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정엽 Mar 03. 2021

카네기의 오점 - 홈스테드 파업 2

앤드루 카네기 5

언제나 노동자의 편이라고 말했던 카네기 역시 이들(철강노동자협회, AA)은 소수 엘리트주의자 이자 차별적인 조직이라고 생각했다.


노조와 회사의 갈등 폭발


이러한 갈등 관계는 쉽게 봉합되지 못했고 결국 6월 30일까지 연장되어야 할 단체 교섭 합의가 깨졌다.


이때 프릭은 노동자들을 공장에 가두어 버리기까지 했다. 심지어 공장 외곽으로 사방을 빙 둘러 장벽을 만들어 이동을 어렵게 했다. 감시초소를 세워 총으로 무장한 경비원을 세워두기도 했다.


결국 참다못한 노동자들은 공장을 폐쇄하기로 결정하고 파업에 돌입했다. 이들은 7월 1일부터 교대로 공장을 순찰하며 지역 방어에 들어갔다.


핑커튼 탐정 침입자들을 경계하는 노동자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프릭은 이때다 싶어 공장에서 일할 노동자를 새로 모집했다. 이들은 노조에 가입되지 않은 상태였다. 심지어 현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도 채용했다.  


7월 4일 프릭은 지역 보안관을 이용, 대리인을 보내 노조에게 공장 시설에 손대지 말 것과 새로이 노동자들이 투입되어 공장을 운영할 것이라고 전달했다.


하지만 노조 측은 이들을 다시 돌려보냈고 공장을 돌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1892년 7월 5일에 일어난 일


운명의 사건은 7월 5일에 발생했다.


밤 10시 30분경, 회사 측에서 고용한 핑커튼 탐정 소속 무장 요원 300명이 모였다. 이들은 라이플, 권총 등 무기를 소지했고 바지선에 나누어 탄 채 공장 진입을 시도했다.



핑커튼 탐정 소속 무장 요원의 공장 진입 <출처 : 위키피디아>



결국 새벽 4시부터 벌어진 둘 사이의 무력 충돌은 노조 측의 승리로 마무리되었으나 총격전이 오갈 만큼 위협적인 싸움이었다.


이 과정에서 십여 명이 죽고 수십 명이 다쳤으며 체포된 사람의 수가 300명을 넘을 정도였다.


여론은 사건을 대대적으로 기사화했고 회사 측의 무리한 노조 진압에 질책을 쏟아냈다.


민병대 투입과 공장 포위


결국 주지사는 이를 해결하고자 주 민병대를 소집, 최신 라이플 총과 기관총으로 무장시켜 7월 12일 공장에 투입, 이 곳을 포위했다.


민병대의 엄호 속에 회사 측은 새로이 노동자를 고용했고 7월 13일에 인력을 투입, 15일부터 생산을 재개했다.


펜실베이니아주 민병대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새로이 일을 하는 노동자나 그들을 지켜보는 기존 노동자나 모두 언젠가 터질지 모르는 불안감을 안고 있었다.


결국 7월 18일에 공장 내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노조 측의 노동자들은 더욱더 움츠려 들었고 이들 가족들은 생계를 걱정하며 좌절했다.


알렉산더 베커만의 암살 시도


이때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무정부주의자이자 작가인 알렉산더 베커만(Alexander Berkman, 1870~1936)이라는 사람이 프릭을 암살하려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의 친구들과 함께 프릭의 사무실을 습격, 권총을 발사했다. 하지만 허술한 사격 솜씨로 가벼운 부상만을 입혔고, 오히려 부상당한 프릭에게 제압당했다.



알렉산더 베커만 <출처 : 위키피디아>


참고로 베커만은 이 사건으로 14년을 복역했고 출소 후 첫 번째 책인 ‘아나키스트의 교도소 회고록’이란 책을 출간했다.


베커만의 암살은 실패했고 여론은 순식간에 회사 대표인 프릭에 대한 동정론으로 돌아섰다.


아울러 노조의 과격한 행동과 거친 모습들이 하나둘 언론에 공개되면서 노조에 대한 입장은 더욱더 악화됐다.


베커만의 프릭 암살 시도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뒤바뀐 여론 동향과 파업 철수


8월 초 회사는 공장이 정상적으로 생산을 재개했다고 발표했고, 미국 내 가장 큰 노동조합인 미국 노동연맹(AFL, American Federation of Labor)은 이 사건에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노조의 동력은 순식간에 와해됐다.


결국 10월 13일에 민병대가 철수하면서 노조의 파업은 사실상 끝이 났다. 3,800명의 공장 근로자 중 192명만이 참석, 투표를 통해 11월 20일 기준으로 회사에 복귀하는 것으로 결정 난 것이다.


홈스테드 노조가 패배한 가장 큰 이유는 파업이 타 철강소로 연계되어 시행하지 않고, 이 곳 홈스테드에만 국한되었기 때문이었다.


카네기가 소유한 다른 공장에서는 계속해서 철강 제품이 쏟아지고 있었다. 홈스테드 파업 노동자들의 심리적 추진 동력이 무너졌던 것이다.


아울러 타 지역 철강소의 일부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지만 곧바로 제압당했다.


미국 노동연맹(AFL) 로고 <출처 : 위키피디아>


철강노동자협회(AA)의 실패와 회사의 승리


결국 이 사건으로 '철강노동자협회(이하 AA)' 소속의 노조는 무너졌고 회사 측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회사 측과 노조 측의 고소고발이 이어졌으나 협의가 이루어지면서 서로 간의 기소는 중지되었다.


이후 AA는 각 회사마다 노조 대표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내용과 함께 계약 거부 운동이 일어나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1899년에 노동자들이 일부 파업을 주도하려 했으나 프릭은 공장 가동을 중단하면서까지 노조 결성을 무력화시켰다.


이후 카네기가 소유한 철강소 내 노동조합 결성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동안 노동자들은 회사 측이 제시한 임금 삭감과 근로시간 연장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홈스테드 제철소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카네기의 불명예와 숨겨진 진실


이 사건은 카네기에게 크나큰 불명예를 안겨주었다.


그는 언제나 노동자의 편이라는 이미지와 긍정적인 모습으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건으로 사람들은 그의 본래 모습이 어떠한지에 대해 설왕설래가 많았다.


당시 카네기는 영국에서 거주하고 있었는데, 프릭을 통해 노조 탄압을 지시했는지,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가 진실의 본질이었다.


프릭의 편지 - 핑커튼 요원의 진입 내용이 담겨 있다. <출처 : 위키피디아>


카네기는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진행됐다고 주장했으나, 역사가들은 과연 프릭이 카네기의 동의 없이 독자적으로 노조탄압을 시행했는지 의문이 든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 가장 큰 실수이자 오명을 얻은 사건이었다.

이전 04화 카네기의 오점 - 홈스테드 파업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