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무게만큼 마음이 무거웠고 12월 추위만큼 가슴이 떨렸지만, 난 잘 해낼 자신이 있었고또그래야만 했다.
시어머니는 미국에 정착한 지 꼭 10년 만에 시민권을 따냈다. 그녀가 시민권을 따자마자 한 첫 번째 일은 한국에 있는 자식들을 미국에 초청하는 거였다. 당시 이민자들은 모두 그렇게 했다고 한다.
아메리칸드림이었든, 이혼이나 돈문제 등 한국에서의 복잡 미묘한 관계를 한방에 끊어내고 싶은 욕망이었든, 고국을 버리고 낯설고 큰 나라로 건너와 나름의 역경을 거쳐 당당히 미국인이 된 그들에겐, 나고 자란 조국에 대한 애틋함 따윈 없었다고 한다. 그때의 한국은 지금의 한국은 아주 다른 나라였으니까. 미국에 비해 구질구질하고 찌질했던 한국에 살고 있는 내 자식을 하루빨리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미국으로 데려와야한다는 조급함만이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시어머니는 지금도 한국을 그녀가 이민 떠났던 시절, 1980년대의 한국으로만 기억하신다.
십몇 년 전 어느 날, 남편이 내게 말했다.
"오마니가 우리 보고 미국에 들어와서 살라고 가족 초청을 한다나 뭐라나...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그래서 일단 그러시라고 했어. 영주권이 당장 나오는 것도 아니고... 뭐, 보험 하나 들어놓은 셈 치자고."
이 말을 듣고 나는 아주 잠깐, 내가 노랑머리들 사이에서 쏼라쏼라 유창한 영어를 말하며 멋지게 서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섹스 앤 더 시티( Sex and the xity)'의 '캐리'가 된 나.
나는 곧바로 고개를 세게 저었다.
고개를 젓는 나의 행동을 미국에 가기 싫다는 표현으로 여겼는지 남편은급히 덧붙여말했다.
"영주권, 그거 안 나올 확률이 더 커. 기혼 자녀 초청은 잘 안된다 하더라고.”
이 말을 듣고는 머릿속에서 영주권에 대한 생각을 싹 지워버렸다. 나오지도 않을 영주권에 대해선 걱정도 기대도 다 쓸데없으니까.그리고 나는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저녁 6시에 퇴근하는, 피곤하지만 안정된 일상을 살아갔다.
그렇게 십몇 년이 지나는 동안 나는, 남편관 나의 이름이 미국 영주권 가족 초청자명단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작년 6월 어느 날, 시어머니는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너희 영주권 신청하라는 레터(Letter)가 드디어 왔다. 기다리다 지쳐서 이제 포기하려던 참이었는데, 기다린 보람이 있긴 있구나. 트럼프 이 쌍노무 새끼가 대통령이 된 다음에 영주권 받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더니, 어째 용케도 너희 영주권은 통과됐나 보다. 너흰 참 운도 좋다. 니 형은 아직인데... 어떻게, 내가 여기서 신청하랴? 아니면 한국에도 이민 변호사가 있다던데, 네가 알아볼래? 이거 빨리 해야지.시간 없다. 어떻게 할래?"
시어머니는, 이제 영주권이 나왔으니 우리가 미국에 들어와 사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갑작스런 일이어서 우린 좀 어리둥절했다.
남편은 "글쎄, 생각 좀 해볼게요."라는 대답했고, 이 말은 아들과 함께 살 희망에 잔뜩 부풀었던 그녀의 심장에 찬물을 끼얹었다.
잠시의 침묵 후시어머니의화와 짜증이섞인목소리가 전화기를 뚫고 내 귀까지 닿았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게 뭐있니. 남들은 미국에 못 들어와 안달인데, 맨날 신문에도 나오지 않던? 미국 영주권 따려고 투자이민이다 뭐다 하려면 5억도 넘게 든다더라. 너희는 왜 거저 굴러온 복을 차 버리려고 하니?"
"생각해 본다고 했지, 언제 안 한다고 했어요? 생각해보고 알려드릴게요."
남편의 차분하고 단호한 대답에, 시어머니는 전화를 확 끊어버렸다.
통화내용을 곁에서 모두 들었기 때문에 새삼 무슨 일이냐고 묻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남편은 소파에 누워 눈을 감아버렸고, 나는 부엌으로 가서 쓸데없이 할 일을 찾아서 서성댔다.
