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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팔 Jan 08. 2021

옳지 않은 생명은 없다.

아이의 존재는 처음부터 옳지 않았다.

탄생의 무한한 축복은 태생적 한계가 되었다. 

16개월 된 아이의 엄마는 16개월 전에 아이를 버렸다. 

잔인하다 했지만 아이를 살리려고 선택한 최선이었다.

결국 그 선택도 아이의 삶을 지탱하지는 못했지만.


아이에겐 어느 부모가 진짜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 집에 처음 들어간 날에도 잠시 밖에서 놀다 돌아온 것이라 여겼다. 

자기 집이었고, 엄마고 아빠였다. 

배고플 때 밥 주고, 잠잘 때 재워주고, 아프면 치료해주고, 울 때 안아 주길 바랐다.


그들은 애초부터 아이를 키울 마음이 없었다. 

생명을 볼모로 자기들의 행복을 가지고 싶었을 뿐.

영혼의 대가로 욕망을 얻으려는 파우스트처럼

그들에게 삶의 가치는 악과 타협하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아닌 아이를 내던져서.

슬픔은 진실인데 진실은 추악한 것이다.  


어른조차 견디기 힘든 고통을 매일매일 삼키고 살아가다

사라진 아이의 감정은 그 고통마저 무뎌지게 했다. 

그 집에 들어간 지 271일째고

세상이 아이를 선택한지 16개월이 될 즈음이었다.     

아이는 살았던 게 아니라 

그 작은 생명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끝까지 붙들고 있었던 

세상과의 모진 인연이 버텨낸 것이다.


세상을 증오하고 누구를 원망해야할 큰 죽음이지만

어쩌면 아이에게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죽음일지 모른다. 

갓 태어났을 때 갖고 있던, 아직은 악을 깨닫지 못했을 영혼, 

세상이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가를 스스로 알 만큼 살지 않았던 

그 순수함을 가지고 되돌아갔기 때문에.


처음부터 아이의 존재는 옳지 않았고

그래서 더욱 축복된 삶이길 바랐는데

세상은 왜 그토록 도와주질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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