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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을 담는 사람 Oct 06. 2020

LP와 아날로그 감성

어릴 때 우리 집에는 전축이 있었다. LP판도 잔뜩 쌓여있었다.

여유가 생기는 주말 아침이면 엄마는 가지고 있던 LP를 턴테이블 위로 얹었다. 자연스레 나도 그 곁에서 다양한 음악을 들었다. 그래서인지 내 나이 또래보다 옛날 노래에 익숙한 편이다.

내게 따뜻하고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장면은, 크리스마스 무렵 엄마가 캐럴 앨범을 들려주었던 순간이다. 큰방에 이불을 깔고 내가 누워있을 때 엄마는 머리맡에 있는 전축으로 캐럴들을 들려주었다. 그럼 방 안은 금방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그때부터 내 안에 정서들이 조금씩 생겨났던 것 같다.

시간은 흐르고 음악도 변하고, 음악을 듣는 우리의 모습도 변했고 전축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몇 번 고장이 나던 우리 집 전축도 결국은 버려졌다.


옛 감성을 그리워하는 많은 이들의 마음이 모인 것일까, 조금 더 수고스럽고 정성스럽게 음악을 듣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여전히 클릭 몇 번이면 음악을 다운로드하고 들을 수 있지만, 좋아하는 음악을 듣기 위해 시간을 쏟고 마음을 쏟는 일을 우리는 기꺼이 해내고 있다는 것에 주목할 만하다.

예전에는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이 나오는 날이면 레코드점에 가서 브로마이드를 받고, CD를 사던 일이 당연했고 얼마나 설레는 순간이었는지 모른다. 요즘도 여전히 CD가 나오기는 하지만 예전과는 사뭇 다른 풍경에 익숙해지고 있다.

방학 때 사촌들이 모이는 날이면 동네 비디오 가게에 가서 비디오와 만화책을 잔뜩 빌리고, 과자를 한 아름 사서 이모집 거실에 배를 깔고 누워 언니 오빠들과 시간을 보냈던 기억들도 이제는 먼 기억이다. 그때가 참 좋았는데. 이런 말 많이 하면 나이가 든 거라던데, 정말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모습들을 보아도 우리는 편해진 만큼 수고스럽고 정성스럽던 아날로그 감성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거꾸로, 다시 그 감성을 찾기 위해 시간을 거꾸로 걷고 있다.


최근 우리 집은 다시 턴테이블을 샀다. 그리고 LP판을 모으고 있다. 엄마가 열심이다. 나도 그런 엄마 덕에 하나둘씩 모으고 있다.

꼭 그때처럼, 여유 있는 시간에 듣고 싶은 LP를 골라 듣는다. 깨끗한 음질은 그 나름대로 좋고, 세월을 머금어 지지직거리는 소리도 그 나름대로 좋다. 세월을 머금은 모든 것들은 의미 있고, 아름답다.

엄마는 LP가게를 요즘 열심히 찾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새로운 가게 한 곳을 갔다. 얼마나 많은 앨범들이 있던지, 신이 나서 이것저것 구경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좋아하는 앨범을 한두 장 모으다 보니 어느새 이 일을 한 지 12년이 되었다고 하시는 사장님 역시도 우리에게 신이 나서 여러 앨범들을 소개해주셨다. 그리고 좋은 스피커로 앨범을 들려주는 친절함까지. 덕분에 귀가 호강하고 왔다. 한 가지 더 감동한 것은, 갖고 싶던 앨범을 문의드렸는데 딱 한 장 사장님이 소장하고 계신 것을 흔쾌히 주신다고 하신 것이다. 오래된 영화인데 어떻게 아냐고 하시며, 본인은 또다시 구하면 된다고 하시면서 말이다. 이런 친절, 이런 낭만, 이런 공감대라니. 역시 취향의 힘은 엄청나다 만세!


엄마는 앨범을 사고 돌아오는 때면 늘 훗날 나의 디저트를 굽는 공간에서 모아둔 LP를 틀어두자고 말한다. 그리고 오늘은 그런 날이 올까? 묻는 나에게, 당장은 아니더라도 꿈꾸다 보면 그런 날이 올 거라 말했다. 이런 낭만도, 꿈을 꾸는 힘도 엄마를 닮은 것 같다. 달콤한 케이크 냄새와 따뜻한 오븐 온기, 좋아하는 음악들이 흘러나오는 공간을 떠올리며 행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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