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감, 우아하고 깊이 있게 가꿔보려고요

『검은 반점』 X 『리플리 1: 재능있는 리플리』

by 꿈의 떨림

『리플리 1: 재능있는 리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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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축되거나 포장하거나



불안과 두려움만큼 저를 힘들게 하는 감정이 있습니다. 꽤 자주 찾아오는 열등감은 제 감성과 이성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사라지지 않습니다. 괜찮다 싶다가도 훅, 하고 들어오는 이 감정은 상대에 대한 미움과 미안함으로 뒤엉키다가 곧 자기혐오로 바뀝니다. 저에 대한 증오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때면 살아야 할 이유는 사라져 버리죠. 제 존재에 '필요 없음'과 '가치 없음'이라는 딱지를 붙이고는 저를 참 많이 미워했어요.


자존감은 늘 바닥이었기에 타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우기는 답이 틀리다는 걸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였고, 웃기지 않은 상황인데 웃었어요. 확신이 없어 끌려다녔고, 확신이 들 때도 저를 의심하느라 또 끌려다녔습니다. 자존감은 낮고 자존심은 강해서 겉으로는 순하고 너그럽게 보지만 제 속은 한없이 좁고 뾰족했죠. 겉으로는 그들에게 선한 미소를 보였지만 머릿속으로는 그들을 불행에 빠뜨렸어요.


그때마다 미움에 미안함이 더해지고, 원망에 고마움이 얽혔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데 또 누구보다 그들 가까이에 있고 싶었요.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면서 그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인물이고도 싶었요. 그들 행복하길 원할 때에도 저보다는 덜 행복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지요.


이율배반적인 제가 『검은 반점』과 리플리 시리즈의 첫 번째 『재능있는 리플리』에 담겨 있습니다. 열등감으로 위축되고 작아지는 『검은 반점』의 화자는 저와 참 많이 닮았습니다. 열등감으로 분노하고 포장하고 잔혹해지는 『재능있는 리플리』의 톰 리플리처럼 살 수도 없고, 살고 싶지도 않지만 그를 악으로 규정한 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검은 반점』의 '나'는 답답하고 안타까운 제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면 『재능있는 리플리』의 톰은 드러내지 못하는 제 욕망을 담고 있지요.



검은 반점 발견, 콤플렉스의 시작





거울을 봤는데 얼굴에 검은 반점이 나 있어.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오늘? 아니, 아주 오래전.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중략)

사람들이 내 검은 반점만 쳐다보는 것 같아.
손으로 가려도 보고 마스크를 써 보기도 했어.

그럴수록 반점은 점점 커지는 거야.

-검은 반점 -



양치질을 하다가 '나'는 얼굴에 난 검은 반점을 발견합니다. 이 반점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생긴 건지, 오래전에 생긴 건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던 건지 알 수 없습니다. 친구가 언제부터 점이 있었냐며 '나'에게 묻습니다. '나'는 검은 반점이 자꾸만 신경 쓰입니다. 손과 마스크로 가릴수록 반점은 점점 커집니다. 목욕탕에서 깨끗이 씻으면 사라질까요. 그러고 보니 엄마의 등에도 검은 반점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신과 똑 닮은 점을 가진 사람을 만납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반점과 똑같은 그의 반점이 편하고 좋았지만 점점 보기 싫습니다. 얼굴에 난 검은 반점이 점점 '나'를 지배합니다. 내 몸에 검은 반점이 난 건지, 내가 검은 반점에 속한 건지 모를 정도지요. '나'는 자꾸만 부끄럽습니다. 이게 다 검은 반점 때문입니다.



끝없는 비교, 잔혹함의 시작



나도 스물다섯인데, 톰은 생각했다. 디키는 아마 그곳에서 멋진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수입이 있고 집과 요트도 있는데 뭣하러 귀국하고 싶겠는가? 디키의 얼굴이 톰의 기억 속에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환한 미소와 곱슬거리는 금발머리 그리고 마음 편한 낙천적인 얼굴. 디키는 과연 행운아였다. 그런데 그는 스물다섯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보라! 한 주 벌어서 한 주 살았고 은행 계좌도 없었다. 그리고 난생처음 경찰의 눈을 피해 다니고 있다. 그는 수학에 재능이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 재능으로 돈을 벌지는 못하는 걸까? 온몸의 근육이 긴장했고, 손에 잡은 성냥 덮개가 눌려 거의 납작해졌다. 지겨웠다. 정말이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지겨웠다!

