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기 위해 이해하려 하지 말고, 이해하기 위해 믿으라."(Therefore do not seek to understand in order to believe, but believe that thou mayest understand.)(아우구스티누스, 요한복음 설교문 중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말은 단순한 종교적 가르침을 넘어 인간의 앎과 이해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신앙(fides)과 이성(ratio)이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신앙이 이성의 기초를 제공하고, 이성이 신앙을 더욱 깊게 이해하도록 돕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신앙은 우리가 이성적으로 이해하려는 대상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도록 해주며, 이성은 그 신앙을 뒷받침하는 논리적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서로 상호 보완하는 역할을 합니다. 오히려 믿음은 이성을 이끄는 길잡이로서,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 더 깊은 진리를 탐구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종교적 영역을 넘어 모든 앎의 과정에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예를 들어, 과학자가 연구를 시작할 때는 "자연은 일정한 법칙을 따른다"는 기본적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술가가 작품을 창작할 때도 '내면의 영감이 표현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교사가 학생을 가르칠 때도 "이 학생은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모든 이해는 특정한 전제와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방식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모든 판단은 우리의 문화적 배경, 경험, 가치관이라는 전제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부터 특정 문화에서 자라온 사람은 그 문화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타인의 행동을 해석하게 됩니다. 한 사회에서 존중의 표현으로 여겨지는 행동이 다른 사회에서는 무례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면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하고, 갈등을 줄일 수 있습니다. 이를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는 타인과 세상을 왜곡된 방식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조용한 동료를 만났을 때를 생각해봅시다. 어떤 사람은 그를 '소극적'이라고 판단하고, 다른 사람은 '신중하다'고 평가합니다. 같은 행동도 우리가 가진 전제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각은 타인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객관적인 지식과 사실을 알고 있다고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객관적인 지식과 사실만이 진리라는 믿음으로 너무 쉽게 도약하곤 합니다. 그래서 객관성을 앞세우며 시작했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이 옳다는 고집과 편견으로 빠지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특정 과학적 이론을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일 때 그 이론에 대한 새로운 증거나 반박을 무시하게 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관점을 지속적으로 점검하고, 다양한 의견에 귀 기울이며, 열린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극단적인 객관성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이 반대편 쪽으로 극단적인 고집과 편견으로 가는 길은 너무 쉽고 짧은 지름길이 되는 사례가 너무나 많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 각자가 필요로 하는 것은 맹목적 믿음도, 극단적 회의도 아닌, 이해를 향한 열린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새로운 기회를 받아들일 때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신뢰를 기반으로 소통할 때 이와 같은 열린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열린 믿음의 자세가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개인적인 성장을 이루는 나침반이 될 것입니다.