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한 여름밤의 꿈이 아니라, 축

by 김정영

상한 머리를 잘라낸다는 건

요즘은 해야할 일들을 하느라 바쁘다. 바닷물과 햇빛으로 하얗게 물이 빠져 상할대로 상한 머리칼도 조금은 윤기를 되찾았고, 자외선에 까맣고 건조하게 그을린 피부는 거의 회복되었다. 보드에 부딪혀 퉁퉁 부어올랐던 광대의 통증도 이제 사그라 들었고, 다리 여기저기 긁히고 찢어져 생긴 흉터들도 더디게 흐려지고 있다.


근데 어쩐지 싫었다. 눈에 띄는 속도로 하얘지는 피부는 야속했고, 미용사 언니한테 꾸중을 들으면서도 상한 머리칼을 쳐내지 않았다. 통증과 흉터마저도 아쉽다는 생각이 들때면 누군가는 나를 참 징하다고 생각하겠지 싶기도 했다. 내가 그 때 그 발리에 있었음을 잊고 싶지 않아 치는 조그마한 발버둥이랄까. 흉터가 사라질 때 쯤이면 이 추억도 이미 옛날에 지나간 일이 되어버릴까봐서. 그렇게 그렇게 나는 한국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 곳에는 귀찮은 일이 많다. 하기 싫은 일이라고 해야 하려나. ‘자신의 장점이 뭔지 주변에 물어보아라’, F를 피하기 위해선 꼭 들어야 하는 무려 4시간짜리 특강에서 내어준 미션에 피곤해하며 여기저기에 카톡을 보냈다. 내 입으로 이런걸 물어본다는게 민망해 과제니 도와달라는 말과 함께.


근데 결단력, 실행력, 끈기라니. 난 내가 이런 사람이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귀차니즘도 심하고, 할 일도 많이 미루는 내가? 그제서야 신경도 쓰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스스로의 장점을 쓰는 칸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그리고 성격검사에선 어느덧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실행력이라는 항목이. 그리곤 쪽팔리게 강의를 듣는 중에 울 뻔 했다. 애써 붙잡으려 하지 않아도, 이미 나를 스쳐지나가버린 것인줄만 알았던 발리는 나를 이루는 가장 큰 축이 되어 내 안에 있었다.


이번 주말에는 바닷물에 절은 이 노란 머리를 마침내 잘라낼 수 있을 것 같다.






이현석 <덕다이브> 1화를 읽고

발리에서 10달을 살았던 나에게 이 글은 소설이 아니라 수필처럼 다가왔다. 사실 난 이제는 흔하게 접할 수 있게 된 서핑 컨텐츠를 즐겨보지 않는다. 서핑이라는 단어만 봐도 가슴이 콩닥콩닥해져 한껏 부푼 기대를 안고 클릭을 하지만, 그래 역시 그렇지. 대다수는 여지없이 실망을 안겨주었다.


서핑은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한 번만 해서도 모르고 열 번을 해도 모른다. 하면 할수록 발만 담가서는 절대 느껴볼 수 없는 것들이 느껴지고 이다지도 나를 헤어 나올 수 없게 만들었던 세계가 펼쳐진다. 그렇기에 서핑을 해보지 않은 제작진이 펼쳐 낸 서핑의 세계는 내가 가슴 뜀을 느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것들이었다. 한 예를 들자면, 무릇 서핑하면 집채만 한 파도를 미끄러지듯 내려오고, 파도 동굴을 누비며, 숏보드를 타고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할 테다. 물론 이 역시 서핑의 일부이자 잔뼈 굵은 이들의 서핑이긴 하지만 나는 이런 퍼포먼스에 빠져 서핑을 사랑하게 된 것은 아니다.


이 소설에서는 (단지 1화를 읽은 게 다지만) 서핑의 그런 환상적이고 단편적인 부분이 아니라,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발리에서의 열달이 보인다. 실력에 부족함이 있기에 매일매일이 더욱 새롭게 느껴졌던 파도, 지기 싫은 마음과 부러움, 그리고 자만을 함께 품고 있던 복잡하면서도 뜨거웠던 감정 따위들이 말이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읽어내려가는 내내 이 소설을 추천해 준 동거인에게 이거 소설 아니라 수필 아니냐며, 작가님께서 발리에 살아 보신 것이 분명하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익숙한 지명이나 용어는 둘째 치고 내가 겪었던, 나를 감싸고 있던 상황들이, 잠들어 있던 기억들이 머리가 아닌 심장을 스쳐 지나갔다. 오죽하면 죽기 전에 보인다는 주마등이란 게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그 감정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녁에 일을 끝내고 자소서를 써야지라고 다짐한 오늘의 나에게 이러한 감정이 독이 될는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이 저녁에 다시금 이 감정을 꺼내어볼 수 있게 해준 작가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 뿐이다. 아마 한동안 이 소설의 새로운 회차가 연재 되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나는 부리나케 창을 열어볼 것 같다.