- 리플리1 : 재능있는 리플리 -


톰은 디키가 마즈를 요트에 태워 주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흰 닻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들 뒤 왼쪽에는 오렌지색 태양이 물에 가라앉고 있었다. 마즈의 웃음소리와 디키가 방파제에 있는 남자에게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톰은 그들의 전형적인 모습임을 깨달았다.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자고 나서 해질 무렵, 디키의 요트를 타고 출항하는 것이리라. 그러고 나서 해안 카페에 앉아 아페리티프를 마실 것이다. 그들은 톰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양 평소와 똑같은 하루를 즐기고 있었다. 디키가 무엇하러 지하철과 택시로 붐비는 도시로 돌아가 빳빳하게 풀을 먹인 셔츠를 입고 9시에 출근해 5시에 퇴근하는 일자리를 구하겠는가? 기사 딸린 자동차가 있고, 플로리다나 메인 주에서 휴가를 보낼 수 있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책임질 사람도 아무도 없이 오래된 옷을 입고 요트를 타고, 그를 위해 모든 걸 돌봐주는 마음씨 좋은 도우미 아주머니가 있는 집에서 사는 것처럼 즐거운 일은 없었다. 게다가 원하면 다른 곳에 여행을 다닐 수 있는 돈도 있었다. 디키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자, 톰은 가슴이 찢어질 듯한 시기와 자기 연민이 밀려왔다.

- 리플리1 : 재능있는 리플리 -



자신이 만든 허구를 진실이라 믿고 가짜를 진짜로 만들기 위해 거짓말과 거짓된 행동을 반복하는 것을 리플리 증후군이라 합니다. 1955년에 발표한 소설 『재능있는 리플리』에서 유래된 용어이죠.


이 소설 속 주인공 톰 리플리는 수학에 탁월한 재능이 있고, 무척 영리합니다. 재능은 있는데 그는 집도 없고, 변변한 직업도 없습니다. 그런 톰에게 디키 그린리프의 아버지인 허버트 그린리프 씨의 제안은 기회죠. 그린리프 씨는 유럽에 있는 아들이 미국으로 귀국해서 요트를 생산하는 자신의 회사를 물려받길 바랍니다. 그린리프 씨의 제안에 톰은 뉴욕을 떠나 나폴리 섬 남쪽에 있는 몬지벨로로 갑니다. 그곳에서 만난 디키는 무척 여유롭습니다. 집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편안한 생활을 하고, 무덤덤하고 심드렁하게 대해도 자신을 사랑해주는 마지가 있지요. 디키와 지낼수록 톰은 그가 부럽고 밉습니다. 능력이 있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와 비교하니 증오와 수치심이 더 커집니다. 그의 열등감은 디키를 죽이고, 자신이 디키가 되겠다는 욕망으로 번집니다. 결국 톰은 그 계획을 실현하고, 범행을 숨기기 위해 또 다른 살인과 거짓말을 이어갑니다.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두 작품 속 주인공은 자존감이 낮습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기의 가치와 능력을 긍정적으로 보지 못니다. 모든 면을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할 리 없다고 의심하면서 사랑해달라 집착합니다. 실수와 실패를 두려워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외부 환경이나 상대 탓을 하죠. 타인의 시선을 과하게 의식하기에 비난을 두려워하고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 합니다.


언제부터 검은 반점이 있었느냐는 친구의 물음에 『검은 반점』의 주인공은 사람들의 시선을 더 의식합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고개를 들 수 없고, 계속 눈치를 살피죠. 처음에는 자신과 같은 반점을 가진 사람이 편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그 반점 때문에 그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상대도 거부하고 싶습니다.