며칠 후 시어머니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그녀는 그제야,한국에서 멀쩡히 잘 사는 우리에게 미국 이민을 강요하는 게 무리라는 생각에 도달한 듯했다.
그녀는 매우 차분한 목소리로, 영주권을 신청할지 말지 결정해서 되도록 빨리 알려달라고 했다.
"미국 놈들 일하는 게 느려 터져서 영주권 신청을 하는데 또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른다."라는말을 덧붙였다.
생판 모르는 나라로 이민을 간다는 건,이삿짐센터트럭에 짐을 가득 싣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집을 옮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강남 부자들이 투자이민 설명회를 부지런히 쫓아다니며 갖지 못해 안달하는 게 미국 영주권이라고 뉴스에선 떠들어댔지만, 난 잘 모르겠고!
난그저, 평화롭고 안정된 한국생활을 버리고 낯선 나라에서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기엔 내 나이가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주권과 관련한어떤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남편이어야 한다고 나는 확신했다.
저간의 사정이 어떻든 이건 수십 년 떨어져 산 가족이 다시 같이 살게 되느냐 마느냐의 일이다.
여기에 나의 시집살이 걱정 따위를 얹는 건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며칠을 고민하던 남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가보지도 않고 거기 뭐가 있을지 어떻게 알아? 확인도 않고 포기하는 건 아니지. 혹시 누가 알아? 우리가 아메리칸 스타일일지도. 그리고 영주권이 신청한다고 다 나오는 것도 아니라니까, 일단 해보자고."
남편은 '늙고 힘 빠진 어머니'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게 고려에 없을 리 없지만, 그는 내게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만 얘기했다.
공자님 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땐, 바다에 나가 물살에 몸을 맡기라고 했다.
자, 이제 내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함 보자고.Let it be ~
마침 남편의 대학동창 중에 미국 변호사가 있어서 영주권 신청 대행을 의뢰했다.
여권사진을 새로 찍고, 가족관계증명서니 범죄경력회보서니하는 서류를 떼서 변호사에게보냈다. 동시에 시어머니는 미국에서 변호사가 요청하는 서류(세금 납부내역 및 혹시 우리에게 금전적 문제가 발생할 경우 미국 사회보장기금을 절대로 축내지 않도록 재정보증을 하겠다는 맹세가 담긴 서류 등등)를 떼서 부지런히전달했다.
자료를 준비하는 내내 그녀는 매일같이 전화를 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소풍을 기다리는 초등학생처럼 한껏 들떠 있었다.
비싼 신체검사를 받고, 나이 오십에 풍진, 볼거리, 홍역 예방주사까지 맞았다.
옛날에 다 맞았을 테지만, 증명할 수 없으니 다시 맞는 수밖에.
마지막관문인미 대사관인터뷰를마치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이로써미국 놈들 어쩌고 하며 느려 터진 일처리에 대해 욕을 해대던 시어머니의 말은 사실로 판명됐다.
여권에 미국 영주비자가 꽂혔다. 그 따기 어렵다는 저 하늘의 별을 우리가 딴 거다.
6개월이내에 입국하면 무조건 영주권자가된다.다르게 말하면, 6개월 이내에 입국을 못하거나 안 하면 영주권은 자동 취소라는 얘기다.
여기까지 흘러왔지만, 여전히 이민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지금껏 애써 가꾼 사업은 어쩔 것이고, 내늙은 부모님에게는 뭐라고 말해야 하나(아마 엄마는 영영 못 볼 것처럼 울고불고 난리가 날 거다, 안 봐도 비디오지), 집은 팔 것인가 전세를 놓고 갈 것인가 등등 크고 작은 일들이 수도 없이 발에 차였다.
그동안 영주권에 들인 시간과 돈과 노력을 생각하면 여기까지 와서 그만두는 건 정말 아니다 싶었다.그리고 미국에서 홀로 늙어가는 일흔넷의 시어머니도눈에 밟혔다.
입국 기한은 다가오고 입국 결정을 쉽사리 내지 못하는 남편과 나는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미국 이민에 대한 정보를 매일매일 검색하고 또 했다.
그러던 중 <미국 영주권자는 1년 중 183일 이상을 미국에 체류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문구를 발견하고 우린 긴 터널 끝에 한줄기 빛을 발견한 듯 기뻤다.
"그럼 1년 중 182일은 한국에 있어도 된다는 얘기네." 남편이 말했다.
"오호! 그래? 그럼 집을 팔지 않아도 되고,엄마 아빠에게는 미국 시댁에 좀 한참 다녀오는 걸로 하면 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