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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Sep 01. 2021

식민지 시대의 노예 정착

미국의 노예제도 02

미국 식민지 시대에 버지니아 지역은 담배 재배로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주요한 성공 요인은 영국의 이주 기관인 버지니아 회사의 토지 정책 변화에 있었다.


17세기 영국 신문에 게재된 미국 버지니아 담배 광고  <출처 : 위키피디아>


담배사업의 성공과 인두권 정책


단순한 인력 운송에서 벗어나 식민지 내 안정적 착과 수익성 좋은 담배 재배의 면적을 키우고자 인두권 정책(Headright System)을 도입한 것이다.


유럽에서 미국으로의 이주를 하게 되면 약 20만 제곱미터의 땅을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고 이주 가족의 구성원에 따라 추가로 지급을 해 주었다.


당시 부의 기준은 가지고 있는 현금이 아닌, 소유하고 있는 토지의 규모와 크기였다.


유럽에서의 부족한 농지에 비해, 이주한 사람들이 새로운 식민지에서 받게 될 토지의 크기는 어마어마한 넓이였다.



버니지나 식민지 지역  <출처 : 위키피디아>


유럽과 비교해 보았을 때 상상도 못 할 만큼의 넓이를 사진 땅이었다.


추가로 버지니아 회사의 이익 창출을 위해 의무적으로 평생 소작농으로 살아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난 것이 더 큰 효과를 발휘했다.

 

토지에 대한 강한 동기와 계약제 노동


조금만 고생하면 자신만의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된다는 동기는 그 무엇보다도 강렬했다.


정해진 노동 계약 기간 내에 노동을 제공하여 이주비용을 모두 지급하게 되면 토지는 이주자의 소유가 되었다.


담배 재배의 특성상 노동력을 많이 필요로 했기 때문에 기존 이주민들은 신규 이주민이 들어올 때마다 그들의 이주의 비용을 대신 지급하고 계약제 하인으로 고용하기 시작했다.


선창에 갇히기 전에 족쇄를 채우고 있는 모습과 노예선에 탄 노예들 <출처 : 위키피디아>



계약제 하인이 된 이주민들은 정해진 계약 기간 내에 노동력을 제공했다. 


기간이 끝나면 자유민으로 전환되어 자신의 능력으로 토지의 소유권을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은 흑인들도 해당되었다. 이들은 정해진 계약 관계로 고용된 노예(indentured slave)였고, 계약 종료 후 자유를 얻은 이들을 '자유 흑인'이라고 불렀다.


약제 노예와 대농장주의 출현


이 중에는 유럽에서 막 건너온 가난한 백인들로 있었다.


보통 노동 기간은 4년 ~ 7년 사이였다. 흑인들은 계약제 하인에서 벗어나면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하나의 노동 계약인 셈이었다.


하지만 수출의 규모가 커지고 작물의 종류가 늘어나면서 점점 더 많은 토지와 계약제 이주민을 거느리는 대농장주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당시 인력의 공급은 경제적 이익을 원하는 욕심만큼 비례하지 못했다.



1619년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에 상륙한 아프리카인들 <출처 : 위키피디아>


결국 네덜란드 상선을 통해 아프리카에서 팔려온 흑인 노예들이 공급되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 노예


하지만 완전한 노예제의 형태는 아니었다.


아직은 열악한 환경에 의해 이들의 수명이 길지 못했고, 초창기 계약제 이주민에 비해 한 번에 목돈이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농장주들은 계약 기간만큼 일하기를 원했다.


실제로 초창기 흑인들은 계약제 기간(약 4~7년)이 끝나면 상당한 재산을 모은 이도 생겨났다.


이후 1667년에 들어서면서 공식적인 노예제가 법률로 시행되었고, 식민지의 경작지 규모가 점차 늘어나면서 계약제 하인(흑인) 보다는 영구적 성격을 가진 ‘영구 노예(bondservant 또는 bondsman)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17세기 버지니아 담배 농장의 노예 <출처 : 위키피디아>



영구 노예제도의 확산


이에 더해 영국에서 노예가 잘못을 저지르거나 주인에게 반항하는 위반 사항에 대해 처벌이 강화되는 법률이 잇달아 통과되었다. 


이 덕분에 노예 거래는 하나의 합법적인 사업으로 성장하게 됐다.


사실상 영구 노예의 법은 가혹했다. 한번 노예는 그들의 자식들도 영원히 주인에 속한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한마디로 돈만 있으면 사고파는 상품이 된 것이다.


여기에는 1672년에 영국 왕 찰스 2세에 의해 재창립되어 아프리카 노예 및 상품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가진 '왕립 아프리카 회사(Royal African Company)‘가 앞장서서 나섰다.


노예의 수가 식민지 경제 규모에 비례하여 늘어났다.


당시 노동력의 부족을 해결하고자 진행된 노예제도는 더 많은 이익을 갖기 위한 것이었다.



왕립 아프리카 회사 로고



늘어나는 탐욕과 경제적 이익 추구


노예를 소유한 농장주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비용 대 효과 측면에서 생겨난 경제적 이익을 쉽게 포기하지 못했다.


축적되는 경제 규모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신분 계급의 이기심까지 겹치며 노예제는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더욱더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된 대농장주가 출현하면서 흑인 노예를 이용, 점점 더 낮은 비용으로 생산력을 높일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로 부의 재편이 이루어지면서 소수의 대규모 농장주가 생기고 그 아래에 중간급 농장주, 그리고 토지를 소유한 농민과 노예의 구분이 생겨났다.


대농장 중심으로 구성된 대표적인 남부의 모습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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