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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y Apr 07. 2020

조심해! 옆방에 시엄마가 살고 있어

03_아름다운 거리는 대체 얼마일까.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고 본격적으로 미국행이 결정되자, 남편은 '아름다운 거리'라는 말을 자주 했다.

“우리 오마니 성격 엄청 불같아. 오마니랑 아름다운 거리를 유지해야해. 그래야만 우리가 미국에서 오마니랑 같이 살 수 있어.


미국에 있는 동안 우린 시어머니의 집에서 함께 살기로 했다. 매년 6개월만 미국에 머물 계획인데 따로 집을 얻는 건 낭비니까.


"Beautiful Distance, 그래 중요하지, 맞아." 하며 남편의 말에 맞장구는 쳤지만, 구체적으로 아름다운 거리가 얼마인지, 또 그걸 어떻게 유지해야 할지 나는 몰랐다.


수개월 동안 집을 비워야 하니  일이 산더미였다. 냉장고 속 음식들은 먹어 없애거나 냉동실로 옮겼다. 화분은 지인들에게 나눠주거나 맡겼다. 싱크대 개수구를 빡빡 닦고 세탁조를 바싹 말렸다. 욕실 배수구는 트랩까지 꺼내 닦고, 쓰레기통은 물로 깨끗이 씻어 뒤집어 말렸다.

도둑놈한테 잘 보일 일 있냐며 열심히 청소라는 나를 보며 남편은 웃었지만, 집을 비우는 동안 환기를 못하니 곰팡이와 악취가 나지 않게 하려면 다른 방법은 없었다.

현관과 거실창문의 잠금쇠를 두 번 세 번 확인하고 외부침입센서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여러 번 체크했다.

출국 전 마지막 빨래를 개켜 서랍장에 가지런히 넣고 옷장 이불장에 물먹는 하마를 두둑이 다.

비행시간이 11시간이나 되니 쉬는 건 그때로 미루고, 나는 혹시나 집을 비울 때 생길지 모를 일들을 상상해가며 거실에서 안방으로 욕실에서 베란다로 바쁘게 일거리를 찾아다녔다.


시어머니가 사는 캘리포니아는 겨울에도 낮 기온이 20도 넘게 올라가는 온화기후 덕분에 미국에서도 살기 좋은 도시 1,2위에 꼽힌다.

한국의 매서운 추위를 피해 캘리포니아로 겨울여행을 떠나 사람도 많다지만, 나는 하필 겨울에 집을 비우게 되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파로 수도관이나 난방수가 얼어 터지는 상상을 할 때면 나는 영주권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싶어졌다.


우리는, 시어머니가 꼭 사 가지고 오라고 주문한 고춧가루, 마른 멸치와 새우, 명란젓과 갈치속젓, 김 등으 가득 찬 캐리어를 밀고 끌며 미국에 입국했다.

캘리포니아 남서쪽 작은 도시, 시어머니의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차멀미로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시어머니에게 간단히 꾸뻑 인사만  쓰러져 잠이 들었다.

얼마쯤 잤을까. 눈을 뜬 순간, 여기가 어디? 나는 누구? 잠시 헷갈렸다. 참 내가 미국 시댁에 왔지. 후다닥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테이블 위에 몇 가지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핸드크림, 풋로션, 기초화장품 세트. 모두 새것이었고 시어머니가 나를 위해 장만한 것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나는 속으로 거봐 외치며 방을 나섰다.

남편이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LAX 공항에서, 택시 안에서 강조하고 또 강조한 '아름다운 거리'를 머릿속 지우개로 순식간에 지워버렸다.

 

시어머니는, 내가 자는 동안 저녁식사도 이미 준비해놓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소고기 듬뿍 된장찌개와 맛깔스런 간장게장이 곁들여진 밥상을 받은 나는 간장게장에 밥을 슥슥 비비며 감격에 젖었다.

'거봐, 시어머닌 나한테 시집살이 따위를 시킬 분이 아니라니까.'

내 예상이 들어맞은 게 기뻤고, "앞으로 설거지는 전부 제가 할게요"라고 말해 버렸다.

