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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팔 Nov 21. 2020

유치한 고백의 참맛

책장을 정리하다 추억을 발견했다.

아내와 연애시절 첫 생일에 사준 책이었다. 나는 그 책 첫장에 고백하는 글을 적었다.

"어휴~ 어쩜 그렇게 유치했어. 그때 내가 이 책 받으면서 말은 안했지만 집에 가서 당신이 쓴 글 보구 얼마나 웃었는데.." 이 글을 다시 보여주자 아내가 한마디 던진다. 마치 그때 숨긴 비웃음을 이제야 마음 놓고 들어내듯.
 "유치했다니, 이 봐 우린 그때 고작 이십대 초반이었다구"
 그렇게 대꾸하는 나도 마른 웃음을 참지 못한다. 밤새 생각하면서 온갖 화려한 수사의 구절들을 끄적거리면서 고치고 또 고치다 결국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다. 휴지통으로 들어간 종이가 작가의 버린 원고지처럼 쌓여갔다. 그래 그냥 한 문장으로 임팩트 있게 가자라는 결론으로 쓴 글이었다. 요즘말로 하면 나름대로 날린 돌직구였는데... 그런 심정으로 쓴 글을 고작 유치함으로 치부해 버리다니.
 

사랑 표현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말이건 행동이건 내면보다는 외적인 포장에 더욱 소모적이다. 지독히 이기적이고 때론 소름끼치는 광기까지 느껴진다. TV드라마 속 사랑과 집착은 접입가경이다. 말초신경을 자극하지 못하고 누군가에 상처를 주지 않는 사랑은 사랑도 아닌거다. 그럼에도 거기에 반응하는 시청율은 늘 최고다. 이런 막장 사랑이라도 해 보고 싶다는 심리인가.

"당신의 사랑은 너무 짙어서 숨막혀."
"사랑은 원래 그런거야. 그렇치 않으면 사랑이 아니야. 희박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야."    

                               - 토니 모리슨. <빌러비드> -

인공호흡이라도 시켜가면서 사랑해야 할 판이다. 서로를 미칠 것처럼 사랑하는 연인들이라고 해도 둘 중 하나는 상대방보다 조금 더(덜) 사랑한다고 한다. 어찌 들으면 당연하다. 사랑의 감정이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두 사람 심장을 꺼내어 저울로 사랑의 무게를 제어 본다든가 누구 심장이 더 요동치는가를 확인해 볼 수도 없으니.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사랑의 표현에도 배려가 있어야 한다. 혼자만 거친 숨을 몰아 쉴 것이 아니라 같이 호흡할 수 있는 사랑이 필요하다. 사랑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지만 그러면 상대방의 사랑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자기 사랑만 보고 질주하기 때문이다. 때론 멈춰서 서로의 모습을 보기도 해야 한다. 그래서 사랑은 같은 곳을 바라보되 늘 마주보면서 가야한다.

 

화가 장뒤뷔페 작품들을 아르브릿(Art Brut)이라고 부르는데  "정제되지 않은 순수한 예술"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가 그린 작품들 중 일부는 이제 막 연필을 쥐기 시작한 아이들 손놀림과 다를 바 없다. 우린 그의 작품들에서 유치함-명화에만 맞춰진 눈높이 때문에-을 생각하지만 그럼에는 정작 그 어떤 유치함도 찾아 볼 수 없다. 가공되지 않는 원시성, 자유로운 영혼의 동심이 빚어낸 순수한 세계가 펼쳐진다. 온갖 레시피가 난무하고 언제든 간편하게 만들어먹을 수 있는 음식에 우리 혀는 무뎌있지만 방금 담근 김치겉절이의 익지 않은 투박하면서도 아직 조화되지 않은 갖은 양념 맛, 그 자극적인 식감이 때론 그립기도하다. 015B의 <아주 오래된 연인>처럼 이젠 너무 익어버린 사랑의 맛으로 식상했다면 유치했지만 풋풋하고 순수한 그 때 언어들을 다시 꺼내 보는 것은 어떨까.

 

"항상 생각하고픈 그대에게.. 그리고 그대도 항상 생각하는 사람이 되도록...."

40년 전 아내에게 쓴 그 한 문장은 이랬다.

이 유치한 고백의 맛은 어떤가. 비록 세련되고 품격 있는 말은 아닐지라도 지고지순한 청년의 다듬지 않는, 날 것 그대로의 사랑이 함축되어 담긴 느낌이 팍팍 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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