톰은 사람들이 자기를 싫어할까 봐 두렵습니다. 자기를 좋아한다고 고백한 동성애자들을 거절하고는 그들이 자기를 싫어할까 봐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합니다. 애널리스트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자기 역시 그렇다고 가장하고, 그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애널리스트 수업에 관해 웃기는 얘기를 지어냅니다. 디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디키가 자신과 거리를 두려 하자 톰은 그를 좋아하면서 미워하고, 그를 필요로 하면서 없애고 싶습니다. 이렇게 관계가 틀어진 이유는 모두 디키 때문입니다. 톰은 디키에게 우정과 존중을 보여줬는데 디키가 비인간적이고 완고하기 때문에 좋은 관계를 만들지 못한 거죠.



디키는 기차 안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졸린 척하면서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맞은편에 앉은 톰은 갸름하고 오만하고 잘생긴 그의 얼굴과 초록색 보석과 황금 문장 장식이 있는 반지를 낀 손을 바라보았다. 떠날 때 그의 반지를 훔쳐야겠다는 생각이 톰의 머릿속을 스쳤다. 디키가 수영할 때마다 반지를 벗어 두기 때문에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집에서 샤워를 할 때도 이따금 반지를 빼곤 했다. 톰은 디키가 마지막 날까지 그렇게 할 거라고 생각했다. 톰은 디키의 감은 눈꺼풀을 가만히 응시했다. 증오와 애정, 조바심과 좌절감이 뒤섞인 감정이 솟아올라 숨이 막혔다. 디키를 죽이고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든 게 처음은 아니었다. 예전에 한 번, 두 번 혹은 세 번, 분노나 절망감 때문에 이런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충동은 곧 사라지고 수치심만 남았다. 이제 그 생각이 1분 내내 그리고 2분 동안 계속된 건, 이제 곧 디키를 떠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더 이상 수치심을 느낄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는 모든 면에서 디키와의 관계를 실패했다. 디키가 미웠다. 지금껏 일어난 어떤 일을 보더라도 자신의 잘못이나 자신이 한 행동 때문이 아니라 디키의 비인간적인 완고함 탓이었다. 그리고 그의 뻔뻔함 무례함이란! 그는 디키에게 우정과 동료애, 존중 그리고 그에게 보여줘야 하는 모든 걸 보여주었는데, 디키는 추위 속에 그를 밀어냈다. 여행하다 그를 죽이면 단순히 사고가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 거야, 톰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좀 더 기발한 생각을 떠올렸다. 바로 자신이 디키 그린리프가 되는 거였다! 그는 디키가 하는 모든 걸 할 수 있었다. 우선 몬지벨로로 되돌아가서 디키의 물건을 챙기고는 마즈에게 그 끔찍한 이야기를 전하고, 로마나 파리의 아파트로 이사 가고, 매달 디키의 수표를 받아 그의 서명을 위조하는 것이다. 그는 디키의 후임자 역할을 해낼 수 있었다. 그를 그대로 따라 할 수 있었다. 아주 짧은 기간이라 해도 위험성이 있을 거라는 걸 어렴풋이 깨닫자, 더 기운이 솟았다. 그는 어떻게 할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 리플리1 : 재능있는 리플리 -


없애야 하는 게 아니라 돌봐야 하는 콤플렉스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칼 구스타프 융은 인간의 내면을 개인이 인지하고 있는 의식과 인지하지 못하는 무의식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은 무언가를 결정할 때 의식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보통은 무의식에 의해 움직인다고 해요. 그는 콤플렉스를 무의식의 작용으로 설명하면서 무섭고 강하게 자아를 흔드는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콤플렉스는 없애려 할수록 강력해집니다. 의식을 지배해 자아를 파괴할 정도로 말이죠. 검은 반점』의 주인공이 내 몸에 검은 반점이 난 건지, 내가 검은 반점 속에 있는 건지 괴로워한 것처럼 콤플렉스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것에 갇혀 고통을 겪게 됩니다.


아무리 씻어도 검은 반점이 지워지지 않자 주인공은 욕조 안으로 들어갑니다.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이 자신의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모습에서 아직은 자신의 내면을 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합니다.


그는 맑은 정신으로 상체를 꼿꼿이 펴고 서 있었지만, 누군가 말을 걸어오면 금방이라도 미소를 지을 준비를 했다. 배를 탔을 때 느꼈던 기분이 더 강하게 들었다. 과거에 아무런 오점도 없는, 선의로 가득 찬 신사가 된 것 같았다. 그는 디키였다. 심성이 착하고 순진한, 누구에게든 미소 짓고 부탁하면 누구에게든 천 프랑을 줄 수 있는 디키, 성당 광장을 떠나려 할 즈음 어느 노인이 돈을 달라고 하자, 그는 파란색의 빳빳한 천 프랑짜리 지폐를 주었다. 노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고 모자를 벗으며 경의를 표했다.

