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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Feb 27. 2021

카네기의 성공과 홈스테드 파업

앤드루 카네기 3

뛰어난 비즈니스 감각


카네기는 비즈니스 감각이 남달랐다. 


첫 번째 철강회사 이름을 톰슨(Thomson)의 이름을 빌려와서 지을 정도로 고객과의 관계도 중요시했다.


1872년부터 공사를 시작, 74년에 완공되어 철도 레일을 생산한 회사가 에드가 톰슨 제철소(Edgar Thomson Steel Works)였다.


에드가 톰슨 제철소 <출처 : 위키피디아>


이 공장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높은 기술력을 도입했고, 저렴한 임금을 바탕으로 효율적인 생산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이를 통해 낮은 가로 철강을 생산, 공급할 수 있었고 이익률이 상상을 초월했다.


초창기 투자수익률은 40%에 달했다.


여기서 벌어들인 막대한 익으로 타 철강소를 인수 합병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1883년에 인수한 ‘홈스테트 제철소(Homestead Steel Works)’였다.


홈스테트 제철소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홈스테드 제철소의 인수


홈스테드 제철소는 1881년에 완공된 것으로, 단 2년 만에 카네기에게 인수된 것이다.


과거 카네기가 철강 사업의 기술적 변화가 생길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닫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었. 


1872년 영국을 방문했을 때 처음 접한 베세머 공정(Bessemer process)이었다.


베세머 공정은 선철을 녹여 강철을 대량 생산하는 기법이었다. 발명가 헨리 베세머가 세계 최초로 1855년에 특허를 취득하여 개발된 방식이었다.



헨리 베세머 <출처 : 위키피디아>


베세머 공정을 통한 기술 혁신


이 방법으로 대규모 강철 생산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춤으로써 보다 높은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철도 레일을 공급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카네기가 가진 생각이었다.


강철 주조 방식은 유럽에서 몇 백 년 전부터 개발되어 었으나 소규모 수공업 형태의 소량생산에 의존해 가격이 매우 비쌌다.


하지만 베세머 공정을 통해 산화 환원 반응을 일으켜 철에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방식을 이용, 높은 품질의 철강을 량으로 얻을 수 있었다.


베세머 전로에서 1톤의 철강을 얻기 위한 제조비용이 7파운드였고, 판매 가격은 40파운드였다.


말 그대로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베세머 변환기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홈스테트 제철소는 이 베세머 공법으로 대규모로 철강을 생산했고, 규모는 더욱더 커졌다.


미국 최고의 철강 회사 : 카네기 철강소


당시 카네기 회사에서 생산한 철강은 미국 내 주요 철강 업체 중 최우선 순위였고, 미국 경제가 성장하는데 밑바탕이 되었다.


1889년에 미국이 영국의 철강 생산량을 추월했다. 카네기 소유의 철강소에서 생산된 양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후 다양하고 복잡해진 공정과 원재료 수급 방안에 대해 단일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받아들였다. 


1892년 7월 1일에 카네기 철강소(Carnegie Steel Company)가 설립됐다.

 


카네기 빌딩(1905년) <출처 : 위키피디아>


당연히 베세머 공정을 도입하여 운영하였고, 생산 비용은 더욱더 하락했다.


판매 가격도 덩달아 추었다.


에드가 톰슨 제철소 시절인 1873년에 톤당 100달러에서 75년에는 톤당 50달러로 강철 가격이 하락했다.


이후 1890년 초에는 톤당 가격이 겨우 18달러에 불과할 정도였다. 낮아진 가격으로 대규모 철도 공사 및 건설 현장에서 사용되는 강철의 양은 더욱더 늘어났다.


원가 절감 노력과 부작용


카네기는 기술 개발(베세머 공정의 도입) 뿐만 아니라 원재료 공급의 과정도 축소했다.

 


카네기 초상(1905년) <출처 : 위키피디아>


원자재 공급의 수직적 결합이라 불리는 이 정책은 석탄 및 철광석 매입을 단일화했다. 운송 수단인 철도를 연결, 큰 폭의 할인을 받아 최소 물류비로 비용을 절감했다.


이를 통해 공급 가격을 낮출수 있었다.


공장의 규모가 커지고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대규모 인력 채용이 있었다.


하지만 숙련공이 아닌, 비숙련공들이 대거 채용되어 정해진 기준에 맞춰 기계처럼 일을 했다.


회사 규모가 커지고 원재료 매입 가격이 낮아지면서 기계적 공정이 도입됐다. 인건비가 감소되는 현상이 발생된 것이다.


결국 노동자 급여가 낮아지는 현상이 발생하면서 대형 사건이 발생했다.



홈스테드 파업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1892년 '홈스테드 파업'


일명 1892년 '홈스테드 파업(Homestead Steel Strike)'이었다.


당시 카네기 철강소의 대표는 ‘헨리 클레이 프릭(Henry Clay Frick, 1849~1919)’이었는데, 과거 카네기 철강소에 석탄 공급을 한 회사(HC Frick & Company)의 대표였다.


그는 경영에 소질이 높았으나, 노동자 파업에는 무자비한 사람이었다. 


이 곳에서 사건이 발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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