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제 2막

by 김정영

시나브로

서핑을 하면서 더 도드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내 특유의 태평함이다. 원래도 감정기복이 그리 크지 않은 나였지만, 서핑을 시작한 후론 내 자신과 타인의 행동에 대한 용납 범위가 무척이나 넓어졌다. 머리 좀 안 말린 채로 다니면 어때, 빗물에 발이 좀 젖으면 어때, 비루한 기타 실력이지만 남들이 보면 좀 어때, 뭐 이렇게.


서핑을 시작하고 한 1년 반쯤이었나, 바투카라스에 있을 때 이런 일기를 쓴 적이 있다. 우쿨렐레를 연주할 줄도, 노래를 잘 부를 줄도 모르는 그녀가 아무렇게나 만들어낸 노랫마디가 그렇게나 듣기 좋았다고. 느지막한 하루의 끝에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분위기와 반주로 들이킨 맥주 한 잔도 분명 그 몫을 했을테지만 그건 아마 그 노래에 아무런 삶의 구속이 묻어나오지 않기 때문일 거라고.


이번 양양에서 남긴 사진들이 내게 더 의미가 있는 이유는 이제는 전혀 꾸미지 않은 모습으로도 카메라 렌즈를 똑바로 마주할 수 있게 된 나 자신이 대견했기 때문이고, 바투카라스의 그녀처럼 아무렇게나 기타를 뚱땅거리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기도 하며 이런 내 삶에 함께 해줄, 나와 비슷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미 가능한만큼 충분히 물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나는 지금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 더 물들어가고 있다.






빨간 자동차

블루코스트의 하루를 여는 것은 빨갛고 각진 서핑카다. 동이 채 트기도 전에 들려오는 시동 소리는 모두에게 오늘의 서핑이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그럼 눈도 제대로 못 뜬 사람들이 하나둘 숙소를 빠져나와 기지개를 켠다. 전날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도 다들 몸을 일으키는 걸 보면 참, 서핑이 뭔지 싶기도 하다.


이들이 이렇게 새벽같이 일어나 하는 이야기의 주제는 단 한 번도 궤도를 벗어난 적이 없다. ‘오늘은 어디로 가지?’ 한참을 차트와 캠을 들여다보며 토론해 보지만, 그 끝은 언제나 하나로 귀결된다. 결국에 우리는 손바닥만 한 디스플레이에 답답함을 느끼고 두 눈에 직접 파도를 담으러 떠나게 되어있다. 거대한 자연의 움직임을 담기에 휴대폰은 그릇이 너무 작다.


나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그 빨간 차에 반응한다. 차에 올라타 창문을 끝까지 내리고, 코로 찬 공기를 들이켜는 순간부터 두근거림은 시작된다. 혹여나 마음같지 않은 파도에 괜히 실망하게 될까 기대를 눌러보지만 들뜬 심장의 박동은 콧노래가 되어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온다.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해변으로 향하는 내내 생각했다. 참 멋진 차라고. 이렇게 몸만 담가도 마음이 동하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그리곤 직감했다. 길눈이 어두워 인생에 자차는 없을 거라 생각했던 나도 언젠가는 차를 가지게 되겠다는 것을. 멋있고 번쩍이는 차 말고 소박하게 나와 보드, 사람들을 좋은 파도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줄 정도면 된다.


언젠가 내 서핑카가 생기면 차에 탔을 때 흘러나올 첫 곡은 이효리의 빨간 자동차로 해야지.






곡선

유려한 곡선의 라이딩을 하고 싶다.


파도의 날을 베는 직선 말고, 위아래로 뾰족하게 찌르는 각형 말고, 도화지를 넓게 쓰는 물결형의 라이딩을 하고 싶다. 어떠한 기술로 파도를 앞서가기보다 파도가 내어주는 흐름에 유유히 몸을 맡기는 라이딩을 하고 싶다. 눈을 감고 떠올려 보건대 이는 벚꽃잎 하나가 바람을 타고 땅으로 내려앉는 양상인 듯도 하고, 리본체조 선수의 지휘를 따라 리본이 흘러가는 길 같기도 하다.


롱도 타고 숏도 시도해보며 다양한 스타일을 마주하는 요즘, 그래서 내가 추구할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 골똘하다. 그러려면 결국 미드랭스나 피쉬 정도에 안착하게 되려나. 어찌저찌 하다보니 이번 결론도 주류는 아니다. 이것 역시도 반골기질이 작용한 결과일까. 옛날부터 남들이 다 좋아한다는 것엔 묘하게 관심이 가지 않았던 내 성향이 이번에도 이런 결론으로 나를 이끈걸까.


일단은 일단은 숏보드를 열심히 타봐야지. 그런후에 색을 한 번 입혀봐야지. 메인스트림이 아니더라도 수려함은 다 통하기 마련이니까.






대회 회고록

인도네시아에서의 10개월 서핑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던 5년 전 그날보다 실력이 는 날은 아직 단 하루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간 취업 준비도 하고 회사에 적응도 하면서 쉼표를 오래 찍었더니 파도가 그리워 몇 번 찾아갔던 죽도에서도 한 달 바짝 해외 같은 파도를 탔던 다대포에서도 퇴화된 실력이 어느정도 끌어올려졌다 싶으면 이내 일상으로 복귀해 감각을 잊어버리는 굴레에서 벗어나질 못하더군요. 짬을 내어 잠시 파도를 타본들 이전보다 못한 스스로에 현타를 느끼고 점점 서핑과 멀어지던 찰나였습니다.


그런데 웨이브파크를 찾으면서 요즘 조금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제가 그리워하던 건 물론 ‘실력의 최상단을 보여줄 수 있던 나’도 있지만 ‘어제보다 나은 나’의 모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간에는 줄곧 가파른 내리막길을 걸었으니까요. 이곳에서는 하루하루, 아니 한 파도마다 일보 나아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오늘 대회의 결과가 조금 아쉽습니다. 숏보드를 연습하다 급 선회해 일주일 바짝 롱보드를 타고 출전한 거라, 애초에 기대도 않던 결승 진출이었습니다. 그런데 전날부터 자연스러운 프론트 행파이브 메이드가 되고 예선 중에는 이틀 전엔 안되던 백사이드 행파이브가 되더니 예선 끝에서 두번째, 딱 하나의 파도를 23살의 김정영이 탔을 것처럼 탔습니다.


사람이 참 간사한 게 이 라이딩 하나로, 베스트쿡 노린다며 꽃받침이니 하트니 열심히 날렸던 나는 온데간데없고 잘 타고 싶다는 욕심이 마음 한켠에 싹텄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결승을 이렇게까지 절었나 싶기도 하구요. 성취감이 주는 쾌감이 이렇게나 무섭습니다.


물론 이번에도 그때의 나를 넘진 못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말의 희망을 발견했달까요. 33살에는 10년 전의 김정영과 롱보드 리벤지 매치를 해봐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일단 당분간은 어제보다 나은 내 모습이 주는 도파민을 열심히 쫓아가보려고 합니다. 숏보드를 테이크오프부터 하나하나 차근차근 쌓아올려가면서요. 5월이 얼마 남지 않은게 아쉽고, 그 뒤로는 또 얼마간 쉬어가는 시간이 다시 찾아오겠지만 그래도 이 끈질긴 연을 아예 끊어내지만 않는다면 언젠간 저도 제 자신을 넘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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