- 리플리1 : 재능있는 리플리 -



톰은 열등감과 질투심으로 디키가 되려 합니다. 디키의 옷을 입고, 디키의 표정을 짓고, 디키의 말투를 따라 하며 그와 동일시하려 하죠. 결국 톰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디키를 죽이고 자신이 디키인 척합니다. 톰은 디키를 연기하는 게 즐겁습니다. 톰이었을 때는 받지 못했던 관심과 경의를 받으니 디키가 되는 일에 집중할 수밖에 없지요. 톰은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하기에 타인에게 인정을 받으려 하고, 좋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자신을 포장하고 거짓말을 합니다. 끊임없이 타인의 눈치를 살피고, 상대의 말과 행동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면서 수치심과 분노를 키우고 있지요. 디키를 죽인 후 톰은 죄책감과 불안에 시달리지만 위기에 처할 때마다 능숙하게 거짓말을 해서 고비를 넘깁니다. 톰은 누구보다 능력있고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그렇지만 톰은 자신의 상처와 결핍에만 몰두하느라 자신의 강점을 건강하게 발휘하지 못합니다.


융은 콤플렉스는 누구나 다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콤플렉스는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는데 없애는 게 아니라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가꾸는 것이라 했어요. 억압하고 제거하려 할수록 그림자는 고통이 되지만 정성껏 보살피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지요.


검은 반점 때문에 절망하고 괴로워하던 주인공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갖가지 색의 반점을 발견합니다. 이 반점은 우주가 생겨날 때부터 존재했는지 모릅니다. 주인공은 다양한 빛깔의 반점을 가진 사람들과 자신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고, 이 반점이 세상을 멋지게 만들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세상은 나약함을 숨기기 위해 단단한 껍질과 날카로운 이빨로 무장한 악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연약한 살을 드러내면서 서로의 반점을 인정하는 사람들 덕에 아름답게 빛나는 거죠. 자기 안에 웅크리고 있을 때에는 흑백이던 세상이 다양한 색깔을 품고 있었음을 이젠 깨닫습니다.


세상엔 온갖 색깔의 반점들이 퍼져 있어.
언제부터 그랬지?

오늘? 아니, 아주 오래전. 우주가 생겨날 때부터.

(중략)

잘못 본 걸까?
세상이 반점들 때문에 빛나는 것 같아.

- 검은 반점 -




여전히 어려운 일



그는 다시 톰 리플리가 되는 게 싫었다.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되고, 다시 자신의 오래된 습관을 되찾고, 사람들이 그를 얕보다가 어릿광대처럼 굴지 않으면 금방 지루해지는 게 싫었다. 기름 얼룩이 묻어 있고 다림질하지 않은 초라한 옷, 새 것일 때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던 옷을 입는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게 싫었다.

- 리플리1 : 재능있는 리플리 -



콤플렉스는 감추려 할수록 커지고, 숨기려 할수록 강해지더군요. 툭 터놓으면 별것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여전히 저는 억누르고 있습니다. 같은 상처를 가진 친구가 이 문제를 털어놓으면서 한숨을 쉴 때에도 저는 아닌 척하면서 친구를 공격했습니다. 친구가 자신의 아픔을 말할 때마다 제 수치심을 찌르는 것 같아 보듬어 줄 수 없었어요. 같은 처지인 친구를 붙잡고 펑펑 울고도 싶었는데 그보다는 친구를 밀어내기 급급했죠.


