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반점』 X 『리플리 1: 재능있는 리플리』
『리플리 1: 재능있는 리플리』
거울을 봤는데 얼굴에 검은 반점이 나 있어.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오늘? 아니, 아주 오래전.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중략)
사람들이 내 검은 반점만 쳐다보는 것 같아.
손으로 가려도 보고 마스크를 써 보기도 했어.
그럴수록 반점은 점점 커지는 거야.
-검은 반점 -
나도 스물다섯인데, 톰은 생각했다. 디키는 아마 그곳에서 멋진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수입이 있고 집과 요트도 있는데 뭣하러 귀국하고 싶겠는가? 디키의 얼굴이 톰의 기억 속에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환한 미소와 곱슬거리는 금발머리 그리고 마음 편한 낙천적인 얼굴. 디키는 과연 행운아였다. 그런데 그는 스물다섯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보라! 한 주 벌어서 한 주 살았고 은행 계좌도 없었다. 그리고 난생처음 경찰의 눈을 피해 다니고 있다. 그는 수학에 재능이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 재능으로 돈을 벌지는 못하는 걸까? 온몸의 근육이 긴장했고, 손에 잡은 성냥 덮개가 눌려 거의 납작해졌다. 지겨웠다. 정말이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지겨웠다!
- 리플리1 : 재능있는 리플리 -
톰은 디키가 마즈를 요트에 태워 주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흰 닻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들 뒤 왼쪽에는 오렌지색 태양이 물에 가라앉고 있었다. 마즈의 웃음소리와 디키가 방파제에 있는 남자에게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톰은 그들의 전형적인 모습임을 깨달았다.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자고 나서 해질 무렵, 디키의 요트를 타고 출항하는 것이리라. 그러고 나서 해안 카페에 앉아 아페리티프를 마실 것이다. 그들은 톰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양 평소와 똑같은 하루를 즐기고 있었다. 디키가 무엇하러 지하철과 택시로 붐비는 도시로 돌아가 빳빳하게 풀을 먹인 셔츠를 입고 9시에 출근해 5시에 퇴근하는 일자리를 구하겠는가? 기사 딸린 자동차가 있고, 플로리다나 메인 주에서 휴가를 보낼 수 있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책임질 사람도 아무도 없이 오래된 옷을 입고 요트를 타고, 그를 위해 모든 걸 돌봐주는 마음씨 좋은 도우미 아주머니가 있는 집에서 사는 것처럼 즐거운 일은 없었다. 게다가 원하면 다른 곳에 여행을 다닐 수 있는 돈도 있었다. 디키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자, 톰은 가슴이 찢어질 듯한 시기와 자기 연민이 밀려왔다.
- 리플리1 : 재능있는 리플리 -
디키는 기차 안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졸린 척하면서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맞은편에 앉은 톰은 갸름하고 오만하고 잘생긴 그의 얼굴과 초록색 보석과 황금 문장 장식이 있는 반지를 낀 손을 바라보았다. 떠날 때 그의 반지를 훔쳐야겠다는 생각이 톰의 머릿속을 스쳤다. 디키가 수영할 때마다 반지를 벗어 두기 때문에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집에서 샤워를 할 때도 이따금 반지를 빼곤 했다. 톰은 디키가 마지막 날까지 그렇게 할 거라고 생각했다. 톰은 디키의 감은 눈꺼풀을 가만히 응시했다. 증오와 애정, 조바심과 좌절감이 뒤섞인 감정이 솟아올라 숨이 막혔다. 디키를 죽이고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든 게 처음은 아니었다. 예전에 한 번, 두 번 혹은 세 번, 분노나 절망감 때문에 이런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충동은 곧 사라지고 수치심만 남았다. 이제 그 생각이 1분 내내 그리고 2분 동안 계속된 건, 이제 곧 디키를 떠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더 이상 수치심을 느낄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는 모든 면에서 디키와의 관계를 실패했다. 디키가 미웠다. 지금껏 일어난 어떤 일을 보더라도 자신의 잘못이나 자신이 한 행동 때문이 아니라 디키의 비인간적인 완고함 탓이었다. 그리고 그의 뻔뻔함 무례함이란! 그는 디키에게 우정과 동료애, 존중 그리고 그에게 보여줘야 하는 모든 걸 보여주었는데, 디키는 추위 속에 그를 밀어냈다. 여행하다 그를 죽이면 단순히 사고가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 거야, 톰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좀 더 기발한 생각을 떠올렸다. 바로 자신이 디키 그린리프가 되는 거였다! 그는 디키가 하는 모든 걸 할 수 있었다. 우선 몬지벨로로 되돌아가서 디키의 물건을 챙기고는 마즈에게 그 끔찍한 이야기를 전하고, 로마나 파리의 아파트로 이사 가고, 매달 디키의 수표를 받아 그의 서명을 위조하는 것이다. 그는 디키의 후임자 역할을 해낼 수 있었다. 그를 그대로 따라 할 수 있었다. 아주 짧은 기간이라 해도 위험성이 있을 거라는 걸 어렴풋이 깨닫자, 더 기운이 솟았다. 그는 어떻게 할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 리플리1 : 재능있는 리플리 -
그는 맑은 정신으로 상체를 꼿꼿이 펴고 서 있었지만, 누군가 말을 걸어오면 금방이라도 미소를 지을 준비를 했다. 배를 탔을 때 느꼈던 기분이 더 강하게 들었다. 과거에 아무런 오점도 없는, 선의로 가득 찬 신사가 된 것 같았다. 그는 디키였다. 심성이 착하고 순진한, 누구에게든 미소 짓고 부탁하면 누구에게든 천 프랑을 줄 수 있는 디키, 성당 광장을 떠나려 할 즈음 어느 노인이 돈을 달라고 하자, 그는 파란색의 빳빳한 천 프랑짜리 지폐를 주었다. 노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고 모자를 벗으며 경의를 표했다.
- 리플리1 : 재능있는 리플리 -
세상엔 온갖 색깔의 반점들이 퍼져 있어.
언제부터 그랬지?
오늘? 아니, 아주 오래전. 우주가 생겨날 때부터.
(중략)
잘못 본 걸까?
세상이 반점들 때문에 빛나는 것 같아.
- 검은 반점 -
그는 다시 톰 리플리가 되는 게 싫었다.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되고, 다시 자신의 오래된 습관을 되찾고, 사람들이 그를 얕보다가 어릿광대처럼 굴지 않으면 금방 지루해지는 게 싫었다. 기름 얼룩이 묻어 있고 다림질하지 않은 초라한 옷, 새 것일 때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던 옷을 입는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게 싫었다.
- 리플리1 : 재능있는 리플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