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음을 그저 평온하게 바라봅니다. 그것은 하나의 끝일 뿐입니다. 죽음이 삶의 발목을 잡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죽음은 오직 삶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하기 위해서만 존재해야 합니다.(I think of death only with tranquility, as an end. I refuse to let death hamper life. Death must enter life only to define it.)"(장 폴 샤르트르, [닫힌 방] 중에서)
죽음은 모든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죽음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이는 당연한 일이겠죠. 죽음은 인류의 보편적 경험이면서도, 아무도 그 너머를 알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때로는 그 존재를 애써 외면하려 합니다.
하지만 알베르 카뮈는 색다른 시각을 제시합니다. "죽음은 삶의 일부"라는 그의 말은, 죽음을 삶과의 단절로 보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릅니다. 카뮈에게 삶과 죽음은 마치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고 보았죠. "죽음이 삶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그의 태도는, 오히려 삶을 더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죽음이 없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시간의 유한함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시간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면, 오늘의 선택이나 하루하루의 소중함도 희미해질 것입니다. 하이데거가 인간을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고 정의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가 죽음을 의식할 때 비로소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마치 영화와도 같습니다. 영화에 끝이 없다면, 이야기는 긴장감을 잃고 흐지부지될 것입니다. 죽음은 영화의 엔딩처럼 삶에 긴장감을 더하고, 우리의 선택을 의미 있게 만듭니다. 지금 여러분이 보내는 하루하루가 인생이라는 영화의 가장 빛나는 장면일 수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삶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됩니다. 위험이 두려워 새로운 도전을 피하는 사람의 삶은 단순한 생존에 그칠 수 있습니다. 과연 그런 삶이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삶을 온전히 누리는 열쇠가 됩니다. 그것은 "살아있음"의 의미를 더 깊이 느끼게 해주죠. 내일이라도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삶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더 소중히 대하고, 새로운 꿈을 향해 나아가며, 실패를 두려워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이런 태도야말로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듭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음악의 쉼표와도 같습니다. 쉼표가 없다면 음악은 혼란스러워지겠죠. 하지만 적절한 쉼표는 멜로디에 생동감을 더하고, 곡 전체를 아름답게 만듭니다. 우리 삶에서도 죽음은 이런 쉼표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삶의 흐름을 정리하고, 우리의 나날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어주죠.
결국 죽음은 삶의 경계이자 삶을 빛내는 바탕이 됩니다. 삶은 단순히 살아 있는 날들의 합이 아닙니다. 그것은 순간의 충만함과 선택의 깊이에서 완성됩니다. 오늘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과 나눈 대화, 함께 웃었던 순간들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삶은 매일 우리에게 묻습니다. "이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이 물음에 답할 힘을 줍니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오히려 그것을 삶의 동반자로 받아들이세요. 그럴 때 오늘 하루는 더없이 소중한 선물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