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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영 Aug 19. 2019

여행 속 여행을 떠나다

파도만을 쫓아, 남들은 모르는 그 곳으로

권태기

발리 서핑 생활 8개월 차, 하루의 가장 큰 고민이 '오늘은 뭐 먹지?'였던 행복 하디 행복한 생활도 시간이 지나니 조금은 권태로워졌다. 아침 해가 뜨는 것을 보며 바다로 향하는 것도, 서핑이 끝난 후 허기진 배를 채우는 로컬 음식도, 물놀이에 한껏 나른해진 몸을 두어 시간 누이는 것도. 햇빛이 조금 누그러든 오후에 잠에서 깨어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내일은 어떤 바다에서 어떤 파도를 만날지 상상하며 이들과 함께 다시 잠에 드는 것도.


사람이 참 간사하기도 하지. 이런 천국 같던 삶에 찾아온 권태로움의 사이를 비집고 왠지 모를 스트레스가 찾아왔다. 오랜 기간 생활한 도미토리는 이제 한국의 치열한 삶으로부터의 휴식처가 아니라, 나도 모르는 새 가슴을 슬며시 옥죄어오는 답답한 공간이 되어있었다. 딱히 사람들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서핑에 싫증이 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스트레스의 정체가 뭔지 몰라 고민하던 중 함께 꽤 오랜 시간을 지냈던 언니들에게 이를 털어놓으니 그들이 말했다. 지금까지 아무 말 없길래 너는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다고, 자기는 2달 만에 그랬는데 참 오래도 괜찮았다고. 그냥 너무 오랜 시간 혼자만의 공간이,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 날 나는 또다시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바투카라스

바투카라스는 아주 조그만 시골마을이다. 인도네시아 본섬 한 귀퉁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반둥이라는 도시에서 무려 7시간이나 차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서핑 말고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지만, 파도가 좋기 때문인지 반나절 이상을 꼬박 길에서 보내면서도 찾아오는 서퍼들이 많다.


그렇게 도착한 숙소. 발리 7개월 차, 통장이 점점 가벼워지는 중인 나는 돈을 아끼기 위해 저렴한 홈스테이를 예약했다. 뭐 예상했던 일이지만, 싼 값을 하는 방이었다. 당연히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에어컨은 없었고, 선풍기는 소리를 내며 돌아갔으며, 방 바깥의 소리는 벽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와이파이가 잘 터졌고, 커튼을 젖히면 탁 트인 바깥의 공기를 즐길 수 있는 테라스가 있다는 것, 딱 1분만 걸어 나가면 발에 물을 적실 수 있을 만큼 바다와 가깝다는 것 정도. 방에는 침대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거기다 우기가 시작하는 터라 모기들도 기승을 부리며 내 다리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뭐 값이 싸니까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하며 짐을 대충 풀어 두고는,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1층의 카페로 나갔다. 그곳은 아주 소박한 장소였는데, 밥도 먹고, 한숨 자다 일어나 커피도 마시고, 무료한 저녁에는 맥주도 한 잔 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로컬이 몇 명 모여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곧 이 숙소에 지내는 웨스턴 한 명이 내 옆에 앉았다. 그녀는 2달 동안 이곳에 머물렀다고 했고, 요즘 파도가 없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리곤 옆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우쿨렐레를 집어 들었고, 노래를 한 곡 하겠다고 했다. 사실 그녀는 우쿨렐레를 연주할 줄도, 노래를 잘할 줄도 모른다. 그냥 기분에 취해 아무렇게나 줄을 튕기고, 노래를 불렀다. 감히 그 노래를 평가하자면 삶에의 구속이 묻어 나오지 않는, 그래서 듣기 좋은 노래였다.


그녀의 노래가 끝나자 로컬 한 명이 우쿨렐레를 받아 들었다. 그의 손 끝은 해가 진 후 고요했던 그 장소와 어울리는 잔잔한 음악을 만들어냈으며, 이윽고 특유의 느낌 있는 목소리가 반주와 어우러졌다.

나는 그때, 처음 온 이곳에 대해 일기를 쓰려하고 있었는데, 무엇을 기록할까 생각하다 딱히 뭔가가 떠오르지 않아 지난 일기를 훑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의 노래가 시작되고선, 나도 모르게 이 날의 감상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이 곳에 오기까지 힘들었던 여정에 대해, 뭔가 부족하지만 이 곳만의 무드가 있는 내 방에 대해, 또 싸지만 충분히 배부른 늦은 저녁을 먹은 것 따위의 시시콜콜한 것들에 대해.

 

밥과 함께 먹던 남은 맥주 한 잔을 곁들여 일기를 써내려 가는 동안 그의 음악은 계속되었고, 일기가 마무리될 즈음 난 이곳에 막 도착했을 때에는 듣지 못했던 파도소리를, 그리고 바닷바람을 느꼈다. 유치하지만 그의 노래가 마법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그런 감정. 아무것도 아닌데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핑 돌 것 같은 이 감정. 에어컨도 없고, 모기도 많고, 서핑 외엔 딱히 할 것도 없지만 이곳에는 파도가, 사람이, 음악이 있고, 그래서 역시 행복이 있다. 더 많은 것을 바랄 게 있겠는가.


음 이곳에 있는 이번 이주 동안은 우쿨렐레를 배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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