톰 리플리의 비뚤어진 모습에 경악하기도 했지만 읽는 내내 그의 범행이 들키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현실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에 소설에서는 일어났으면 했어요. 톰이 느끼는 수치심과 열등감이 무엇인지 알기에 그의 거짓말이 완벽하고 안전하길 바랐습니다. 그렇게라도 허구의 인물인 톰에게 대리만족을 얻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톰이 안타깝고 안쓰러웠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타인과 자신을 파괴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톰이 가엾고 딱해서 그가 그토록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원했지요. 이게 오히려 그에게 독이 될 테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당장은 그가 원하는 대로 되길 바랐습니다.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는 흘러갔지만 통쾌하지도, 만족스럽지도 않습니다. 톰이 남과의 비교를 덜하고 자신의 내면에 집중했다면 좋았겠다는 안타까움이 자꾸만 저를 무겁게 합니다. 톰이 자신의 무의식으로 들어가려 노력하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검은 반점을 진지하게 바라봤다면, 절망 끝에 자기 안에 빛나고 있는 긍정의 빛을 발견했다면, 자신의 그림자를 이해하면서 타인을 수용했다면 좋았을 텐데요. 톰이 자신의 콤플렉스를 정성껏 보듬으면서 디키의 상처에도 관심을 가졌다면 그 둘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거예요. 영리하고 재능있는 톰이기에 그는 점점 더 멋진 사람이 되었을 거고요.


결국 톰에게 하고 싶은 말이 저에게 당부해야 할 말이더라고요. 그런데 톰에게는 쉽게 나오는 진심이 저에게는 어렵기만 합니다. 열등감은 누구나 다 갖고 있으니 혼자만의 것인 양 웅크리지 말자고, 내 안의 그림자를 다정하게 받아들이자고, 콤플렉스를 없앨 수 없으니 품위 있고 우아하게 가꾸면 된다고, 지금도 충분히 괜찮으니 불필요한 자책과 미움을 잠재우라고, 우리는 모두 부족하고 불완전하기에 서로를 채우면 된다고 토닥이고 싶은데 마른침만 삼키네요.



그러니 우아하고 깊이 있고 품위 있게


힘든 상황에서도 밝은 기운을 뿜고, 화를 내는데도 따뜻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친구는 작은 기쁨도 크게 표현했고, 다른 사람의 장점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며 칭찬했죠. 그래서 친구 주변에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저도 그중 하나였는데 관계가 깊어지지도, 오래가지도 않았어요. 친구가 적극적으로 제게 손짓을 했는데 저는 그 신호를 알아듣지 못했죠. 한편으로는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는 친구와 회의적인 생각으로 가라앉는 저는 섞일 수 없다고 판단했어요. 저와는 너무나 다르기에 그 친구에게는 열등감이나 질투는 나지 않았죠. 그저 신기하고, 재미있고, 만나면 즐겁고, 지속적인 관계를 장담하지 않는 그런 사이였어요.


그 친구가 제게 부럽다고 한 적이 있어요. 외모마저 예쁘고 귀여운 그녀가 제게 그런 말을 한 게 놀라웠죠. 워낙 칭찬을 많이 하는 친구였기에 습관처럼 그냥 한 얘기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제게는 충격이었죠. 저한테 생각이 깊다고 한 것 같은데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어차피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요. 불안과 열등감으로 웅크려 있는 저를 그 친구가 오해한 거였으니까요. 다만 마냥 행복하게 보이는 그 친구도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결핍을 느낀다는 게 놀랍더라고요. 그것도 제게 말이죠.


오랫동안 잊고 있던 친구를 떠올리다가 그녀가 제게 했던 말을 곱씹습니다. 생각의 깊이는 부족하지만 열등감은 깊게 느끼면서 살고 있으니 이젠 이 구덩이가 어느 정도의 거리인지 들여다보려고요.


지금도 제가 아닌 다른 이가 되고 싶고, 제게 없는 능력을 훔치고 싶고, 제 것이 아닌 감성을 뿜어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과 다른 생각을 말하고 있는데 논리는 빈약하고, 진심과 다른 표정을 지으려니 얼굴도 일그러지고 있네요. 톰 리플리 같은 재능이 없으니 그냥 저를 드러내는 게 낫겠어요. 대신 그동안은 서툴고 미숙하게 보여줬다면 이젠 우아하고 품위 있고 깊이 있게 표현하려고요. 그러려면 제 그림자를 그렇게 가꿔야겠죠. 그래야 저도, 당신도 평온할 테니까요.



* 검은 반점, 정미진 글, 황미옥 그림, atnoonbooks펴냄

* 리플리1 : 재능있는 리플리,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홍성영 옮김, 그책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