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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Sep 07. 2021

미주리 타협과 1850년 도망노예법

미국의 노예 제도 05

미국의 경제 구조는 남북으로 나뉘어 있으며 지역적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북부와 남부의 경제 구조


남부의 농업과 북부의 공업 중심의 경제 구조는 각각 농부와 상공인을 육성시켰다. 이들은 서로의 주장을 정치인들에게 강하게 요구했다.

 


미국 남부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정치적인 성향과 정책적인 제도를 자신의 지역에 맞게 유지,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다.


이렇게 벌어지기 시작한 지역적 차이와 정치적 갈등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심해져갔다. 결국 남과 북이 부딪치면서 대표적 갈등의 쟁점으로 떠오른 것이 ‘노예제도’였다.


남부는 경제를 지탱하는 노예제도를 유지하는 것에 사활을 걸었고, 이것은 기독교적 윤리에 어긋나 폐지해야 한다는 북부의 주장과 팽팽히 맞선 것이다.


노예제도의 균형점과 미주리 타협


이럼에도 큰 분열이 나지 않았던 이유는, 노예제도에 대한 찬반을 주장하는 미국의 주 정부 수가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예제를 찬성하는 주는 11개 주, 반대하는 주도 11개였다.


하지만 이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일명 ‘미주리 타협(Missouri Compromise)’이라 불린 사건이었다.

 


미주리 타협으로 나뉘어진 선 <출처 : 위키피디아>



이것은 1819년 미주리 준주가 새로이 연방에 가입하기 위해 연방정부에 가입 신청한 것이다. 당시 미주리 준주는 노예제를 찬성하는 주라서, 북부의 반대가 심했고 의회 내 감정적 대립도 매우 격화됐다.


하지만 곧이어 북부의 매사추세츠 주에서 일부 지역이 메인 주로 분리, 등록이 되면서 미주리 준주와 마찬가지로 연방 가입 신청을 요청했다.


이 주는 북부에 위치했고 노예제를 반대하는 주였다.


이 두 개의 주, 미주리 준주와 메인 주를 모두 받아주면 찬성 12개 주와 반대 12개 주가 서로 균형을 유지하는 구조였다.



헨리 클레이가 미국 상원 의회에서 연설 <출처 : 위키피디아>



그래서 정치적 타협이 새로 나온 것이 그 유명한 1820년의 ‘미주리 타협’이었다. 이는 36도 30분을 경계로 남쪽은 노예제를 인정하되, 북쪽은 노예제를 인정하지 않기로 한 협정이다.


임시적 방편과 커지는 갈등


사실 이 협정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임시적 타협이었다. 불안한 긴장 속에 남부의 노예제는 더욱더 강화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남부에서 폭력을 견디다 못한 흑인들의 폭동 사건(일명 내트 터너 반란 사건)이 발생했다.



내트 터너 반란 사건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사건으로 50명의 백인은 흑인에게, 200명이 넘는 흑인들이 백인 민병대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짐승과도 같은 ‘노예의 반란’충격을 접한 남부의 백인들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흑인을 살해하는 현상이 뒤따랐다.


큰 정치전 이슈로 떠오를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경제를 키워야 한다는 논리 속에 사건은 언론의 주목에서 사라졌고 흐지부지 묻혔다.


연방정부는 지역적 문제보다 영토 확장에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멕시코 전쟁과 캘리포니아의 골드 러시


당시 '멕시코 전쟁(Mexican-American War)'의 승리로 얻은 서부 지역과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 이후 크게 확장된 영토에 대한 개척 문제였다.



멕시코 전쟁 당시 미군의 공격  <출처 : 위키피디아>



넓은 땅을 유지하고자 새로운 이주민들을 받았고 인구수가 증가하면서 새로이 연방에 가입하려는 주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서부 지역에 거주한 이들은 북부에서 이동한 사람들이 많았고, 이는 노예제를 거부하는 주가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이를 알게 된 남부인들의 위기감은 날로 커졌다.


1849년 새로이 가입한 캘리포니아 주는 36도 이남에 위치하고 있었다. 미주리 타협에 의하면 이 주는 노예제를 유지해야 했다.



캘리포니아 주 위치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이 지역 주민들의 투표로 노예제를 반대하기로 결정이 나자, 바로 남부의 반발이 나타났다.


얼마나 불만의 강도가 심했는지, 남부가 연방에서 떨어져 나가겠다는 탈퇴설이 나왔고 대통령이 이를 말리는 사태까지 발생할 정도였다.


미주리 타협의 불안감과 갈등 고조


결국 보다 못한 헨리 클레이 의원이 새로운 타협안을 제시했다.



헨리 클레이 의원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그것은 새로 가입한 주는 주민들의 의사에 맡기자는 것이었다. 대신 이 제안을 반대하는 남부를 달래기 위해 농장주의 이익을 보존하자는 차원에서 더욱더 강력한 노예제도 법안을 만들기로 했다.


남부와 북부에서 바로 불평불만이 쏟아졌고 양쪽 모두 반대가 심했다.


하지만 별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결국은 수용을 하고 말았는데 여기서 정리된 것 ‘1850년의 대타협’이라고 불린 내용이다.


1850년의 도망노예법 제정


이때 나온 법령이 ‘1850년의 도망노예법(Fugitive slave laws)’이었다.



1850년의 도망노예법 관련 기사  <출처 : 위키피디아>



이것은 1793년에 제정된 ‘도망노예법’을 한층 더 강화한 것이다.


이는 도망 노예를 도와주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이를 방조하거나 도와주는 일반인들까지 법적 처벌이 가능할 정도로 엄격해졌다.


아울러 북부로 도망간 도망 노예는 언제든지 붙잡아서 다시 끌고 올 수 있도록 기준을 강화시켰고, 누구든 이를 방관하거나 방해하지 않아야 하며, 무조건 노예 사냥꾼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강제성이 포함되었다.



1850년 도피노예법에 따라 노예로 돌아온 최초의 남자 제임스 햄릿 <출처 : 위키피디아>



이 법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북부의 길거리 한복판에서 늙은 여성 노예가 매매 사냥꾼에 휘두른 채찍을 맞으며 살점이 떨어져 나가 피를 흘린 채 고통 속에 죽어가도, 아무도 도와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이를 방해한 사람이 보안관에 의해 감옥으로 끌려갈 정도였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 내용 중의 삽화 <출처 : 위키피디아>



이 법의 악랄함을 직접 목격하고 치를 떨면서 자신의 감정을 글로 표현한 책이 그 유명한 해리엇 비처 스토어(Harriet Beecher Stowe)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Uncle Tom's Cabin)’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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