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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pr 30. 2020

미국 독립전쟁과 군비 조달 방식

미국 경제 역사 이야기 08

미국 독립 전쟁(American War of Independence, 1775년 4월 ~ 1783년 9월)은 13개 식민지와 영국 사이에서 발발한 전쟁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미합중국(이하 미국)의 독립이 선언된 것으로 결론이 났다. 


미국 독립전쟁 과정


1775년 4월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 사이의 렉싱턴 전투 이후, 승리를 거둔 민병대는 보스턴을 포위하게 되고 다음 해 3월 영국군은 보스턴에서 철수를 하게 된다.


1775년 5월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2차 대륙회의에서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을 대륙 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아울러 1776년 7월 2일 식민지 독립에 대해 투표를 진행하고, 7월 4일 그 유명한 미국의 <독립선언서(United States Declaration of Independence)>을 발표하게 된다. 


독립전쟁은 초기 영국군의 우세로 진행되었는데, 1776년 9월에 뉴욕을 점령당하게 된다.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  <출처 : 위키피디아>


패전과 후퇴로 일관하던 대륙 군은 1776년 12월 25일 델라웨어 강을 건너 치러진 트렌턴 전투(Battle of Trenton)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프린스턴 전투(Battle of Princeton)에서도 승리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전쟁의 상황을 반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군의 사기는 올라가게 된다.


당시 총사령관이었던 워싱턴은 과거 버지니아 민병대 중령으로 7년 전쟁에도 참전한 경력이 있었다.


독립전쟁에 참전할 당시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훈련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월급은 커녕 군인들이 굶는 날도 발생했다. 아울러 그를 시기 질투하는 사람도 생겨 유언비어가 발생되기도 했다. 


그러나 워싱턴은 자신의 봉급도 사양한 채 병사를 이끌고 전쟁을 진행했다. 그러나 전투의 패배가 늘어날수록 식민지 사람들은 점차 지쳐갔으며, 사기도 크게 저하되었다.



델라워어 강을 건너는 워싱턴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두 개의 싸움(트렌턴 전투와 프린스턴 전투)에서 승리하여 패배에 익숙했던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는 것은 물론, 조속히 전쟁을 마무리하려던 영국군의 희망을 앗아간 결과를 가져왔다. 이 승리를 통해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난 것이다.


1777년 영국군의 존 버고인(John Burgoyne) 장군은 뉴잉글랜드 식민지를 고립시키기 위한 작전을 수행하려 했으나, 10월 새러토가 전투(Battle of Saratoga)에서 대륙 군에게 패배하게 된다. 


이 전투 이후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의 설득에 프랑스는 대륙 군과 동맹 조약을 체결하고 1778년에 본격적으로 영국과의 전쟁에 참여하였다. 


이어 스페인도 미국과의 동맹국이 아닌, 프랑스와의 우호 조약을 근거로 프랑스군 동맹으로 참전하고, 1780년에 네덜란드도 미국 측에 참여하게 된다.


가장 극적인 싸움은 1781년 요크타운 전투(Battle of Yorktown)였다. 


이 전투에서 대륙 군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영국군에 승리함으로써 사실상 독립전쟁의 결정적 싸움이 되었다.


요크타운에서의 항복  <출처 : 위키피디아> 


1782년 영국 의회는 미국 내 모든 전쟁을 중단하는 것을 결정했다. 


1783년 9월 3일 파리 조약이 체결되면서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게 된다. 이로 인해 미국은 새로운 신생 국가로 탄생했다. 


이로부터 2개월 뒤, 워싱턴은 고별사를 낭독하고 대륙 군을 정식으로 해산하게 된다.


 당시 그는 자신이 가질 수 있었던 모든 권리와 권력(유럽에서는 그가 ‘미국의 왕’으로 등극하는 것으로 알았다)을 스스로 내려놓음으로써 많은 존경을 받았다.


독립전쟁의 자금 조달 


처음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식민지 인들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전쟁 비용의 조달이었다.


당시 식민지 13개 주에서 세금을 걷을 수가 없었고 통합된 연방정부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자체적인 수입원이 전무한 상태였다.


 이에 비해 영국은 장비와 군대의 보급에 관해서 문제가 없었다. 잉글랜드 은행을 통한 국채 발행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즉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 사실상 전쟁터가 미국 대륙이라는 지리적 불리함을 제외하고는 경제력과 자본력에서 명백히 차이가 큰 싸움이었다. 


결국 이러한 불리한 점을 해결하고자 식민지 사람들은 두 가지 방식을 사용하게 된다. 


첫 번째는 대륙회의의 이름으로 자체 지폐와 전쟁 채권을 발행해 조달하게 된다. 일명 대륙 지폐(일명 콘티넨탈, Continentals)는 전쟁 과정에서 발행된 것이다. 총 2억 4천만 달러나 되었다. 이로 인해 발생된 인플레이션은 독립 후 경제적 혼란을 가져왔다. 


다음은 전쟁 채권의 발행이었다. 이는 발행 주체가 구분되어 있었는데, 대륙회의 명으로 발행된 채권과(차후 누가 채권 금액을 상환할 수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전쟁 초기 판매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3개 주에서 각 주별로 발행한 채권이 있었다.


대륙에서의 채권 발행 기간은 1775~80년 까지 약 6년이었다. 


이 기간 동안 발행된 전쟁 채권을 사간 개인 투자자, 유럽의 왕실 및 상인의 지원이 없었다면, 전쟁의 결과는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었다.


미국 독립 선언에 서명하는 13개 식민지의 대표들 <출처 : 위키피디아>


두 번째 방식은 유럽 국가로부터의 차관(외국 정부나 공적 기관으로부터 자금을 빌려 옴)이었다.


특히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들여왔는데 이 자금을 이용하여 대륙 군이 사용할 무기와 탄약을 사 들이는 데 사용되었다. 


독립전쟁 당시 극도로 취약해진 경제 구조로 외국에서는 대륙회의에서 발행한 지폐(콘티넨탈)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은 화폐(파운드)나 금, 은만이 가능했다. 결국 국채를 발행하여 정기적으로 이자를 지불하고 차후 원금을 상환하는 조건으로 무기와 탄약을 구입할 수 있었다.


채권 발행에 더해 참전 군인에게 별도의 차용증서를 발행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대륙 화폐와 차용증에 대한 기피 현상이 점차 심각해지면서, 경제적 어려움은 더 가중되었다. 결국 남발되어 발행된 대륙 화폐는 액면가의 10% 까지 떨어져 거래되었다.


전쟁 중인 1775~78년 사이 매년 물가가 2배 상승하였고, 79~81년에는 자그마치 10배 가까이 올라갔다. 결국 대륙 화폐는 전쟁이 끝날 무렵 액면가의 2.5%로 가치가 떨어져 거의 무용지물이 되었다. 


식민지 군은 전쟁의 병참을 직접 운영해본 경험이 없어 내부적인 비효율과 혼란, 부패 등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영국도 미국과 더불어 전쟁 비용으로 인한 채무의 증가로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미국의 독립전쟁은 부채에 의존해 치러진 것이고, 신생 국가인 미국의 앞날에 큰 부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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