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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pr 28. 2020

미국 독립전쟁의 시작

미국 경제역사 이야기 07

미국 독립전쟁의 발단이 된 사건은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이다. 


그 전에  '프렌치 인디언 전쟁' 이후 영국에서 시행된 식민지 과세 정책이 발생의 원인이었다. ‘보스턴 차 사건’이 발생될 수 밖에 없었던 경제적 흐름은 다음과 같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 지도 <출처 : 위키피디아>


프렌치 인디언 전쟁(1754년 ~ 1763년)


유럽에서의 7년 전쟁(1756년~1763년 동안 벌어진 전쟁으로 유럽에서 영국의 도움을 받은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 프랑스에 승리를 거두었다) 중 미국 대륙에서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 1754년~1763년)’이 벌어졌다. 


이는 미국 오하이오 강 주변의 인디언 영토를 둘러싸고 벌어진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 전쟁이다. 당시 식민지 사람들은 영국을 도와 전쟁 승리에 기여함으로써 영토를 확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영국은 식민지 내 지배권을 보다 더 안정적이고 체계적으로 강화하였다.


영국군의 퀘벡 공격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이 전쟁의 후유증은 엄청났다. 


영국의 부채는 전쟁 전에 비해 약 2배 가까이 늘어났다. 결국 부채를 줄이는 방안를 찾던 영국 왕실은 식민지에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려고 시도한다. 


당시 식민지 사람들은 스스로를 영국인이라 생각했다. 특히 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여 자신의 아들들이 피 흘리며 싸워 승리한 것에 대해 매우 기뻐하고 있었다. 


만약 이러한 상황에서, 식민지 사람들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세금을 부과한다면, 당연히 강한 불만과 반발을 가져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왕실은 발등의 불을 끄는 게 더 급했다.


설탕 법(1764)과 인지세 법(1765년)의 시행


먼저 진행한 것은 1764년 설탕 법 시행이었다. 영국에서 수출한 설탕에 부가세를 붙여 판매하는 것인데, 식민지 사람은 가공한 설탕을 수입할 수밖에 없어 부담이 컸다.


이후 1765년 인지세 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종이에 인쇄하는 모든 것(문, 서류, 인쇄물, 소책자, 카드 등)에 영국의 수입인지를 부착하는 것이다. 사실상 모든 인쇄물에 세금이 부여된 것이다. 


영국 수입인지  <출처 : 위키피디아>


인지세법이 도입될 당시, 식민지 사람들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은 채 시행이 되어 그 유명한 ‘대표 없이 과세 없다’라는 표현이 나왔다. 자신들에게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것은 식민지 의회이지, 영국의 의회가 아니라는 의사표현이었다. 즉 영국 의회는 우리에게 세금을 부과할 권리가 없다는 뜻이다.


식민지 인들은 미국 동부지역(영국령)에 세금을 납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선출한 의원을 영국 런던에 보내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점, 자신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법이 집행되는 점 등이 권리를 침해받는 것이라고 여겼다.


결국 극심한 반발로 1766년 3월 인지세는 폐지되었다. 


하지만 재정난을 해결해야 하는 영국 정부는 그다음 해인 1767년 11월 '타운센트 법'을 제정하게 된다. 이 법은 하나의 법이 아닌 대략 5개의 법령을 묶어서 부른 이름이다. 당시 영국 재무장관 타운센트의 주도하에 만들어졌다. 


영국 타운센트 장관 <출처 : 위키피디아>


이 법은 식민지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품은 모두 영국에서만 구입해야 했고, 영국군이 주둔하는 비용을 식민지 인들이 부담해야 하는 내용, 식민지 제품에 관세를 부과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당연히 반발이 심했고, 그 반발의 강도는 인지세 법 보다 높았다. 이에 격분한 영국은 군대를 보스턴에 파견, 이 곳을 점거하는 강경한 조치를 취한다.


보스턴 학살 사건(1770년)과  '타운센트 법'의 철회


 1770년 3월 사건이 발생한다. 보스턴에서 영국 군인과 주민 간의 실랑이가 벌어져 영국 군인이 총을 발사, 5명의 시민이 죽는 사건이 생겼다. 


‘보스턴 학살 사건’이라 이름 붙은 이 사건은 ‘영국 정부가 군대를 상주시키고, 자신들의 의사와 무관한 법률을 군대의 힘으로 강제 시행하고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영국 군인들이 보스턴에서 철수하게 된다.


보스턴 학살 사건  <출처 : 위키피디아>


이런 감정의 골과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영국 상품 불매운동까지 더해지면서 식민지 사람들의 불만은 극에 다다르게 되어 영국의 수출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결국 1770년에 타운젠드 법은 철회가 된다.


이후 2년간은 별다른 문제점이 발생하지 않아 겉으로는 평온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새로운 사건이 터졌다. 


1773년 영국 의회는 동인도 회사를 통해 미국에 차를 독점하여 팔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추가적인 세금을 징수하는 법령을 발표한 것이다(차 법, 1773년). 


이에 반발한 식민지 사람들은 인디언 복장을 하고 배에 올라 화물선에 쌓인 차 상자를 바다에 던져버렸다. 이것이 1773년 발생한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이다. 


보스턴 차 사건  <출처 : 위키피디아>


이것은 식민지 사람들이 저항한 사건 중에서 가장 강력한 방법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 왕과 의회는 크게 분노하게 되고, 1774년 더욱더 강력한 법령을 시행했다. 


이것은 나중에 ‘참을 수 없는 법(Intolerable Acts 또는 Coercive Acts, 영국 의회가 제정한 4가지 법령인 보스턴 항구법, 매사추세츠 통치 법, 재판권 법, 병영법을 총칭한 것을 말함)’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이는 영국 정부가 식민지를 다시 엄격하게 통제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다. 아울러 손상된 차를 배상할 때까지 보스턴 시의 해상무역을 봉쇄하는 '보스턴 항구법(Boston Port Bill)'을 시행, 최대의 항구였던 보스턴 항구를 폐쇄하고 영국 군대를 파견하였다.


제1차 대륙회의(1774년)와 렉싱턴 콩코드 전투


1774년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 카펜터즈 홀에 13개 중 12개 주(조지아 주는 불참)의 식민지 대표 56인이 모여 '대륙회의'를 개최한다. 이것이 1차 대륙회의다. 


이 회의에서 생존과 자유, 사유재산에 관한 권리를 지키고 불공정하고 비합법적인 법에 대해 불합리함을 선포했다. 식민지의 독립을 주장한 것이 아닌, 청원의 형태를 통해 식민지의 자치권을 얻기 위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영국의 조지 3세는 이 행동을 반란으로 규정하고 1775년 법령을 통해 영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와 식민지 13개 주에 대한 무역을 금지시켜 버렸다.


렉싱턴 콩코드 전투  <출처 : 위키피디아>


식민지 인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마침내 1775년 4월 매사추세츠의 렉싱턴 콩코드 전투(Battles of Lexington and Concord,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 간의 최초 교전으로 격렬한 전투 끝에 식민지 민병대가 영국군을 격퇴시킴)가 벌어지면서 독립전쟁의 서막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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