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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Sep 11. 2021

갈등의 시작이 된 드레드 스콧 대 샌드퍼드 판결

미국의 노예제도 07

드레드 스콧 대 샌드퍼드 판결(Dred Scott v. Sandford)은 1857년에 발표된 노예제도에 대한 미국 연방 대법원의 판결을 말한다.



드레드 스콧의 초상화  <출처 : 위키피디아>



이 판결로 미국의 노예제도를 합법화한 것은 물론 미국에 들어온 흑인은 미국 헌법에 의해 보호받을 수 없으며, 미국 시민이 될 수 없다는 내용정해졌다.


노예제도의 합법화 판결


사실상 노예는 미국의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연방법원에 제소할 권리 자체가 생길 수 없다는 논리였다.


그 결과 미국 내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것은 불법이며 정당한 절차 없이 노예 주인에게 노예를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시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판결은 곧바로 대중들의 비난을 받았고 남북전쟁이 발발하게 된 단초가 되었다.



존 에머슨과 드레드 스콧이 같이 있었던 자유주 위치의 암스트롱 요새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소송의 주인공 드레드 스콧은 세인트루이스 출신의 미 육군 군의관 존 에머슨(John Emerson) 소유의 노예였다.


주인을 따라 여러 곳을 다니던 그는 에머슨이 사망하자, 에머슨의 부인이 스콧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스콧은 노예에서 벗어나길 원하고자 원만한 합의를 제안했으나, 에머슨의 부인은 합의금이 너무 적다고 거부했다.  


스콧의 부인인 해리엇 로빈슨


그러자 스콧은 1846년 자신과 부인, 두 딸의 자유를 위해 소송을 제기했다. 이러한 용기를 갖게 해 준 것은 그의 부인이었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부인 해리엇 로빈슨(Harriet Robinson Scott)은 노예 해방론자들의 도움을 얻어 자신은 자유인이 되었음을 주장했다(참고로 스콧과 해리엇은 둘 다 문맹이어서, 소송에 대한 작성은 변호사인 프랜시스 머독과 그들이 다녔던 아프리카 침례교회의 목사인 존 R. 앤더슨이 작성해 주었다)



해리엇 로빈슨 스콧  <출처 : 위키피디아>



드레드 스콧은 연방법에 근거하여 자유 주에서 근무한 경력을 통해 자신은 자동적으로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어 더 이상 합법적으로 노예가 아니라고 주장한 반면, 처음 소송에서 판결을 내린 미주리 법원은 스콧에게 여전히 법에 의거한 노예라고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장 로저 토니의 판결


이에 노예제를 반대하는 변호사들의 도움으로 결국 대법원까지 항소가 진행되어 당시 대법원장인 로저 토니(Roger Brooke Taney)에 의해 최종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당시 대법원장 로저 토니  <출처 : 위키피디아>



토니는 판결문에서 '흑인 노예는 헌법상 '시민'이란 단어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포함되도록 의도조차 되지 않았기에 이들을 보호하고 시민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헌법의 내용을 적용할 수 없다.'라고 결정했다.


아울러 미국의 독립 초기, 연방법이 수립될 당시인 1787년에 ‘백인과 흑인 사이에는 영구적이고 서로 왕래할 수 없는 장벽을 세우는 것이 기본적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라는 극단적 내용도 서슴지 않고 발표했다.


사실상 흑인 노예는 미국인이 아니고, 단순 노동을 제공하는 동물과도 같이 취급해 버린 것이다.



판결을 강하게 반대한 벤자민 로빈슨 커티스  <출처 : 위키피디아>


판결문에 대한 항의와 저항


당시 두 명의 대법관이 반대의 의견을 표시했는데, 벤자민 로빈슨 커티스(Benjamin Robbins Curtis)존 맥클린(John McLean)이었다.


커티스는 67페이지에 달하는 장대한 반대의 의견을 적어 ‘흑인이 연방정부의 시민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법적으로 근거가 없다는 의견을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는 일부의 의견으로만 받아들였다.


후에 토니와 함께 판결을 내린 법관들은 이 판결로 미국의 분열적 원인이 된 노예제도가 정리되기를 바랐으나, 오히려 북부를 중심으로 극심한 저항과 반대 운동이 전개되면서 전국적인 이슈로 커져 버렸다.



드레드 스콧 판결을 다룬 신문 기사  <출처 : 위키피디아>


이 판결로 노예제도에 대한 논쟁은 오히려 불타올랐고 결과적으로 남북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셈이 되었다.


북부의 승리와 수정헌법의 적용


이후 이 판결은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북부에 의해 범죄에 대한 처벌을 제외하고 노예 제도를 폐지한 미국 수정헌법 제13조(Thirteenth Amendment to the United States Constitution, 1865년) 제14조, 제15조에 의해 무효화되었다.


이 수정안으로 '미국에서 태어났거나 귀화한 모든 이들은 시민권을 보장받으며 이를 통해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다'라고 명기한 것이다.


이 판결은 당시 대법원이 가진 근시안적 시각과 노예제도에 대한 인종주의적 판결이 얼마나 사회적 혼란을 몰고 오는지 보여준 대표적 사례였다.



드레드스콧 사건의 동상 하단의 액자(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출처 : 위키피디아>



참고로 미국의 역대 대법원 판결 중 최악의 판결 1위를 차지하기도 했고, ‘보수적인 대법원의 최악의 결정’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판결을 내린 로저 토니는 노예를 거느린 대농장주의 아들로 성장한 배경이 있었고 철저한 노예제도를 주장한 인물이었다.


남북전쟁 시에도 대법원장에 재직하며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 정책을 사사건건 훼방하고 물어뜯은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미국의 중앙은행인 ‘제2 미국은행’이 없어질 때 잭슨 대통령 지시에 따라, 정권의 명에 고분고분한 애완 은행에게 연방정부 자금을 몰아준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었다.



드레드스콧 사건의 동상(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출처 : 위키피디아>



드레드 스콧 판결 이후의 결말


판결 후 드레드 스콧은 세인트루이스에 위치한 한 호텔에서 짐꾼으로, 그의 부인은 세탁소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판결 1년 후인 1858년 11월에 결핵으로 사망했다.


부인인 해리엇은 남북전쟁의 혼란에서도 살아남았고, 자유를 얻은 뒤에 그녀의 두 딸, 손주들과 함께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1876년 미주리에서 사망했다.



드레드 스콧의 두 딸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후에 그녀의 자손인 로빈슨 스콧의 후손들이 로저 니 대법원장의 후손들과 만나 공개 사과를 요구했고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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