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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Sep 09. 2021

캔자스-네브래스카 법과 '피의 캔자스'

미국의 노예제도 06

'1850년 대타협' 이후 다시 한번 남부와 북부가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시작은 캘리포니아 주와 마찬가지로 연방에 새로 가입을 원하는 주가 생기면서부터였다.


갈등이 고조된 캔자스-네브래스카 지역


오하이오의 서부 지역이 새로 연방 가입 신청을 하면서 캔자스-네브래스카 지역으로 분리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1856년 지도. 노예주(회색), 자유주(분홍색), 미국 속령(녹색), 캔자스 (정중앙, 회색)으로 표시 <출처 : 위키피디아>



처음으로 의회의 합의를 거친 제도에 의해 노예제도의 여부를 시민들의 투표에 맡겼다.


이 지역은 노예제를 찬성하는 쪽의 비율이 높았다. 투표가 시작된다면 결과가 바로 한눈에 보였다. 그러자 바로 북부에서 이의를 제기했다.


기존의 미주리 협정을 근거로 36도 이상의 주는 무조건 노예제를 반대해야 한다는 논리를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북부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남부 주 출신의 의원들은 자신들의 정책과 의지를 담아 ‘캔자스-네브래스카 법(Kansas–Nebraska Act)’을 통과시켰다.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을 통과시킨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의 통과


결국 새로운 법이 통과되면서 미주리 협정은 사라지게 됐다


참고로 이 법은 일리노이 주 출신의 민주당 상원의원 스티븐 A. 더글라스가 제안했는데, 나중에 링컨과 대통령 후보를 놓고 맞대결을 벌인 정치가이다.


 

스티븐 A. 더글라스 상원의원 <출처 : 위키피디아>



이 법의 주요 취지는 캔자스 준주와 네브래스카 준주를 설립 후, 개척 주로 받아들이되 나중에 2개의 준주가 정식 연방 주로 승격할 때 노예 제도의 인정 여부를 주민들에게 결정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미주리 타협을 중지하자는 뜻이었다.

 

법이 통과된 이후 이곳에서 열릴 노예제 찬반 투표를 앞두고 남부와 북부의 치열한 여론전이 시작되었다.


결국 극한 감정대립까지 벌어졌는데, 북부에서는 투표에 이기기 위해 아예 북부 주민을 이주시키기까지 했을 정도로 과열 양상을 띄었다.



1821년 미주리 타협선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북부와 남부의 극한 대립


하지만 캔자스 주는 결국 1857년 투표를 통해 노예제를 허용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북부는 맹렬히 반대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예 제도를 반대하는 주민들에게 투표를 실시할 수 있는 수단을 올바르게 제공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북주 주민들이 거부한 이 안건은 결국 법원을 거쳐 연방정부까지 올라갔고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연방의회는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요건 불성립을 이유로 재투표를 지시했다.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재투표를 시행하라는 의회의 결정은 반대로 남부 노예제 찬성론자들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왔다.


결국 이 법은 주민의 과반수 의견이 결과에 반영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폐지되었다. 이 과정에서 캔자스 내 북부 인들은 별도로 자신만의 주 정부를 새로 만들었다.


두 개의 주 정부가 들어선 캔자스


토피카 지역에 새로운 북부인들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캔자스 내에서 두 개의 주 정부가 서로 연방 가입을 신청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발생했다.


극심한 감정 대결은 이후 몇 년 동안 이어졌고 이후 진행된 투표에서는 오히려 캔자스 주에 노예제를 폐지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 법안은 주 의회의 인준을 받았고 1861년 1월 노예제도를 거부하는 자유주로서 연방에 새로 가입했다.


이러한 영향일까? 연방 가입 후 세 달 뒤에 남북전쟁이 발발했다.

 


남북전쟁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지하철도 운동의 시작과 '피의 캔자스' 사태


이러한 시대적 과정 속에 북부에서는 ‘지하철도 운동(Underground Railroad)’이 진행되는 등 남부의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지속적인 운동을 벌였다. 


남부는 자신의 사유재산을 무단으로 강탈해간 북부를 증오하게 되었다.


양쪽의 극심한 갈등은 결국 캔자스 내 지역적 비극을 불러오게 되었고, 일명 '피의 캔자스’(Bleeding Kansas)'라는 사건이 발생했다.



1856년 미 상원에서 찰스 섬머를 공격하는 프레스턴 브룩스 <출처 : 위키피디아>



이것은 1854년 ~ 1861년 사이에 캔자스 준주 지역과 인접한 미주리 주에서 벌어진 노예제 찬성론자와 폐지론자 사이에 벌어진 폭력적인 사태를 말한다.


사실상 남북전쟁 이전의 전초전 성격을 가질 정도로 극심한 이념적, 감정적 대립을 불러왔고 정치적 갈등도 심각했다.


이를 부채질한 계기는 일명 '드레드 스콧 대 샌드퍼드(Dred Scott v. Sandford)' 판결이라 불린 사건이었다.


가뜩이나 극심한 감정 대립에 불을 붙인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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