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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Feb 23. 2021

스스로 만든 사람 - 카네기의 탄생

앤드루 카네기  1

앤드루 카네기의 생애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는 1835년 11월에 영국 스코틀랜드의 파이프 던펌린(Dunfermline)에서 태어났다.


미국 출신이 아닌 스코틀랜드계 이민자였다. 자수성가로 성공한 전형적인 아메리칸드림의 대표자였다.


19세기 미국 산업계와 금융계를 주름잡은 록펠러, 밴더빌트, J.P. 모건 등과 더불어 시대를 상징되는 인물이었다.


카네기 기념우표 <출처 : 위키피디아>


그의 생애 중 마지막 18년간 기부한 금액은 약 3억 5천만 달러였다. 2019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53억 달러이다.


엄청난 돈은 각 자선단체와 대학, 연구소, 공공기관, 도서관 건립에 기부되었다.


1889년 발표한 ‘부의 복음(The Gospel of Wealth)’은 사회를 통해 얻은 부는 사회 발전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자선활동의 당위성을 주장한 것이았다.


뉴욕 카네기 홀 <출처 : 위키피디아>



그가 매각한 카네기 철강은 J.P. 모건에 의해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 본사를 둔 ‘US스틸(US Steel Corporation)’다시 태어나 상장되었다. 당시 규모로 자본금이 10억 달러가 넘는 최초의 회사였다.


카네기의 탄생과 어린 시절


이러한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카네기는 가난한 섬유 수제 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카네기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집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는 산업혁명의 확장 시대였다. 수공업이 밀려나면서 기계 중심의 공장이 운영되는 시기였다.


수공업자였던 아버지 윌리엄 카네기(William Carnegie)는 실직을 당했고, 어머니의 작은 구멍가게 수입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카네기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도와 수제 업무를 배우면서 사회생활에 대한 근성을 길렀다.


더불어 역사적 영웅의 글을 접하면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스코틀랜드 독립을 위해 싸운 윌리엄 월리스(William Wallace, 1270~1305 ), 로버트 브루스(Robert the Bruce, 1274~1329) 등에 대한 내용이었다.



윌리엄 월리스 <출처 : 위키피디아>


미국으로의 이민


점점 곤궁해지는 집안 경제를 보면서, 카네기 아버지는 돈을 벌고자 미국으로 이민을 결심했다. 


온 가족을 데리고 친척이 살고 있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앨러게니(Allegheny, 현 피츠버그)로 이민을 왔다.


1848년 9월, 미국에 도착한 가족은 바로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고, 12살의 어린 카네기는 피츠버그 면화 공장에서 일을 했다.


당시 주당 1.2달러(지금 기준 약 35달러)를 받고 하루 12시간씩 주 6일간 일했다.


보빈 보이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카네기와 유사한 일을 하는 소년을 ‘보빈 보이(Bobbin boy)’라 불렀는데, 면직 공장의 기계에서 베틀에 있는 보빈(실을 감은 스핀들)을 교체하거나 수집하는 일이었다. 사소한 기계 수리도 도맡아 했다.


일은 오전 5시 30분부터 오후 7시 30까지 다.


기계에서 보빈을 교체할 때 작동이 멈추면 안 되었기에 아무런 안전장치가 없이 진행된, 극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빠르게 움직이는 기계에 말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소년 시절과 어려움과 학습 노력


카네기는 험난한 일을 감수하면서 틈틈이 기계에 대해 배워 나갔다. 


영리했던 그는 이내 실력을 인정받아 증기 엔진을 관리하는 보일러공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 년 뒤인 1849년 주당 2.5달러를 받고 오하이오 전신 회사의 피츠버그 사무실에서 소년 전신 배달부가 되었다.


남동생과 함께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열심히 일했고, 어린 나이임에도 회사 내 주요 직책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 얼굴 등을 파악해 대인 관계를 넓혀 나갔다.


이후 전신기사로 자리를 옮겼다.


유난히 총명했고 업무 처리가 남달라(그는 전신 신호를 종이에 적지 않은 채, 바로 귀로 듣고 번역해서 보고했다) 1년 만에 관리자로 승진했다.


당시 소년인 그에게 가장 깊은 인상심어 이는 제임스 앤더슨(Col. James Anderson)이었다.


은퇴한 상인이었던 앤더슨은 자신이 소장한 400여 권의 책을 개인 도서관 형태로 만들어 매주 토요일 늦게까지 일하는 소년들에게 개방하였다.


카네기는 이 곳에서 지적 호기심을 해결하면서 문학, 사회, 경제에 관한 많은 내용을 접할 수 있었다.



벤자민 프랭클린 <출처 : 위키피디아>


'스스로 만든 사람'과 카네기의 노력


특히 ‘스스로 만든 사람(Self made man)’이란 주제는 당시 그의 좌우명이기도 했다.


이 말은 미국 상원 의원인 헨리 클레이(Henry Clay)가 1832년 2월에 만들었다.


이 뜻은 ‘성공이란 외부 조건을 이용한 것이 아닌,  자신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라는 의미였다.


대표적인 예로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벤자민 프랭클린’을 손꼽았다.  스스로 만든 사람들 중 가장 위대한 모범자로 표현했다.


이는 부모나 친척에게 유산이나 재산을 상속받거나 특권을 가지고 성공하는 것이 아닌, 오직 스스로의 노력과 열정, 인내와 근면으로 우뚝 서는 것이 진정한 명성을 얻게 된다는 뜻이었다.


프레드릭 더글라스 <출처 : 위키피디아>


이것을 체계화 한 사람은 노예 출신이자 미국의 사회개혁가인 프레드릭 더글라스(Frederick Douglass, 1818~1895)였다.


그는 1859년부터 수십 회의 강의와 연설을 통해 ‘스스로 만든 사람’의 개념을 정립했고 발전시켰다.


카네기는 이 좌우명을 평생 실천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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