"얘, 나 그렇게 구식 시어머니 아니다. 나는 혼자 오래 살아서 혼자 밥 먹고 치우는 게 더 편해.  신경은 쓰지도 마라."

그녀의 진지한 표정으로 보아 며느리를 간보기 위해 그냥 해보는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미국에 있는 동안 우리가 사용할 방은 시어머니의 방 바로 옆방이었다. 시어머니 방과 우리 방 사이에는 욕실 겸 화장실이 있었는데,  욕실을 우리에게 양보하고 시어머닌 한참 떨어진 손님용 화장실을 쓰겠다 했다.

 

가방을 풀어 짐 정리를 하는데, 시어머니가 옆방에서 나를 불렀다. 네에 하며 옆방으로 달려가 보니, 그녀는 침대 위에 작은 보석 상자 몇 개와 크로스 백을 주욱 펼쳐놓고 앉아 계셨다.

"얘, 이거 너 해라. 내가 이제 이런 게 뭐 필요하겠니?"

시어머니는 그녀가 끼던 진주 목걸이와 반지, 시계, 가방 등을 내게 건넸다.

"어머니가 시지 왜 절 주세요?

"죽을 날 받아놓은 나다. 인제 이런  나한테 무슨 소용 있겠니.  살이라도 젊은 니가 해라. 이거 살 때부터, 조금만 끼다가 너 주려고 했어."

하마터면 시어머니를 확 끌어안을 뻔했다.

 

미국에 도착한 첫날은 이렇게 저물어갔다.

난 잘 해낼 자신이 있었고, 첫날을 무사히 마쳐 기뻤다. 장거리 비행의 피곤함에 젖어 막 잠이 들려고 할 때였다. 옆방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얘, 이리 좀 와 봐라. 얘, 얘."

나는 이불을 털고 선잠으로 무거워진 몸을 일으켜 시어머니의 방으로 갔다.

"벌써 자는 거 아니지? 이거 가져가라."

그녀는 지갑에서 체크카드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시장 볼 때 쓰라고. 아까 반지 줄 때 준다는 걸 깜빡했지 뭐냐."

크카드를 받아들고 방문을 나서려는데, 시어머니가 나를 불러 세웠다.

"잠깐 여기 앉아봐라. 이제  영주권 카드가 나오면 바로 소셜을 받아야 한다. 소셜 오피스는 레이크우드 불바드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 보면 CVS 옆에 있어. 그리고..."

"어머니, 지금 저한테 말씀하셔도 저는 하나도 기억 못 해요. 나중에 필요할 때 다시 여쭐게요."

"얘, 내가 말할 때 그냥 들어둬!! 생각날 때 얘기해야지, 자꾸 까먹잖니."

시어머니 목소리에 짜증이 약간 묻어나는 것을 느낀 나는 잠자코 듣기로 했다.

"들어두면 필요할 때 떠오른다. 소셜 넘버 나오면 DMV에 가서 운전면허증도 빨리 신청해야지. 미국에서는 운전면허증 없으면 아무것도 못해. DMV는 카슨 스트리트에 있는 게 제일 사람이 적다. 그리고 시장은 홀푸드365라고 유기농 파는 데가 있는데, 거기 물건이 좋다. 그리고 또..."

나는 무슨 소린지도 모르겠는 얘기한참 들은 후에야 그녀의 방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체크카드를 이 늦은 밤에 잠자는 사람을 불러서 줘야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불현듯 알 수 없는 불안함이 훅 끼쳤다. 마음속 어디선가 삐그덕하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생각을 정리했다.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당신 카드를 쓰라고 주신 건데, 그게 무슨 문제야, 소셜이니 DMV니 잘 모르겠지만 들어두면 정말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괜찮아. 아무 일도 아니야. 

하지만 불안한 마음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데, 그제야 그녀의 방과 우리 방 사이가 겨우 세 발자국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걸 깨달았다. 남편이 강조하던 '아름다운 거리'를 고작 세 발자국으로 유지할 수 있을지 강한 의구심이 생겼다. 

나는 쓸데없는 불안을 털어내기 위해 머리를 세게 흔들며 체크카드를 손에 꼭 쥐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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