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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ug 30. 2021

미국 노예제도의 시작과 과정, 그리고 아프리카계 미국인

미국의 노예제도 01

개인의 사유 재산이나 가축처럼 취급되는 인간을 노예(slave)라고 불렀다.


똑같은 인간임에도 자유와 권리를 상실한 채, 타인에게 종속된 관계를 의미했다. 사람이 사람을 소유하는 이 노예제도는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 중 가장 잔인한 제도였다.



노예를 묶을때 사용되는 수갑  <출처 : 위키피디아>


미국 노예제도의 시작


미국의 노예제도(Slavery in the United States)는 독립전쟁 이전인 식민지 시절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천부인권 사상의 도입과 확산에 따라 유럽에서의 노예제도는 점차 폐지되어 사라졌으나 미국은 반대였다.  


독립전쟁 이후 공업이 발달한 북부는 1780년~ 1804년 사이에 노예 해방 법령을 대부분 통과시켰고, 순차적으로 이를 적용해 나갔지만 남부는 그렇지 않았다.


1790년대부터 오히려 더 강화해 왔고 노예 수가 늘어나는 현상을 불러왔다.



1860년 미국 조지아주 노예 경매 포스터  <출처 : 위키피디아>


농업 중심의 남부지역에서 노예제도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경제 구조였다.


남부 버지니아 출신의 제퍼슨 대통령도 노예를 두고 있었다. 그는 노예제도가 옳지 않다는 사실은 마음에 담고 있었지만 이를 폐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그의 사후에 자신의 노예에게는 ‘자유’라는 선물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남부의 대농장주들에게 경제적 이익과 부합되는 노예제는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이고 확고한 신념이었다.


남부에서의 노예제도 인식


이들이 노예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헌법이 보장하는 개인의 사유재산이라 여겼다. 노예제 폐지는 자신의 이익을 뺏어간다는 생각이 너무도 강했다.



1853년 노예의 등에 낙인을 새기는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이들은 노예제가 영원히 이어지기를 원했다.


이러한 생각과 신념의 차이는 극심한 갈등을 불러오게 되었다. 사실상 주요 원인은 북부와 남부가 가지고 있는 경제적 여건이 확연히 달랐고,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공업 중심의 북부는 공장에서 노동력을 제공해 줄 노동자가 필요했고 대농장 중심의 남부는 품삯 없이 일해 줄 노예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북부와 남부의 노예제도 갈등


결국 노예제도를 사이에 두고 북부와 남부는 서로 간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치열한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자유를 위한 탈출 (이스트만 존슨, 1862년 작) <출처 : 위키피디아>


법적으로 노예를 합법화하는 것은 물론, 도망친 노예에 대한 법적 권리까지 보장하는 도망노예법의 제정과 이를 강화하는 남부의 행동은 같은 개신교 안에서 생활하는 북부 사람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이를 무력화시키고자 했다.


둘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한 갈등은 결국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이라는 내전을 불러왔고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령으로 그 절정을 맞게 된다.


결국 북부의 승리로 노예해방이라는 선물이 주어졌지만, 노예의 대다수 구성원이었던 흑인에 대한 권리가 한 번에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1981년 노예주와 자유주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인종 차별과 폭력적 린치


눈에 보이는 인종 차별은 물론 대놓고 시행되었던 남부의 합법적 폭력인 ‘린치(lynch)’까지, 아직 이들에게 주어진 고난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왜 그렇게 노예제도를 이용해 오랜 기간 동안 인에 대한 차별을 가했던 것일까? 그것도 장기간에 걸친 폭력과 차별은 왜 쉽게 없어지지 않았을까?


가장 큰 요인은 미국 내 자리 잡고 있던 인종차별이 핵심적인 이유로 여겨진다.


백인의 우월성과 흑인의 열등성이 사람들 의식의 밑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전적 차이를 넘어서 미국의 산업은 값싼 수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이를 대체한 것은 사실상 자유를 얻은 흑인들이었다.



1911년 미시시피 주립교도소의 죄수임대 시스템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이들로 인해 미국의 산업은 성장할 수 있었고 그들의 보이지 않는 헌신 속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모두 극복할 수 있었다.


남부 중심의 차별과 '흑인 대이동'


남부에서의 흑인에 대한 대표적인 차별은 ‘린치’와 ‘블랙 코드(Black Code)’, ‘죄수 임대 시스템’ 등이었다.


이는 합법적으로 이들의 노동력을 노예와 같이 저렴한 가격에 사용하여 이윤을 챙기는 방식이었다.


결국 이러한 과정 속에 견디다 못한 이들은 ‘흑인대이동(Great Migration)’이라는 새로운 사건을 통해 북부와 서부로 대규모 이동하게 되면서 산업인력의 구조가 재편되는 현상이 생겨났다.



1920년 흑인대이동 당시 모습  <출처 :위키피디아>



노예제도를 통해 미국으로 들어온 흑인들은 오랜 시간 차별적인 행동을 극복하고 지금의 위치를 만들어 냈다.


지금의 위치와 미국에 대한 헌신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스포츠 스타는 물론 오바마(Barack Hussein Obama II) 대통령까지, 이들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위해 쌓은 헌신은 사실 놀라울 정도이다.


이제 이들이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오게 된 과정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미국의 노예제도에 대한 역사적인 흐름을 알아보자.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  <출처 : 위키피디아>



<중요한 용어의 정리>

1966년에 열린 미국 교사연맹(AFT, American Federation of Teachers)의 ‘교육에서의 인종차별에 대한 논의(the Racism in Education Conference)’에서 흑인에 대한 명칭을 ‘니그로(Negro)’라는 표현으로 쓰지 않고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 American, Afro American)’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사실상 미국의 노예 대다수를 차지했던 사람은 ’ 아프리카계 미국인(흑인)‘이었다.


여기서는 글의 흐름을 빨리 하기 위해 ’ 흑인‘이란 내용으로 기재하지만, 원래는 ’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란 말이 올바른 표현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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