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레디 Action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용팔 Dec 19. 2020

목욕탕 헤어 드라이기의 사용범위


주말마다 대중사우나에 간다. 아버지를 따라 다녔던 어린 시절부터.

물론 그 어린 시절보다 더 작았던 시절에는 엄마를 따라 갔다. 초등학교 1~2학년 때까지라고 하는데 아마 그래서인지 그 금남의 공간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지는 않다. 당시 내가 그 분위기를 아늑하게 즐길(?) 만큼 성숙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짙은 수증기, 물 끼얹는 소리,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서 메아리처럼 들리는 외침소리, 얘기 울음소리. 어릴 적 목욕탕하면 떠오르는 단편적인 기억들이다. 지금도 주간 행사로 치루고 있는지라 한주만 건너뛰어도 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 찝찝하다. 묵힌 때를 씻어낸 후 느끼는 몸은 정말 날아갈 듯 가벼워진다.

목욕탕에선 누구나 그냥 보통사람이다. 껍질 벗겨진 건더기일 뿐이다. 높은 위치에 있거나 밑바닥에 살거나 옷 벗겨 놓으면 얼굴만 뻬고 다똑같다. 있을 곳에 다 같이 있고 달려있을 곳에 다 매달려 있다. 사회적 계급장이 필요 없다.

그나마 아이들을 빼면 딱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탄력 있는 히프를 가진 자와 축 늘어지고 퍼진 방뎅이를 질질 끌고 다니는 자(앞판은 자세히 볼 수가 없으니 비교 불가다). 적나라하지만 보이는 게 그렇다. 나도 나이가 있으니 후자에 가깝다. 눈치 안보고 탕 안에서 방귀를 껴도ㅡ화학적 반응은 일어나겠지만ㅡ, 구석에 앉아 몸에서 나오는 노란 물줄기를 샤워기 물줄기와 같이 희석시켜 흘려보내도 모른다. 거의 완전범죄다. 글쎄 경험담인지는...노코멘트다. 오직 자기 일만 열심히 한다. 육체적 노동을 이렇게 묵묵히 해 내는 일이 또 있을까? 마치 심오한 예술작품이라도 빚어내 듯 한때 한때를 정성스럽게 벗겨낸다. 하기야 때 빼고 광내는 일도 예술일 수 있겠다. 자기 자신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니까. ‘목욕하는 비너스’라는 그림 제목이 낯설지 않은 이유다.  

냉탕은 동네 아이들의 수영장으로 변한지 오래다. 탕 안에 들어가면 냉탕인데도 가끔은 온탕 비슷한 기운이 감돌기도 한다. 물장구치는 어른도 있다. 150근은 족히 나갈 몸으로 왜 저럴까 싶기도 하다. 목욕탕에서 즐기는 동심이라고 하기 엔 한참 버거운 부피를 물에 띄운다.

아빠들은 아이들과 함께 오는 경우가 많다. 우리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원초적인 모습으로 아이와 보내는 이 시간은 일주일의 피로가 확 풀리는 기분이 든다. 물론 지지리도 말 안 듣고 목욕탕에만 오면 설치는 녀석들도 종종 있는데 그것도 좋다고 가만 놔두는 아빠를 보고 있으면 스트레스가 더 쌓인다. 반면에 소소한 재미있는 광경도 심심치 않다.

한번은 씻고 있던 자리 건너편에서 소리가 들렸다.

거울 틈 사이로 보니 때를 밀어주던 어린 아들과 아빠의 짧지만 강렬한 19금 대화기 이어졌다.  

아들 : 아빠, 아빠 꺼.....

아빠는 묵묵히 아들의 몸을 씻긴다.

아들 : 아빠 꺼.. 크다.

아빠 : (한참을 침묵하다) 너도 어른 되면 커.

아이 : .......................

별 문제없는 부자간 대화로 들린다. 아주 실감나는 시청각(?) 성교육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한참을 생각하니 괜히 나오려는 웃음 때문에 손으로 입을 막는다. 억지로 참고 있다 때를 미는 척하고 일어나 건너편을 힐긋 본다. 엉거주춤 앉아 를 이태리타월로 밀고 있는 사내는 아까 그 150근에 가까운 몸이었다. 아이가 본 건.... 아마도 상대적(?) 일게다. 순간 나와 눈이 맞추진 아들 녀석의 시선은 점점 내 몸 밑으로 내려간다.   



“꺼억”

“깍”

“으억”

“꽥“

또 하나의 기이한 광경이 자주 목격되는 순간이다.

마치 구토라도 하듯 온갖 괴소리가 들려온다.

양치질하는 소리다. 근데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심상치가 않다. 칫솔로 입안 구석구석을 휘 젓는다. 상하로 좌우로 거의 보이지 않을 손놀림으로 쑤셔댄다. 얼굴은 찌그러뜨리면서. 한 술 더 떠 뿌리가 빠질 정도로 사정없이 혓바닥을 닦아대는 건 또 뭔 일인가? 마치 막힌 변기통이라도 뚫을 기세다. 아니라 다를까 이어서 그 괴소리를 연발한다.

그래도 혀에 가해지는 대패질은 멈추질 않는다. 닦는 속도가 더 빨라지더니 눈 주변이 부풀어 오르면서 공기가 꽉 찬 풍선이 터지지 직전이 돼버려 이젠 망둥어 눈이 된다.

“저 저...어..어..눈알 튀어 나온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속도가 줄어들고 서서히 바람이 빠져 나가는 듯 눈이 원상태로 돌아온다. 안쓰럽게 보이는 이 공포의 이 닦기는 거의 5분이 넘어서야 끝이 난다.

왜 저리 무모하게 칫솔질을 하는 걸까? 마치 일주일 치를 한꺼번에 몰아서 닦는 듯하다.

이런 사람들이 여기저기 출몰한다(얼굴만 보면 완전히 좀비수준이다). 참 이상한 전염성 집단 행위다.


목욕은 우리의 원초적인 모습과 연결돼 있다고 한다. 물은 또한 우리들 모두가 최초로 접하는 환경이기도 하다. 출생하기 전까지 우리는 어머니 자궁 속 양수에서 성장한다. 태초에 우리는 모두 목욕 중이었던 셈이다. 같은 이유로 물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은 자궁 속으로 회귀하려는 욕구로 이해된다. (영화 속 목욕신의 심리. 영화와 심리학)


어쩌면 목욕탕이란 공간이 이런 원시성 본능을 분출하게 만드는 장소이기 때문에 일차원적 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타락하기 전의 순수함을 기록한 성경말씀을 충실히 따르려는 듯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 곳 하지 않는다. 목욕의 한자풀이는 머리감고 몸을 씻는다는 의미지만 좀 더 깊게 들어가면 그런 육신적 청결 행위로 마음까지 수양한다는 영적인 정화 작용도 담겨져 있다. 때문에 종교적 의미를 띤 의례의 하나로 행하기도 했다. 동네 대중탕에서 그런 수준 높은 목욕문화까지는 기대하기 어렵더라도 안내문에 적힌 “드라이기는 머리 말리는 데만 사용하세요.” 라는 글귀가 내 얘기는 아니어야 하지 않겠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킬러? 질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