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 그릇이 쌓이고 빨래통에 옷들이 넘쳐흘렀다. 김장배추가 누렇게 떠 가는 걸 더는 지켜볼 수 없어서 팔을 걷어붙이고 배추 앞에 앉았는데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아빠에게 고열이 계속 돼서 코로나19 검사를 했는데 양성 판정이 나왔다며 오늘 당장 격리병동이 있는 큰 병원으로 이동하거나 퇴원하라고 했다.
2023년 8월, 아빠가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빠른 수술 덕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아빠는 84년 인생을 몽땅 까먹고 갓난아이처럼 되셨다. 예고편 하나 없이 일을 당한 가족들은 건장했던 아빠를 생각하며 기대를 걸었다가도 아빠의 연세를 떠올리며 체념하길 반복했다.
아빠가 가족들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건 인지와 언어를 담당하는 좌뇌에 출혈이 컸기 때문이라고 했다. 매일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는 운동을 하시던 아빠가 하루아침에 혼자서는 앉지도 서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게 되다니….
아빠가 입원하신 지 3개월이 되자 담당 의사는 낯선 병원보다는 아빠에게 익숙한 환경이 인지력 향상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며 퇴원을 권유했다. 퇴원은 가족 모두가 바라는 바였지만, 문제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빠를 엄마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그러다 엄마까지 쓰러지시면? 답이 없었다.
아빠를 위해선 퇴원을, 엄마를 위해선 병원을 택해야 하는 딜레마 속에서 나는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고 맥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더는 미룰 수 없어 소매를 걷어붙이고 배추앞에 막 앉았던 내게 걸려온 전화는 말했다. 아빠가 코로나19에 감염되었으니, 당장 퇴원을 하든 격리병동이 있는 큰병원으로 전원하라고.
병원에서 감염됐으니 병원이 책임지라고 항의하고 싶었지만, 병원의 지시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바쁘게 전화를 돌렸지만, 당장 아빠를 받아줄 병원을 찾을 수 없었다. 눈물이 났다.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남편이 말했다.“오늘 집으로 모시면 어때? 어차피 조만간 퇴원하려고 했잖아. 아버님, 콧줄 빼고 죽 드시게 된 지 불과 며칠 전이야. 코로나 걸리셔서 컨디션도 안 좋은데, 격리병동에 가시면 다시 콧줄 끼고 소변줄 달게 되지 않겠어? 그렇게 되면 퇴원은 또 몇 개월 늦춰질 거고….”
수술 후 처음 본 아빠의 모습은 실험실에 붙잡혀 온 외계인 같았다. 링거줄, 소변줄, 콧줄 등 여러 가닥의 줄들을 통해 이런저런 액체들이 아빠의 몸속을 들고 났다. 이 줄들을 모두 떼는 데 꼬박 석 달이 걸렸다. 다시 이 줄들을 달게 된다면 아빠는 영원히 병원에 갇히게 될지도 모른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한 후, 남편과 나는 즉시 병원으로 향했다.
열꽃이 빨갛게 핀 채 누워있던 아빠는 나를 보자 마중 나온 엄마를 본 아이마냥 방긋 웃었다. 간병인 서넛의 도움을 받아 아빠를 휠체어에 태운 후 주차장으로 향했다. 170센티미터가 넘는 장신의 아빠를 자동차에 태우는 데만 십 분은 족히 걸렸다. 내가 먼저 자동차 뒷좌석으로 들어가 아빠를 안아 당기고 남편은 다른 쪽에서 아빠를 안아 뒷좌석으로 밀어 넣었다. 행여나 아빠를 넘어뜨릴까 어찌나 긴장했는지, 영하의 날씨에도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자동차가 출발하자 내 머릿속은 앞으로 닥칠 일들을 생각하느라 분주했다. '차에서 아빠를 어떻게 내리지? 안방 침대까진 어떻게 옮기지? 저녁에 드실 죽은 어쩌지?’그때였다. 아빠의 손이 내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똑바로 앉지 못하는 아빠를 내가 안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인제 보니 아빠가 나를 꼭 안고 계셨다.‘우리 딸, 걱정하지 마. 다 잘될 거야.’ 아빠의 손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는 당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빠의 손은 모든 걸 기억하는 듯 내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괜찮아, 걱정마.’
아빠가 퇴원하시던 날 담근 김치에서 시큼달콤 맛있는 냄새가 뽈뽈 난다. 아빠는 코로나19를 이겨내셨고, 이젠 죽이 아닌 밥을 드신다. 내 등을 토닥였던 아빠의 손은 이제 매일 엄마의 머리를 쓰다듬고 엄마를 꼭 안아 주신단다. 그 덕에 엄마는 간병의 고단함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