는 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여기가 내 삶이 시작되는 곳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