리와인드

꿈 같은 한 달이었다. ‘나 서핑 없이도 살 수 있네’ 생각했던 게 불과 두어 달 전이었는데, 그 생각이 무색한 걸 넘어 오만하게 느껴질 만큼 꿈만 같은 한 달이었다. 그동안 많이 내려놨다고 생각했는데 마음 한 켠은 파도에 대한 갈증으로 쩍쩍 갈라지고 있었나 보다. 애써 들여다보지 않았을 뿐. 이번 한 달로 그 버석버석함이 모두 가신 건 아니지만 다음 가뭄이 오기까지 버텨낼 힘은 생겼다.


그리고 반가운 얼굴들.

첫날 5년 전 발리에서 함께 서핑했던 KW를 우연히 마주쳤다. 그는 나의 스펀지 시절을 고스란히 목격한 사람이기에, 발리에 장기 체류하며 쑥쑥 커가는 모습을 SNS에 올릴 때마다 “말도 안돼!와 같은 반응을 남겼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5년 만에 마주친건데, 저게 너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며ㅋㅋ 나의 비루한 실력을 비웃었다 에잇!


그리고 KD. 그녀는 내 발리 후반전을 함께 한 사람이다. 실력이 비슷한 버디가 있으면 경쟁도 해가며 같이 성장하는 재미가 있는데, 나에게는 언니가 그랬다. 나보다 늦게 캠프에 합류했지만 실력이 무서울 정도로 빨리 늘어서 언니한테 지지 않으려고 열심이었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은 명함도 못 내밀지만.


언니 집에서 하루를 묵었는데 그동안 못 보고 살았던 게 맞나 싶을 만큼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그때의 발리와, 지금의 우리, 앞으로 그려나갈 파도 위 삶에 대해. 실력도 상황도 열정의 크기도, 예전과는 많은 게 달라졌지만 여전히 삶을 지탱하는 축 하나만은 같아서, 그래서 즐거웠다.


마지막으로 물가의 사람들

맞아 나 사람 좋아했었지. 굳이 약속하지 않고도 물가에 가면 보게 되는 사람들, 직업도 나이도 아무것도 모르지만 서로의 라이딩으로 서로를 기억하는 사람들. 이들과 나누는 얕지만 소중한 감정들이 부표를 단 듯 모래 속에서부터 다시금 떠올랐다. 이 감정도 곧 가만가만 가라앉기 시작하겠지만, 발목을 감싼 리쉬를 영영 끊어내지만 않는다면 이들과도 언젠가 어딘가의 물속에서 필연적으로 다시 만나겠지.


이래서, 내가 서핑을 못 끊어낸다.






발리일기, 그 마지막 장

'인생을 빛내줄 1년을 살고 있어요'

발리에 있을 때 인터뷰 요청을 꽤 받았어요. 그곳에서의 생활보다도 결정을 하게 된 계기, 할 수 있었던 용기와 막연한 두려움에 대한 질문이 주를 이루었죠. 아예 '무모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주제로 인터뷰를 한 적도 있고요.


저는 제 선택이 막대한 결정이라 생각지 않았기에 대단하다거나 무모하다고도 여기지 않았어요. 그도 그럴 것이, 시험기간 스트레스를 타파하고자 가벼운 마음으로 끊은 편도 비행기 티켓이 시발점이었으니까요. 사람들 생각은 좀 달랐나 봐요. 물론 사랑과 응원을 훨씬 많이 받았지만 한 켠에서는 그 1년을 두고 잘했다 못했다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더라고요. 인터뷰에선 미래에 후회는 없겠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어요.


제 답변은 이거였어요. 발리에서 만난 수많은 파도가 앞으로 삶을 윤택하게 할지 삼키고 잠식시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어떻든 후회는 없을 거라고. 이렇게 미치도록 행복한 감정을 느껴본 경험이 커리어는 몰라도 인생을 반짝이게 해줄 것임은 확실하다고요.


3년이 지난 지금, 저는 그 경험 덕에 먹고살고 있어요. 추억을 파먹으면서 삶을 살아내는 게 아니라, 진짜로 벌어먹고 있어요. 그 미치도록 행복한 감정이 사진에는 담기지가 않아서, 시간이 갈수록 색이 바랠 것이 안타까워 적기 시작한 에세이는 값진 보물이 되었어요. 한화 에디터 인턴부터 카카오커머스 어시스턴트, 우아한형제들 에디터로의 커리어가 싹을 틔운 지점이니까요.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엮이고 엮여, 저에게도 드디어 둥지가 생겼어요. 아주 조금은 더 어른스럽길 바라는 인생 제2막의 시작은 한화자산운용과 함께 하게 될 것 같아요. 물론 서핑과 내 멋대로 행복할 때만 적는 에세이도 계속될 거고요.


발리 1년의 이야기, 지지부진하게 이어가던 일기의 마지막 장은 꼭 이렇게 끝내고 싶었어요. 그 선택이 제 삶을 어디로 끌고 갈지 궁금해했던 과거의 모두에게 전하고 싶었어요. 진짜로 제 인생은 그로 인해 반짝이고 있고, 더 반짝일 거라고. 발리일기, 진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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